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울주군에 있는 신고리 원전 3·4호기 전경. 한국수력원자력 제공
“이러다가는…”
메리츠증권은 지난달 25일 펴낸 한국전력공사(한전) 분석 보고서에 이런 제목을 붙였다. 한전이 지난해 영업적자 5조9천여억원을 기록했다고 밝힌 직후다.
‘이러다가는’ 뒤에 생략된 단어는 ‘최악의 위기’다. 증권가의 올해 한전 영업적자 전망치는 역대 최대 규모인 9조∼20조원에 이른다. 적자가 지난해의 2배 넘게 불어나리라는 얘기다.
이는 전기 만드는 데 드는 비용이 급증했지만 요금은 올려 받지 못해서다. 한전은 발전 자회사 6곳과 민간 발전회사들이 생산한 전력을 사서 기업과 가정 등에 공급한다. 한전의 전력 판매 가격은 1킬로와트시(kWh)당 평균 100원 안팎으로 큰 변화가 없는 반면, 전력 구매 가격(SMP)은 껑충 뛰고 있다. 한전 쪽은 “지금은 전기를 팔수록 회사에 손해인 구조”라고 하소연한다.
실제 지난해 1월 1kWh당 71원이었던 한전의 전력 구매 단가는 현재 200원에 육박한다. 도매 시장에서 사 오는 전기값이 1년여 새 3배 가까이 치솟은 셈이다. 코로나19 회복에 따른 전력 수요 증가, 값싼 석탄을 대신하는 고가의 액화천연가스(LNG) 발전 확대 등이 복합적으로 맞물린 결과다. 세계적인 친환경 에너지 전환 정책에 따라 각국의 천연가스 의존도 상승,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으로 인한 원자재 가격 급등 같은 상황이 맞물려 한국에는 한전의 ‘눈덩이 적자’라는 청구서로 돌아오는 셈이다.
문제는 적자를 해소할 전기 요금 인상의 불확실성이 크다는 점이다. 정부는 대선 직후인 올해 4월과 10월 전기 요금을 각각 1kWh당 4.9원씩 인상할 계획이다. 발전 연료비 상승에도 코로나 장기화와 고물가 우려 등으로 동결했던 요금을 일부 정상화하겠다는 취지다.
하지만 주요 대선 후보들이 에너지 공약에 전기 요금 얘기는 쏙 빼면서 불확실성을 부채질하고 있다.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는 애초 다음달 전기 요금 인상 백지화, 코로나 위기 기간 요금 인상 자제 등을 약속하며 전력 공급 계획을 새로 수립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최종 공약집엔 이런 내용을 통째로 뺐다. 윤석열 캠프에 참여 중인 주한규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는 <한겨레>에 “공약집에 없어도 후보자가 발언한 것은 모두 공약”이라고 했다.
윤 후보의 핵심 에너지 공약인 ‘탈원전’ 정책 폐기, 원자력 발전 확대 등도 당장 한전의 적자 부담 완화에 도움이 되리라고 기대하긴 어렵다. 강동진 현대차증권 연구원은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이미 원전 가동률이 많이 올라와 있는 데다, 현재 건설 중인 신규 원전을 돌린다 해도 일부 도움이 될 뿐 한전의 지금 상황을 뒤바꾸기는 쉽지 않다”고 말했다.
한전과 한국수력원자력 등이 제공한 자료를 보면 국내 전체 발전량에서 원전 발전 비중은 지난해 4분기 약 30%, 원전 이용률은 올해 2월 기준 86%로 문재인 정부 이전 수준까지 올라와 있다. 대선에서 각 후보가 뚜렷한 대립각을 세운 원전 분야 공약이 정작 현실의 전기 요금에 미칠 영향은 미미하다는 의미다.
강 연구원은 올해 전기 요금 9.8원을 인상해도 한전의 영업적자가 20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다. 여기에 더해 1kWh당 40원 가량을 추가로 올려야 수익과 비용이 같아지는 손익분기점을 달성하리라는 것이다. 전기 요금을 30% 넘게 인상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 쪽도 이 문제에 침묵하는 건 마찬가지다. 이 후보 캠프의 한 관계자는 “내부적으로 전기 요금 현실화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있지만 서민 경제 부담 등을 고려해 일단은 기존 정부 계획대로 가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라고만 말했다.
한전이 한국과 미국 증시에 상장한 공기업으로 주주들의 이해관계도 있는 만큼 새 정부가 적자 문제에 계속 손을 놓고 있기는 어렵다. 다만 요금 인상 얘기를 선뜻 꺼내지 못하는 건 정치적 부담 때문이다. 애초 윤 후보 캠프 내부에선 전기 요금 인상을 정부와 정치권 입김이 닿지 않는 독립된 위원회가 결정하게 하자는 방안이 논의되기도 했다. 하지만 공약집에 이 같은 내용이 반영되지 않은 점도 향후 요금 인상 논의가 순탄치 않으리라는 걸 예상케 하는 사례다.
황성현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올해 전기 요금을 10∼15% 정도 올려도 전력 원가는 이보다 훨씬 높은 40∼50% 상승할 것으로 예상돼 한전 부채비율(부채를 자기자본으로 나눈 백분율)이 올해 300%에 이를 전망”이라며 “과거 박근혜 정부 사례를 보면 공공기관 부채 비율이 200%를 넘을 경우 정부의 에너지·공공요금 정책에 변화가 생겼던 만큼 올해 한전 재무 건전성에 관한 사회적 논의가 시작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지난해 말 현재 한전의 부채비율은 223%이다.
박근혜 정부는 앞서 지난 2013년 한전 등 공공기관 41곳의 부채 비율을 당시 220%에서 2017년 200% 수준으로 낮추는 내용의 공공기관 개혁 방안을 발표하고 추진한 바 있다.
박종오 기자
pjo2@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