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내 한 대형서점은 ‘4차 산업혁명’을 주제로 출간된 수많은 국내외 책들을 모아 별도의 코너를 운영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이란 용어가 한국 사회에 등장한 이후 경제와 산업, 교육과 미래 직업 전망 분야에서 시들지 않는 화두가 됐다. 지난 대통령선거에서도 후보와 정당들은 저마다 4차 산업혁명 시대 최적의 지도자임을 강조했다. 새 정부는 총리급 위원장의 4차산업혁명위원회를 8월 안으로 출범시킨다는 청사진을 발표한 상태다. ‘4차 산업혁명’ 용어는 2016년 초 스위스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서 알려진 개념이고, 우리나라에서는 지난해 3월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바둑 대결을 계기로 충격과 불안 속에서 맞이한 화두다.
정부와 경제계, 교육계, 언론계 등 각 분야에서 4차 산업시대가 가져올 변화와 대비책을 강조하는 가운데 4차 산업혁명의 개념과 실체에 대한 문제 제기도 나오고 있다. 학계나 전문가들이 수긍하지 않은 상태에서 등장한 ‘4차 산업혁명’ 개념이 마케팅 용어로 쓰이는 현실에 대한 비판이다. 2차 산업혁명, 3차 산업혁명이라는 개념도 정립되지 않았는데 불쑥 튀어나온 ‘4차 산업혁명’에 대한 지적이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의 에릭 브리뇰프슨과 앤드루 매캐피는 근래의 디지털과 자동화로 인한 변화를 ‘제2의 기계시대’라고 제시하고 있다. 미국의 저명 경제학자 로버트 제이 고든도 <미국의 성장은 끝났는가>에서 3차, 4차 산업혁명의 개념이 생산성 증대의 측면에서 성립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선진국서는 생소한 ‘4차 산업혁명’
‘4차 산업혁명’이 한국을 빼고 주요 선진국에서는 거의 통용되지 않는다는 단어라는 현상도 한국 사회의 유난한 관심과 열풍을 설명한다. ‘4차 산업혁명’은 왜 한국에서 특별한 지위와 힘을 갖게 되었을까? ‘4차 산업혁명’, ‘제2의 기계시대’ 같은 용어의 적절성 여부를 떠나서 이에 대한 높은 관심과 불안은 한국 사회의 변화 수용 현실을 알려준다.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4차 산업혁명이라는 용어가 대중화하지 않은 것은 그 사회가 신기술과 그에 대한 교육을 바라보는 태도와 깊은 관련이 있다. 사실 현재의 기술은 항상 신기술에 의해 대체되면서 개선되고 있으며, 인공지능과 로봇 기술도 기존 자동화와 컴퓨터 기술 발전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지 단절적 변화가 아니다. 한국 사회가 4차 산업혁명에 각별한 반응과 불안을 보이는 현실은 우리 사회가 신기술의 속성과 그로 인한 영향에 상대적으로 무지하고 무신경했음을 알려주는 지표다. 인공지능 기술에 이어 생명공학이나 에너지 분야에서 신기술이 등장하면 우리 사회는 또다시 5차, 6차 산업혁명을 제시하고 새로운 불안과 호들갑에 빠져야 할까. 인공지능과 로봇 등 최신 기술에 대한 좀더 현명한 사회적·개인적 대응은 기술의 속성과 영향에 대한 포괄적 이해를 바탕으로 각 분야에서 구체적 대응을 하는 것이다.
이는 먼저 새로운 기술의 작동 구조와 영향력을 학습하는 게 출발점이다. 근대 사회에서 읽고 쓸 줄 아는 능력인 문해력(리터러시)을 시민과 교양의 핵심으로 간주한 것처럼, 오늘날 정보화 사회에서는 디지털이 근대 사회에서 문자의 역할을 한다. 인공지능과 자동화와 같은 거대한 변화는 디지털 기술의 결과다. 디지털 리터러시는 디지털 기술에 대한 이해와 활용 능력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이는 개인과 사회적 생활방식과 관계를 구조적으로 변화시키는 요인인 디지털 기술에 대한 이해와 적응, 활용 능력을 의미한다. 디지털 세상에서 개인과 사회적 주체로서 권리와 책임, 생존 및 자기개발 방법을 포괄하는 광의의 개념이 디지털 리터러시다.
호들갑 대신 분야별 구체적 대응을
4차 산업혁명이 강조하는 인공지능과 로봇 기술에 대한 대비 또한 디지털 기술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해야 한다. 근대 시민사회가 문해력을 갖춘 시민들의 참여 위에 세워진 것처럼, 정보화 사회는 시민들의 디지털 리터러시를 필수적으로 요청한다. 디지털은 이전의 아날로그와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구조의 기술이기 때문에 사용자에게 새로운 이해와 접근을 요구한다. 디지털은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원본과 진본의 구분이 사라지는 무한 복제와 보존성, 실시간 동시 유통이 가능하다. 디지털 정보는 기본적으로 기계가 인식하고 처리할 수 있어 컴퓨터 처리 능력의 개선에 따라 인간의 인지적 능력을 뛰어넘게 된다. 인공지능과 자동화 로봇 분야에서의 괄목할 성취도 기본적으로 정보의 디지털화의 결과다.
정보화 사회의 필수 역량이지만 디지털 리터러시는 배우기 어려운 능력이다. 디지털 기술에 대한 이해와 활용 능력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오히려 쉽다고 간주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스스로 디지털 기술에 대한 이해와 활용 능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디지털 기기는 직관적 조작 환경 덕분에 사용설명서 없이 능숙한 활용을 가능하게 한다. 스마트폰을 신체의 일부처럼 다루면서 오랜 시간 능숙하게 활용하는 사람들이 디지털 리터러시를 배워야 한다는 필요성을 절감하기 어렵다.
하지만 디지털 기술은 사용자가 그 변화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운 특성을 지닌다. 복잡한 구조와 강력한 힘을 갖추면서도 편리한 사용법은 기술의 기본적 지향이다. 과학소설 작가 아서 클라크는 “고도로 발달한 기술은 마법과 구별할 수 없다”고 말했는데, 디지털 기술에서도 마찬가지다.
‘디지털 리터러시’ 학습 필요해
서비스를 만들고 운영하는 설계자와 전문가와 달리, 사용자는 기술 구조에 무지한 채 이용하는 상황이다. 스마트폰, 인공지능 기술은 우리가 경험한 가장 강력하고 매혹적인 기술로, 사용자가 의존적 관계를 맺게 된다. 깊이 의존하지만 그 기술의 구조와 영향에 대해 무지한, 정보 비대칭 상황은 디지털 시대의 그늘이다. 도구의 사용법을 익혀서 능숙하게 사용한다고 해서, 기술이 가져올 사회적·문화적 영향까지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강력한 도구를 손에 넣었지만, 그로 인해 생겨날 다양한 현상을 통제할 수 없다면 도구의 사용자는 기술의 주인이 아니라, 노예가 될 수 있다. 인공지능과 자동화를 앞세운 4차 산업혁명에 대한 대비는 개인적·사회적 차원에서 변화의 근본을 이해하는 디지털 리터러시 학습으로 이어져야 한다.
사람과디지털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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