“수요는 주는데, 원료 가격은 치솟는다.”
최근 위상이 추락 중인 플라스틱(합성수지)의 현실이다. ‘탈탄소’ 정책 등의 영향으로 최대 수입처인 중국의 수요는 점차 침체하는 데 반해 1차 원재료에 해당하는 원유 가격은 솟구치고 있다. 이미 폴리에틸렌(PE)과 폴리프로필렌(PP) 등 플라스틱 생산 공정은 멈춰야 한다는 요구가 나올 정도로 수익성이 악화했다. 한 석유화학업체 관계자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통상적으로 쓰던 합성수지 제품은 애초 중국 물량을 이길 수 없었고, 수요 자체도 줄며 사양산업화하고 있다”고 전했다.
국내 주요 석유화학업체들은 이미 몇 년 전부터 ‘썩는 플라스틱’이나 ‘재활용이 가능한 플라스틱’ 등 고기능성·고부가가치 플라스틱 생산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확산 중인 썩지 않는 일회용 플라스틱 사용 줄이기 분위기에 대비하는 것이다. 고기능성 플라스틱은 에틸렌·프로필렌 등의 사용을 완전히 벗어날 순 없으나 사용 비중은 줄일 수 있다. 가령 롯데케미칼의 바이오페트(PET)는 사탕수수에서 추출한 원료를 에틸렌을 대체해 일부 사용한다.
최근 석유화학업체들의 경영 메시지도 고기능성 플라스틱 생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엘지(LG)화학은 올 초 실적 발표 자리에서 재활용 또는 생분해성 플라스틱 등 친환경 소재 제품의 생산을 강화한다고 발표했다. 에스케이(SK)케미칼은 최근 열린 주총에서 기존 석유화학 기반의 플라스틱을 바이오 플라스틱으로 대체하는 내용의 체질 개선안을 밝혔다. 롯데케미칼은 31일 재활용 플라스틱 사업 확대 계획을 내놨다. 금호석유화학은 지난해 폐플라스틱 재활용 사업 추진 계획을 세웠다.
석유화학업체들이 이처럼 기존 플라스틱과의 ‘작별’을 고하는 가운데, 정유사들은 거꾸로 석유화학 제품 소재의 핵심 기반인 에틸렌·프로필렌 등 기초유분 공정에 열을 올리고 있다. 지에스(GS)칼텍스의 올레핀 공정, 현대오일뱅크의 중질유분해설비(HPC)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들 기업으로선 일종의 체질 개선인 셈이다. 얼핏 최근 흐름을 역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정유사들의 이런 선택은 탄소 배출 문제와 관련해 갈수록 거세질 비판에 대비하는 전략이기도 하다. 휘발유·경유 등 화석연료가 점차 외면받는 분위기에서 ‘정유사’란 타이틀을 갖고 미래 사업을 추진하는 게 갈수록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특히 정유사는 모든 원료의 근간이 화석연료이기 때문에, 탄소 중립을 위한 사업 다각화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한 정유업체 관계자는 “그래서 선택한 것이 기초유분 공정이다”고 말했다.
국내 석유화학업체들은 정유 공정이 없어, 나프타를 사다가 기초유분을 추출한다. 이와 달리 정유사들은 자체 정유 시설에서 나프타뿐 아니라 기초유분을 만들 수 있는 다양한 원료를 뽑아낼 수 있다. 이를 기반으로 더 효율적인 기초유분 생산이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한 정유사 임원은 “더 효율적으로 에틸렌을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은, 같은 양의 석유화학 제품을 만들 때 탄소가 더 적게 배출되는 효과를 보는 것”이라고 밝혔다.
한 에너지업계 관계자는 “점차 외면받는 수송연료 사업을 대체하려면 새로운 사업을 벌여야 하는데, 태생적으로 한계가 있다”며 “어쩔 수 없이 기존 설비 활용도를 높여 석유화학업체들의 텃밭 자리를 비집고 들어서는 꼴”이라고 지적했다.
곽진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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