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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남는 순간의 잘못…‘잊혀질 권리’ 사회적 논의 할 때

등록 2014-05-26 19:24수정 2014-05-27 14:26

경남지방경찰청 게시판(배경 사진)은 소속 경찰이 10년 전인 고교 때 친구였던 성폭행 가해자를 두둔한 글을 쓴 것이 알려져, 아직도 몸살을 앓고 있다. 김구라씨, 박재범씨 등도 오래전 말과 글이 인터넷에서 검색되어 방송에서 물러나는 등 홍역을 치렀다.
경남지방경찰청 게시판(배경 사진)은 소속 경찰이 10년 전인 고교 때 친구였던 성폭행 가해자를 두둔한 글을 쓴 것이 알려져, 아직도 몸살을 앓고 있다. 김구라씨, 박재범씨 등도 오래전 말과 글이 인터넷에서 검색되어 방송에서 물러나는 등 홍역을 치렀다.
[사람&디지털] ‘디지털 기록’ 어떻게 해야 하나
경남지방경찰청의 자유게시판은 요즘 한 순경의 파면을 요구하는 글들로 도배되다시피 하고 있다. 대상은 ㅎ아무개(여)씨다. 발단은 2004년 경남 밀양에서 일어난 한 중학생에 대한 고등학생들의 집단 성폭행 사건이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ㅎ씨는 가해 학생들의 친구로, 친구의 방명록에 피해 여학생을 비하하고 친구를 두둔하는 글을 남겼다. 이 글은 2012년 4월 ㅎ씨가 경찰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다시 주목을 받았다. 당시 경남지방경찰청 게시판은 마비될 지경이었고, 최근 그가 진급 시험에 합격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다시 가열되고 있다. 이 경찰청 관계자는 “앞으로도 그가 벗어날 방법이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경찰은 2012년 이와 관련해 징계 여부를 검토했지만 법적으로 문제삼을 근거를 찾지 못했다고 밝혔다.

ㅎ씨의 방명록 글은 피해자가 겪은 끔찍한 고통을 조금이라도 생각했다면, 결코 입 밖에 낼 수 없는 말들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10년 전 고교 시절 남겼던 글이 시간을 거슬러 ㅎ씨를 놓아주지 않는 현실은, 극단적인 경우임에도 디지털 시대 누구나 직면하고 있는 ‘기억’의 문제를 드러내는 상징적 사건이기도 한다. 이는 ‘잊혀질 권리’라는 새로운 개인의 권리에 대한 논의로 이어진다.

지난 13일 유럽에서는 잊혀질 권리와 관련해 세계가 주목한 판결이 있었다. 1998년 스페인 신문 <라 방과르디아>는 마리오 코스테하 곤살레스라는 변호사가 빚 때문에 자신의 집을 공매에 내놓게 됐다는 짧은 기사를 웹사이트로 내보냈다. 이후 16년 동안 구글에서 그를 검색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검색 결과의 상위에서 그의 파산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그는 구글 검색 결과에서 삭제하기 위한 법적 다툼에 돌입했다. 구글의 스페인 인터넷 검색시장 점유율은 95% 이상으로, 구글 검색이 되지 않는다면 그 정보는 사실상 잊혀지는 셈이었다. 유럽사법재판소(ECJ)는 그의 잊혀질 권리를 인정했다.

지워지지 않는 디지털 흔적
사생활 보호가 먼저인가
표현의 자유 더 중요한가
미국, 유럽서 뜨거운 논란

우린 가치 논쟁 대신 ‘민원’ 취급
되레 개인 정보 관리 불평등 초래
균형점 찾아 사회적 합의 끌어내야

비슷한 문제는 널려 있다. 방송인들의 사례는 흔하다. 김구라씨는 2002년 한 인터넷 방송에서 유흥업소 여성종업원들에 대한 비하 발언을 하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함께 언급했다. 2012년 해당 음성파일 등이 인터넷에 확산되고 거센 비난이 일면서 그는 모든 방송에서 자진 하차했다. 투피엠(2PM)의 리더였던 박재범씨는 2009년 마이스페이스에 올린 한국 비하 글이 알려지면서 가수 생활을 잠시 접어야 했다. 문제의 글은 그가 연습생이던 18살에 올린 것이었다.

연예인만이 아니다. 인터넷에서 ‘신상털기’도 썩지도 않고 검색도 쉽게 되는 디지털 기억에 의존해 생겨난 현상이다. 여성 커뮤니티 등에 가보면 “예전 남자친구와 남긴 사진들이 퍼졌는데 어떻게 지울 수 있나요”라고 묻는 글이 적지않다. 교제 이성과 찍은 사생활 동영상 유포에 대한 대응을 문의하는 내용들도 있다.

대립하는 두 가치가 충돌하는 어려운 문제다. 평판과 사생활(프라이버시) 등 자기 정보에 대해 개인이 통제를 할 수 있는 권리와 자유로운 정보의 공유를 강조하는 표현의 자유가 그것이다. 누군가의 잊혀질 권리를 보장한다는 것은 그만큼 정보에 대한 통제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둘 사이의 조화를 이루려면 공동체의 논의와 합의가 필요하다. 예컨대 공직자의 디지털 정보는 무엇을 언제까지 공개할 것인지, 강력한 검색사이트의 책임은 어디까지인지, 삭제한다면 주체는 누가 되어야 하는지 등 다양한 질문을 담고 있다.

세계적으로도 논의가 뜨겁다. 유럽은 대체로 사생활 보호를 강조해왔고, 미국은 표현의 자유를 수호해왔다. 유럽연합의 이번 판결로 유럽에선 공익적 가치가 낮은 개인적 정보에 대한 검색 삭제 요구가 분출할 가능성이 크다. 당장 미국의 <뉴욕 타임스>는 사설을 통해 이번 판결이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킬 수 있다”고 우려하고 나섰다.

국내는 어떨까? 우리는 잊혀질 권리를 둘러싼 가치에 대한 논의는 건너뛰고 ‘민원 처리’ 수준으로 다루고 있는 실정이다. 현행 정보통신망법은 개인이 명예훼손 등의 이유로 포털에 삭제를 요청하면, 특정 게시물을 블라인드(가리기) 처리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포털은 상세히 검토할 자원이 부족해 대체로 받아주는 형편이다. 임종인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장은 “이는 자기 정보 관리의 불평등 문제를 만들고 있다”고 지적한다. 인터넷 속성상 문제 게시물은 얼마든지 복사돼 유포될 수 있다. 그런데 이를 일일이 가리려면 자원과 시간이 많은 쪽이 유리한 것이다. 정치인·고위공직자 등 공인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정보를 통제할 소지도 다분하다.

빅토어 마이어쇤베르거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는 저서 <잊혀질 권리>에서 “유사 이래로 인류에게는 망각이 일반적이었고, 기억하는 것이 예외였다. 그렇지만 디지털 기술과 전지구적 네트워크 때문에 이 균형이 역전되었다”고 말했다. 기억이 기록되는 게 보편인 시대로 진입한 셈이다. 특히 중요한 문제는 이런 환경을 살아가는 아이들의 자기 정보 관리다. ㅎ씨처럼 학생 때 남긴 잘못된 기록이 평생을 따라다닐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있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미국 시카고 법대 에릭 포즈너 교수는 유럽의 판결 뒤 인터넷 매체 <슬레이트>에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아무 내용이나 인터넷에 올리지 않도록 주의시켜야 한다. 하지만 그건 실행하기 불가능한 기준이기도 하다. 아이들은 친구들의 술취한 사진이나 경솔한 불평을 올리기 마련이다.” 잊혀질 권리의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권오성 기자 sage5t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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