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도시, 쇠락의 도시. 장항이 꿈을 꾼다.
충남 서천군 장항읍은 군산과 함께 일제 강점기의 대표적인 쌀 수출항이었다. 1935년 장항제련소가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부흥기에 올라섰다. 1938년에 지금의 광주광역시와 함께 읍으로 승격, 1964년에는 장항항이 국제항으로 승격했다. 장항선의 종착역으로도 유명했다.
하지만 이제 장항에는 제련소도 없고, 국제항구도 없고, 장항역도 없다. 구리와 금을 생산하던 제련소는 주변 땅 오염의 주범으로 ‘지목’되면서 동파이프 생산공장으로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금강 하굿둑이 들어서면서 국제항은 아예 항만으로서 구실을 잃었다. 장항역은 빈 건물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금강을 넘어 전북 익산으로 연결되는 우회 노선이 생겼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장항읍의 인구는 1만4000명. 70년대 3만5000명에서 미끄럼틀을 탔다. 동남해안 중심으로 중화학공업이 일어설 때, 상대적으로 지역개발이 뒤처졌던 탓이다.
일제 때 설계된 장항읍은 잘 짜인 도시의 구조를 갖추고 있다. 그러나 두 집 건너 한 집, 아니 한 집 건너 한 집은 비어 있는 듯하다. 한때는 담배연기로 자욱했을 용다방의 문은 몇 년째 굳게 닫혀 있다. 시내 한복판의 공터 철조망에는 빨래가 널려 있어 한가로움을 더한다.
바다매립 보상금에 한때 투기 광풍
1989년, 장항에도 기회가 찾아왔다. 장항 앞바다 374만평을 매립해 대형 산업단지를 조성한다는 계획이 급물살을 탔다. 당시 어업보상금으로 주민들에게 지급된 액수만도 1700억원. 모두 현금으로 뿌려졌다. 목돈을 쥔 주민들은 장항 읍내에 건물을 올려세웠다. 부동산 투기 바람이 장항을 한바탕 휘저었다.
그러나 일장춘몽이었다. 환경파괴를 우려한 반발에 밀려 토목공화국의 꿈은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 당시 어업보상금에 은행 대출을 보태 작게는 2~3층, 크게는 10층 빌딩을 세웠던 주민들이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인심은 피폐할 대로 피폐해지고 온 도시가 폐허처럼 썰렁해진 지금의 장항. 그 모습은 투기 거품이 꺼진 뒤의 뼈아픈 상흔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장항은 이제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굴뚝에 집착하던 20세기형 패러다임을 통째로 바꿨다. 매립에서 환경으로, 산업도시에서 생태도시로 탈바꿈할 채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장항이 속해 있는 서천군에서는 2013년까지 3개의 대형 사업이 벌어진다. 갯벌 매립 산업단지 조성을 포기하고, 대신 벌이는 이른바 ‘대안’ 사업이다. 3400억원이 투입되는 세계적 규모의 국립생태원과 1279억원 규모의 국립해양생물자원관이 각각 2011년과 2012년에 완공되고, 2013년에는 4421억원 규모의 장항국가산업단지가 들어서게 된다. 장항산업단지에는 생태도시 개념에 맞는 친환경 기업들을 유치한다는 게 서천군의 복안이다.
서천발전전략사업단의 이대성 단장은 “갯벌 매립과 대형 산업단지를 접고 3개 대안사업 추진을 결정하기까지 엄청난 내부 갈등과 어려움을 겪었다”며 “많은 주민이 재산을 날리고 생살을 떼어내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고 말했다. 그는 “아직까지는 대안사업이 뭔지, 생태도시가 무슨 도움이 될 것인지 대부분 주민이 반신반의하는 분위기”라고 전한다.
서천군은 3개 대안사업 중에도 국립생태원에 가장 큰 기대를 걸고 있다. 영국의 5대 관광지로 유명한 에덴프로젝트를 벤치마킹한 국립생태원에는 세계의 온갖 희귀 식물종이 다 들어서게 된다. 사업 추진 주체인 환경부는 디즈니월드 뺨치는 재미로, 환경 교육과 연구 및 관광의 세계적 명소로 발돋움시킨다는 계획이다.
장항의 숙제는 한 해 100만명 이상으로 예상되는 국립생태원 방문객들이 장항을 포함한 서천군의 지역경제와 주민 소득 증대에 기여하도록 하는 것. 관광객이 생태원 관람을 마치고 곧바로 근처의 군산과 부여, 새만금으로 빠져나가는 일은 없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관광객들이 생태원 주변에서 가장 안전한 음식을 먹고 건강하고 쾌적하게 머무를 수 있는 체류 여건이 갖춰져 있어야 한다.
‘굴뚝’ 미련 버리고 생태관광도시 도약 청사진
주민 능동참여 여부가 성패의 관건
서천군은 이미 △장항선 폐선을 활용한 관광열차(트램) 운행 △일제 유산 등의 근대건축물의 장점을 살린 문화예술 거리 조성 △재래시장 육성, 명품 수산물 개발, 음식 특화 거리 조성 등의 종합적인 관광 인프라 개발 구상을 시작했다. 세계적인 습지와 철새 도래지 등 기존의 환경 인프라를 국립생태원 등과 연결해 서천을 세계적인 생태관광도시로 각인시킬 수 있는 장기 프로그램도 시행해 나갈 계획이다.
국립생태원과 국립해양생물자원관에서 일하게 될 외지의 석·박사급 고급 인력만도 500명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서천군은 이들 고급 인력이 장항 주변에 머물면서 지역 발전에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아이들을 안심하고 학교에 보내고 지역 주민과 같이 호흡할 수 있도록 투자를 아끼지 않을 방침이다. 이미 폐교 두 곳을 사두었으며, 교육 내용이 좋은 중·고등학교를 육성할 수 있는 방안도 고심하고 있다.
충남발전연구원의 한상욱 박사는 “장항 프로젝트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주민이 모든 과정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내발적 발전을 지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길고 긴 쇠락과 투기 역풍의 쓰라린 기억을 상처로 간직한 장항 주민들의 특수성을 고려할 때, 능동적인 주민 참여 동기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장항 프로젝트의 성패를 가름하는 가장 어렵고도 중요한 과제라는 것이다.
이원재 한겨레경제연구소장은 “갯벌 매립과 부동산 투기 같은 굴뚝형 발전을 포기한 서천군이 장항을 중심으로 주민의 소득과 행복 수준을 높이는 생태도시로 거듭날 수 있다면, 지속가능한 지역 발전의 세계적인 성공 모델로 인정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인터뷰 나소열 서천군수
“생태와 경제 접목한 성공사례 만들 것”
낙후된 게 패러다임 변화엔 좋아
32살의 나이, 1990년의 일이다. 노태우-김영삼-김종필의 3당 합당에 반대해 뛰쳐나온 ‘꼬마 민주당’의 노무현 의원 사무실을 찾아갔다. 4년 동안 공군사관학교와 대학에서 정치학을 강의한 경력이 고작인 간단한 이력서 하나를 내밀었다. 며칠 뒤 당시 노 의원의 비서를 맡고 있던 이광재 의원(민주당)한테서 전화가 왔고, 노 전 대통령과의 운명적인 첫 만남이 이뤄졌다.
노 전 대통령과의 면접은 길지 않았다. “함께 일합시다. 내일부터 나오세요.” 이렇게 임시직으로 시작한 정당 생활은 얼마 뒤 공채 1기 시험을 거쳐 전문위원의 길을 걷게 되었다. 민주청년회라는 당내 개혁그룹을 조직해 야당 속의 야당 노릇을 했지만, 기대했던 변화를 이루기에는 역부족이었다.
2년 정도 정치를 경험하니, 결국 지역을 바꾸지 않고는 수권 정당이 될 수 없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보따리를 싸들고 1992년 고향으로 내려와, 4년의 준비 끝에 1996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당시 후원회장은 노무현 전 대통령. “돈으로는 도움을 줄 수 없으니, 몸으로 때워드리죠.” 노 전 대통령은 수시로 서천에 내려와 나소열 후보 지지연설을 했다.
2002년 드디어 서천군수에 당선됐다. 노 전 대통령의 직계 중에 선거에 당선된 첫 번째 경우였다. 노 전 대통령은 대통령 재임 중에도 나소열 군수를 찾아 한 차례 서천을 방문했다. 퇴임 뒤에는 나 군수와 함께 서천의 생태마을을 둘러보았다. 2006년 선거에서 연임에 성공한 나 군수는 충청도에서는 유일한 열린우리당 소속이었다.
나 군수의 지난 20년은 남들이 잘 가지 않는 길, 좁은 길로 가는 도전이었다. 지천명의 나이에 들어선 나 군수가 다시 도전장을 꺼내들었다. 가시밭길 인생을 살아온 그이지만 이번만은 녹록지 않을 것 같다. 한판의 승부가 아니라, 사람과 지역을 송두리째 바꾸는 일이기 때문이다. 대다수 주민이 기대했던 갯벌 매립과 대단위 산업단지 조성 대신 생태도시로 가겠다는 그의 선택에 주민들이 함께 나서도록 만들기가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2003년부터 어메니티 생태도시 서천을 선포하고 2007년에 국립생태원을 포함한 3개 대안사업 추진을 결정했습니다. 생태도시로 가는 길이 바람직하다고 믿고 있고, 전문가들도 지지해 줍니다. 그러나 하나하나 실행에 옮기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을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주민들의 공감과 통합을 끌어내고, 그를 바탕으로 구체적인 성과를 이뤄내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장항을 중심으로 한 서천은 충청남도의 남단인 금강을 사이에 두고 군산을 마주하고 있으며, 철새군락지인 갯벌과 넓은 들판이 널려 있다. 바다-강-평야를 두루 끼고 있어 물산이 풍부하고, 자연환경이 좋다는 장점이 있다.
“한산 세모시와 소곡주가 있고 농업과 수산업이 골고루 발전해 있지만, 지금까지는 우리 고장을 상징하는 강렬한 랜드마크가 부족했습니다. 이제는 국립생태원과 국립해양생물자원관의 유치로 세계적인 생태도시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생태원과 생물자원관의 연구를 김 양식, 화훼 등 다양한 지역 산업과 연계시키는, 곧 생태와 경제를 접목시키는 방안을 내놓겠습니다.”
장항의 저발전과 낙후성이 대대적인 패러다임 변화의 좋은 여건이 될 수 있다는 역발상도 강조했다.
“장항의 전근대성이 관광산업 발전의 동력을 제공해 줄 것입니다. 잊혀진 굴뚝도시에서 세계적인 생태도시로 거듭나는 과정의 숱한 이야기들을 잘 다듬어, 국내외 관광객 유치의 자산으로 삼아야 하겠지요. 내륙산업단지도 생태산업단지로 특화해 인구와 소득 증대에 기여하도록 하겠습니다.”
나 군수는 “자족적 생태도시가 될 수 있도록 의료와 교육 쪽에 과감한 투자를 하겠다”는 말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김현대 지역경제디자인센터 소장
koala5@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