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케이티(KT)가 최근 내놓은 인공지능 스피커 ‘기가 지니’는 사용자의 음성 명령을 인식해, 다양한 정보를 티브이(TV) 화면으로 보여준다. 날씨나 음식점, 교통정보, 영화 추천, 각종 기기 조작 등을 매끄럽게 수행하는 비서 기능이 특징이다. 에스케이텔레콤(SKT)이 앞서 출시한 ‘누구’도 음악 감상, 뉴스 브리핑, 음식 배달 등이 가능한 인공지능 기반 음성인식 스피커다.
#2. 금융권은 경쟁적으로 채팅로봇을 도입하고 있다. 농협은행, 라이나생명 등은 카카오톡으로 다양한 상품 안내와 금융상담을 제공하는데, 상담사는 로봇이다. 대구시청은 3월부터 채팅로봇 ‘뚜봇’을 투입해 여권 업무 상담을 맡긴다. 이미 286장 분량의 여권 업무 규정과 951개 항목별 질문답변 학습을 마쳤다. 맞춤형 학습과 사례 축적이 진척되면 현재의 답변 적중률 70%는 1년 내 90%로 높아질 예정이다.
#3. 미국에서는 지난해 말 아마존의 인공지능 스피커 ‘에코’가 티브이 소리를 주인의 구매 요청으로 잘못 알아듣고 각 가정에서 장난감을 자동 주문하는 소동이 일어났다. 지난달에는 구글의 음성인식 인공지능 스피커 2대를 맞붙여놓고 인공지능끼리 대화하는 방식을 실험한 사례가 알려졌다. “나는 사람이야” “아냐, 넌 인공지능이야” “난 똑똑해” “아니야, 넌 똑똑하지 않아”….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라는 두 스피커는 말다툼을 며칠 동안 쉼 없이 지속했다. 부조리극 <고도를 기다리며>의 주인공들처럼 때론 알 듯 모를 듯 한 선문답을, 때론 이해 못할 무의미한 대화를 이어갔다.
인공지능 기술이 발달하면서 음성인식을 넘어 사람의 대화 상대가 되는 기계가 등장하고 있다. 카카오톡·라인과 같은 모바일 기반의 문자메시지 앱은 대화를 음성에서 문자로 대체하는 것을 넘어 대화 상대를 사람에서 기계로 확장시키는 플랫폼 구실을 하고 있다. 앞 사례들에서 보듯, 비서와 도우미 기능을 통해 편의와 재미를 강화시켜줄 것으로 기대되는 음성인식과 채팅로봇은 머지않아 사람들의 직무를 대체하리라는 우려를 드리운다. 티브이 소리를 잘못 알아듣거나 기계끼리 말다툼을 하는 해프닝도 기계가 사람처럼 생각하고 말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다. 음성인식과 대화 기능을 갖춘 인공지능은 인간의 언어생활 안으로 기계가 깊숙이 들어오는 것을 의미한다. 채팅로봇은 인간 언어생활과 소통 방식에 상당한 변화를 예고한다.
지난달 초 구글의 인공지능 스피커 구글 홈 2대에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라는 이름을 붙인 뒤 서로 대화를 하게 하는 실험을 미국에서 진행했다. 수백만명이 인터넷으로 중계된 로봇 간 대화를 지켜보았는데, 불완전한 현재의 기술과 대화 기법이 개선되면 챗봇이 사람들의 대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는 전망을 낳고 있다.
인공지능 채팅로봇은 활용 범위가 무궁하다. 음성으로 기기 조작은 물론이고, 일상 환경에서 사람과 대화가 가능해 사람의 일 대부분을 기계가 처리할 수 있다. 현재는 입력된 정보 위주로 처리하지만 사람과의 대화와 채팅을 통해 정확도가 높아지고 스스로 학습하는 기능을 통해 사람에 가까운 수준의 언어 능력을 보유할 수 있다. 2014년 첫 튜링테스트를 통과한 인공지능 유진 구스트만의 등장은 채팅로봇을 사람과 식별하는 게 거의 불가능한 단계에 이르렀다는 걸 의미한다.
채팅로봇은 가정용 비서와 기업의 상담원 기능을 통해 편리하지만 일자리를 없애는 두 얼굴의 기술로 다가온다. 기기 조작 방식, 사람 간의 관계 방식을 바꾸고 효율성 높은 새로운 마케팅과 상거래 기술을 약속한다. 말하고 생각하는 기능의 채팅로봇의 영향은 산업과 기술, 일자리 영역에 한정되지 않는다. 사람이 많은 시간을 기계와 대화하고 사람처럼 응대하는 상황은 일찍이 없었다. 미국의 경제주간지 <포브스>의 지난해 10월 기사 ‘챗봇이 새로운 절친이 된다’에서 리라즈 마르갈리트 박사는 “채팅로봇과의 상호작용은 우리 두뇌에 새로운 정신 상태를 만들어낸다”고 지적했다. 우리가 컴퓨터를 상대하고 있다고 자각하더라도 두뇌는 이를 정서적 관계로 인지한다는 것이다. 채팅로봇이 사람과 유사하게 반응할수록 우리 뇌는 로봇을 친구로 여기게 된다. 2013년 할리우드 영화 <그녀>에서 남자주인공 테오도르가 인공지능 운영체제 사만다와 깊은 관계에 빠지는 것과 유사하다.
사람처럼 반응하는 채팅로봇과 대화하다가 자신이 기계랑 이야기하는 걸 망각하고 깊은 관계를 형성하는 사례는 이미 1966년 매사추세츠공대 요제프 바이첸바움의 채팅로봇 일라이자에서 확인된 바 있다. 채팅로봇은 나의 정서와 요청에 깊이 공감하고 반응하면서도 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게 특징이다. 사람이 채팅로봇의 감정을 배려할 필요가 없고, 나아가 내가 원하는 대로 상대를 통제할 수 있다는 착각을 하게 만든다. 사람이 통제 가능한 채팅로봇과의 대화와 관계맺기에 익숙해지면, 감정을 갖춘 진짜 사람과의 관계가 거추장스러워질 수 있다는 게 이 분야 연구자들의 우려 사항이다. 일라이자에 빠져드는 사람들을 연구한 매사추세츠공대의 사회심리학자 셰리 터클은 사람보다 기계에 더 많이 기대하면서 깊은 관계를 형성하려는 심리가 생기는데, 이는 상대를 내 마음대로 통제하고 싶은 욕구라고 보았다.
많은 부작용이 우려되지만 음성인식 기능의 똑똑한 채팅로봇은 점점 생활 속으로 침투할 전망이다. 인공지능 기술 발달과 더불어 1인가구, 고령화, 개인주의의 증대는 채팅로봇의 침투 속도를 더 빠르게 만든다. 영화 <캐스트 어웨이>에서 무인도에 고립된 주인공은 배구공에 사람 얼굴을 그려놓고 ‘윌슨’이라는 이름을 붙인 뒤 사람처럼 여기며 대화하고 생활한다. 인간의 소통 욕구가 본능적임을 알려주는 장면이다. 인공지능과 만나 더 똑똑해진 채팅로봇은 우리의 언어생활, 타인과의 소통 및 관계 형성에 새 국면이 열리고 있음을 알려준다. 채팅로봇의 등장은 사람처럼 소통하는 도구가 사회관계와 인간 내면에 끼치는 현상에 더 주목해야 하는 환경이라는 것을 일깨운다.
구본권 사람과디지털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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