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대한 상공희의소에서 유명희 경제통상 대사가 한겨레와 인터뷰 하고 있다.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유명희 전 통상교섭본부장에 앞서 한국인으로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총장직 도전에 나섰던 예가 둘 있었다. 1995년 김철수 전 상공부 장관, 2013년의 박태호 전 통상교섭본부장. 지난해 5월 출사표를 던졌던 유 전 본부장은 세 번째 한국인 도전자이자, 후보를 2명으로 압축한 결선까지 오른 첫 사례였다. 사무총장 최종 선출 직전인 올해 2월 후보직 사퇴를 선언해 끝내 뜻을 이루진 못했지만, 강한 인상을 남겼고 일정한 성과도 거뒀다는 평가를 받았다.
유 전 본부장은 임기를 마친지 한 달 만인 9월7일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 ‘경제통상 대사’로 임명받았다. 정부의 경제통상 관련 외교 활동을 지원하는 자리이며 임기는 1년이다.
유명희(54) 대사는 새로운 임무를 맡은 뒤 <한겨레>와 만난 자리에서 “정부서 필요한 일이 있을 때 돕는, 조언하고 제언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유 대사는 “대사직이라 외교부에 배속돼 있을 뿐 외교부 연관 업무로 한정되지 않고 범부처 일을 맡게 되며, 시기·상황 따라 필요한 분야에서 지원하는 업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제 통상이 국제 패권을 다투는 주요 수단으로 격상됐다”며 “새로운 분야의 국제 규범을 주도해 만들어가면서 전 세계 룰이 파편화, 분절화되지 않고 가급적 수렴되게 역할을 하는 ‘룰 메이커’로 등장해야 할 시기”라고 말했다.
유 대사는 1991년 행정고시 35회로 공직에 입문해 30년 동안 주로 통상 분야에서 관록을 쌓은 전문가다. 인터뷰는 지난 16일 오후 대한상공회의소 회의실에서 대면으로, 이어 추가 전화통화로 이뤄졌다.
― 코로나19 백신 확보를 측면 지원하는 일 등도 대사직 업무에 포함되나?
“경제통상 이슈 중의 하나일 수 있다.”
유 대사는 여기에 “정부와 민간 기업 간 소통을 촉진하는 일도 덧붙여 맡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30년 공직 생활하면서 산업부, 외교부 쪽에서 각각 절반씩 일했다. 해외 현장을 많이 뛰었지만, 기업들과 접촉하는 일도 많았다. 현안이 생기고 요청이 들어오면 조언하고 지원하는 데서 나아가 구체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다.”
― 세계무역기구 사무총장직 도전 때 일찍 사퇴하지 않고 막판까지 갔던 것은 본인 뜻이었는가, 아니면 국가 차원의 결정이었나?
“사무총장 자리는 본래부터 투표하고 개수 세는 방식으로 결정하지 않는다. 컨센서스, 의견 합의·일치로 후보가 당선되는 식이다. 당시 미국이 상대방 후보에 대해 비토(반대)하고 있어 의견 일치가 이뤄지지 않았다. 저를 지지한 나라든 아니든, 협의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제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 관련국들의 의견 일치를 위한 협의가 필요했고, 정부와도 협의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마지막에 미국 등 주요 관련국 간 의견 일치, 컨센서스 하에 마무리되는 절차를 밟는 데 시간이 걸렸다.”
유 대사는 사무총장직 도전에서 막판에 고배를 마셨지만, 나름의 성과를 낸 것으로 평가했다.
”통상교섭본부장에서 물러난 직후 캐서린 타이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가 편지를 보내왔다. 본부장 임기 잘 끝낸 거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한국이 (더블유티오 사무총장) 선거 캠페인을 훌륭하게 벌였고 국제무대에서 더 큰 역할을 맡을 준비를 하고 있음을 전 세계에 보여줬다’는 찬사였다. 여러 나라 장관, 통상 전문가들이 편지, 이메일, 에스엔에스(SNS) 메시지를 보내왔다. 훌륭한 선거 캠페인이었다는 인사였다. 선거 운동 그 자체가 의미 있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한다.”
유 대사는 “한국은 개도국, 선진국 경험을 다 보유하고 있다”며 “이는 우리만의 장점”이라고 말했다. “교역을 통해 개도국에서 선진국으로 성장한 스토리에 전 세계가 공감대를 이룬다는 느낌을 갖게 됐다. 우리에 대한 기대가 컸다. 그 힘으로 결선까지 갔다. 우리 세대에서 비전을 보여줬으니 다음 세대는 그 바탕으로 국제기구 수장을 맡을 사람이 충분히 나오지 않을까 싶다.”
― 한국인 사무총장 나오면 한국엔 어떤 이점이 있는 것인가?
“우리는 교역체제를 통해 성장한 나라다. 교역이 정체되고, 문 닫고 일방 보호주의, 자국 우선주의로 가면 손해다. 자유무역 체제가 원활하게 돌아가고 발전하는 게 보편 이익이기도 하고, 우리에게도 이익이다.”
유명희 경제통상 대사.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 미·중 무역전쟁 양상이 우리에게 어떤 선택을 강요한다고 보는가?
“특정 국가에 대해서가 아니라 어떤 가치를 지향하느냐의 문제라고 본다. 어떤 가치를, 어느 정도 범위에서 주요국과 국제무대에서 추진해 나가느냐는 문제라 할 수 있다. 특정 국가가 아니라 이슈 중심으로 의견을 내고 지지하느냐, 마냐 하는 사안이라고 본다. 자유무역을 통해 성장한 세계 경제는 서로 연결돼 있다. 통합 체제다. 자유무역 가치를 공유하면서 증진시킬 방향으로 협력해야 한다.”
― 반도체 공급망 강화 과정에서 한국이 미국에 밀착하는 듯한 모습이다. 한국 경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할 때 부담을 줄 요인 아닐지.
“중국은 주요 협력 파트너이고 교역은 지속되고 있다. 반도체 분야에서 한·미 간 협력은 경제적 시너지 효과를 내자는 것이며, 한·중 관계를 해칠 요인은 아니라고 본다. 반도체 설계 분야의 핵심 기술은 미국이 선도하고, 우린 생산 능력에서 세계를 선도하고 있다. 두 나라 간 협력은 반도체 산업의 지속 발전에 도움을 준다고 본다.”
― 일본의 수출 규제(2019년 7월) 당시 통상당국 수장으로서 위기감을 느끼진 않았나?
“수출 규제 직후 미국에 출장을 가거나, 알셉(RCEP·역내 포괄적 경제동반자 협정) 회의에 일본 세코 장관(당시 일본 경제산업부)과 같이 참석했을 때 얘기했다. 일본의 조치는 장기간에 걸친 촘촘한 신뢰관계로 구축된 글로벌 공급망을 깨는 거라고. 백신 하나 만드는 데 200개 넘는 원부자재 필요하다지 않는가. 비경제적 문제로 공급망을 훼손하는 것은 신뢰를 저해하고 부정적 선례가 된다고 했고, 많은 나라들이 공감했다. 미국 가서도 의회 관계자, 상무부 장관 만나서 얘기했고, 공감 끌어냈다.”
유 대사는 “일본 조치는 결국 안 좋은 선례를 남긴 것이었다”고 말했다.
“국제 비즈니스 신뢰를 훼손했고, 자기네 비즈니스의 안정성도 깬 것이고 불확실성이 증가했다. 반면, 우리로선 코로나 사태를 겪기 전에 미리 공급망을 재점검하게 된 중요한 계기였다. 부족한 부분에선 공급선 다변화, 투자 유치, 자체 개발로 보강하는 작업을 했다. 코로나 사태를 맞았을 때 곧바로 대처할 경험을 축적했던 것이다. 일종의 ‘백신’을 맞은 격이었다고 본다.”
―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 추진에 대한 의견은? 미국에 앞서, 또는 미국 뒤따라 가입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식으로 분분한데.
“미국 가입 여부보다 우리 쪽 준비가 되고 의견이 모였을 때 하는 게 좋다고 본다. 국내 이해관계자들과 협의하는 문제에서 의견이 모이면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단계라 본다.”
― 미국 가입 여부는 고려할 사항이 아니라는 것인가?
“고려 사항이 아니라기보다 결정적이진 않다는 것이다.”
― 급하지 않은 사안인가?
“시한을 정해놓고 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이해관계자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의견 수렴이 되면 하는 것이지, ‘언제까지 한다’는 식으로 시한을 부여하는 것은 불필요할 듯하다. 국내 산업계에서 업종별로 이해관계가 다르고, 농업·수산업도 분야별로 다르다.”
― 이 협정의 의미는 뭔가?
“최대 규모의 ‘메가 에프티에이’인 ‘알셉’만큼 크지는 않지만 규범이나 시장 개방 측면에선 더 높은 수준이다.”
― 협정에 대한 미국의 태도는?
“제가 아는 바로는 바이든 미 행정부의 외교정책은 중산층을 위한 외교다. 미국 중서부, 노동자들을 위한 ‘워커 센트릭’(노동자 중심) 통상정책이다. 시장개방보다 노동자들에 도움되는 통상정책을 하겠다는 거다. 미국 입장에 대해 예단은 못 해도 시피티피피보다는 다른 업무를 우선에 두고 추진할 거라 본다.”
― 이 협정은 일본에 의해 주도된다는 분석은 맞는 것인가?
“어느 나라 주도라 할 수 없다. 일본이 주요 참가국인 건 맞다. 뉴질랜드, 싱가포르 등 4개국으로 시작했고, 일본은 나중에 들어갔다. 경제 규모가 가장 큰 나라가 일본이다. 미국이 중도에 빠지면서 일본이 가장 큰 국가가 됐다.”
― 국제정치적인 맥락이 깔린 협정인가?
“시기별로 다르다. 처음엔 미국의 ‘피봇 투 아시아’(아시아 중시정책)로 시작됐다. 미국이 빠진 지금은 아·태 지역의 무역자유화를 추진하는 ‘메가(대규모) 에프티에이’로 자리매김했다.”
공교롭게도 대면 인터뷰 다음 날인 17일 중국이 이 협정 가입을 공식 신청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이 대목에 대해선 전화를 통해 추가로 질문했다.
― 중국의 가입 신청이 받아들여질 것으로 보는가?
“시피티피피는 높은 수준의 규범과 시장개방을 가입국들이 다 맞춰야 한다. 협상이 타결되는 데는 상당한 시일이 소요될 수 있다.”
유명희 대사.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 보호무역주의 성향이 강해지고 있다. 이런 시기에 자유무역 규범의 의미는 뭔가?
“(자유무역주의가) 어려워진 건 맞다. 트럼프 행정부 시절부터 강해진 보호주의 흐름은 일시적인, 한 정권의 정책이 아니라고 본다. 미국 중산층의 경제적 어려움, 좌절이 오래 축적돼 나온 일종의 민심을 바탕에 깔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의 중산층 외교정책도 그런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을 거다. 다른 나라들도 다들 그러고 있는 상황이다. 전 세계가 연결된 상황에서 활동 공간을 찾아야 하는 우리로선, 전 세계 무역규범을 만드는 데 노력하고 일정한 역할을 해야 한다. 지금 전체 상황이 어려운 건 사실이다.”
― 바이든 정부의 통상정책도 트럼프 때와 별 차이가 없다는 뜻인가?
“미국 경제의 회복, 중산층의 회복, 경기부흥 이런 걸 추구한다는 점에서 본질은 같다고 본다. 다만, 바이든 행정부는 다자무대, 다자협상에도 참여해 건설적으로 협조하고 참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캐서린 타이 대표가 임명된 지 일주일도 안 돼 한국을 비롯한 주요국 통상 대표들에게 요청해 화상회의를 했다. 다른 나라 얘기를 듣고 같이 고민한다.”
유 대사는 “예전엔 통상당국이 시장을 확보하고 우리 경쟁력에 도움이 되게 상호 개방하는 통상정책 위주였는데, 이젠 거기서 나아가 통상 이슈가 핵심 기술, 국가안보, 개인정보 보호·활용 같은 사회 문제와도 연결된다”고 말했다.
“통상이 국제 패권을 다투는 주요 수단으로 격상됐다. 반도체, 바이오 등 기술기반 경제 분야의 패권이 외교·군사 패권으로 연결되는 융복합시대다. 이 새로운 흐름에선 정해진 룰이 없다. 새로운 규범·표준을 잡아가는 전환기다. 2차대전 후 전후질서를 만들 때와 비슷한 것 같다. 다른 나라들과 룰을 논의할 때부터 참여해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국제 룰을 만들어가면서 전 세계 룰이 파편화, 분절화되지 않고 가급적 수렴되게 역할을 하는 ‘룰 메이커’로 등장해야 할 시기다. 새롭게 질서가 바뀌는 때 핵심 기술을 확보하고, 해외 진출 공간을 넓히고, 교역을 자유화하면서도 글로벌 표준을 만들어 가는 데 역할을 해야 하는 어려운 시기다.”
김영배 선임기자
kimyb@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