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당국의 회계 심사를 받는 중인데 상장을 한다?’
세계 최대 조선사인 현대중공업의 증권시장 상장 신고서를 보면 눈에 띄는 대목이 있다. 투자자가 주의해야 할 위험 요소의 하나로 현대중공업이 현재 금융감독원의 회계 심사를 받고 있다고 알린 점이다.
이런 문구가 뒤따른다. “심사 과정에서 중대한 오류가 발견돼 과거 재무제표를 다시 작성하거나 과징금 납부, 증권 발행 제한 등 조치가 발생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현대중공업은 이번 상장으로 신주 1800만 주를 발행해 투자금 1조원 안팎을 조달할 계획이다. 일반 투자자들의 신주(공모주) 청약 예정일은 다음달 7∼8일로, 보름도 채 남지 않았다.
현대중공업그룹의 다른 계열사인 현대오일뱅크는 과거 금융 당국의 회계 조사(감리) 문제로 상장을 연기한 적 있다. 국내 조선업계는 지난 2015년 대우조선해양의 분식 회계(회계 부정) 사태를 겪은 탓에 회계 이슈에 특별히 민감하기도 하다. 상장의 사전 절차인 금감원의 회계 심사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현대중공업은 어떻게 상장을 추진할 수 있는 걸까.
결론부터 말하면 이는 제도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예전엔 불가능했지만, 지금은 문제가 없다는 얘기다. 과거엔 상장을 추진하는 대기업은 사전에 금감원의 회계 감리를 반드시 받았다. 감리는 기업이 회계 기준을 어긴 사실이 없는지 금감원이 장부 하나하나를 깐깐하게 뜯어보는 작업이다. 길게는 1년 정도 걸린다.
재무제표에 문제가 없다는 결론이 나오기 전까진 상장 절차를 진행할 수 없었다. 한국거래소가 상장 예비 심사 승인을 거절하고, 금감원도 공모 절차를 밟기 위한 증권 신고서를 받아주지 않았다.
이 제도는 지난 2019년 완화됐다. 금융 당국이 ‘재무제표 심사 제도’를 도입해서다. 이 제도는 금감원이 감리에 앞서 회계 장부의 주요 내용만 살펴보고 가벼운 위반이 있으면 주의나 경고 등으로 조치를 끝낼 수 있도록 한 게 특징이다. 연이은 기업들의 분식 회계 여파로 민간 회계 법인을 통해 감사 제도가 대폭 강화하는 대신 금감원을 통한 조사 부담을 덜어준 것이다.
또 대기업은 금융 당국의 회계 심사 중에도 상장을 추진할 수 있게 했다. 금감원 관계자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회계 심사가 길어지면 상장 일정도 차질을 빚을 수 있는 만큼 신속한 자금 조달이 필요한 기업의 사정을 고려해 심사와 상장 절차를 병행할 수 있게 한 것”이라며 “다만 상장 예정 기업이 투자자 보호 측면에서 회계 심사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외부에 공시하도록 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행 상장 규정에 당국의 재무제표 심사가 진행 중인 기업의 상장에 관한 내용이 별도로 담겨 있지 않은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문제가 터질 가능성은 없을까. 금융 당국은 ‘안전장치’가 있다고 설명한다. 거래소 관계자는 “만약 상장 절차를 진행하는 동안 기업의 회계 부정 혐의를 발견해 감리로 전환하는 등 특수한 상황이 생기면 본 상장 승인을 해주지 않아 예비 심사 승인의 효력도 함께 잃게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상장 절차를 무효화해 투자자 피해를 막을 수 있다는 얘기다.
물론 이런 보호 제도가 완벽한 건 아니다. 상장 완료 뒤 뒤늦게 회계 부정 사례가 드러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현재까진 기존 제도 변경 이후 별다른 사고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금융 당국은 말한다. 규제 완화의 부작용이 없거나 작았다는 뜻이다.
끝으로 심사가 완료한 뒤 상장을 하지 않은 이유는 뭘까. 이에 대해 현대중공업 쪽은 “금감원의 회계 심사를 받는 중이지만 회사가 원래 계획했던 일정에 맞춰 상장을 추진해도 문제가 없다고 판단해 심사와 상장 절차를 함께 진행하고 있다”고 했다. 심사 과정에서 문제 소지가 발견될 여지가 없다고 자신한다는 얘기다.
박종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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