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오른쪽)이 지난 8월16일 워싱턴 디시(DC) 백악관 스테이트 다이닝룸에서 ‘인플레이션 감축법’에 서명한 뒤 조 맨친(웨스트버지니아주·민주당) 미국 상원의원(왼쪽)에게 서명 때 사용한 펜을 건네주고 있다. 가운데는 미국 상원 민주당 대표 척 슈머 의원. 워싱턴/EPA 연합뉴스
한-미 관계에서 핵심 현안으로 떠올라 있는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 법안이 지난달 미 상원에서 가결될 당시 찬성은 51표로, 반대보다 딱 1표 많았다. 뒤이어 미 하원 통과, 조 바이든 대통령의 서명을 거쳐 이 법안(bill)은 법률(act)로 확정됐다.
한국무역협회 워싱턴지부는 지난달 미 인플레 감축법 통과를 앞뒤로 한 상황을 분석한 ‘통상정보’를 통해 흥미로운 대목의 하나로 미국 민주당 소속 조 맨친 상원의원(웨스트버지니아주)의 갑작스러운 노선 변경을 들고 있다. 이는 해당 법의 정치적 성격을 잘 드러내는 대목이라는 분석과 연결돼 있다.
미국 상원의 의석 분포는 공화당 50석, 민주당 48석, 무소속 2석이다. 민주당 1석이 떨어져 나갔다면 해당 법안은 상원을 통과할 수 없었다. 조 맨친 의원이 인플레 감축 법안의 전신으로 일컬어지는 ‘더 나은 재건법안’(BBB)에 반대한다는 태도를 명확히 했다는 점에서 비현실적인 시나리오로 여길 수 없다. 인플레 감축법은 바이든 정부의 주요 경제정책 공약으로 1년가량 논의된 더 나은 재건법안(기후변화 및 사회복지 개선을 위한 예산 조정법안)을 축소·수정해 만든 내용이다.
무역협회 워싱턴지부는 “맨친 의원이 갑작스럽게 노선을 변경한 이유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고 여러 추측만이 난무하다”며 “중간선거(11월) 이전 입법 기회의 마지노선에서 민주당 내 압박감이 컸을 뿐 아니라 여러 상황적, 정치적 계산이 작용된 것”으로 풀이했다.
더 나은 재건법안이 지난해 11월 민주당 주도 아래 하원에서 가결돼 상원 통과를 앞두고 있던 터에 조 맨친 의원은 12월 들어 이 법안에 반대하는 뜻을 표명해 민주당 지도부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공화당의 반대에 부딪혀 있는 터여서 상원에서 1표 차이로 다수표를 얻을 수 없는 상황에 빠졌기 때문이다. 맨친 의원은 이에 앞서서도 법안에 반대 목소리를 내며 “인플레이션을 더욱 악화시킬 것”이라는 이유를 들었다. 여기에 더해 공화당 쪽에서 “더 나은 재건법안을 일방적으로 추진할 경우 초당적인 중국 견제 법안도 통과시키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더 나은 재건법안이 끝내 법률로 확정되지 못하고 바뀐 이름과 내용으로 통과된 것은 이런 사정과 얽혀 있었다.
곤경에 빠진 민주당이 던진 승부수는 공화당의 지지를 끌어낼 수 있는 내용의 법안 제시였다. 상원에서 지난해 6월 처리한 미국혁신경쟁법안(USICA), 하원에서 올해 2월 처리한 미국경쟁법안(ACA) 중 양당의 의견일치 부분만 압축해 모은 내용의 법안이었다. 반도체·과학법안은 이렇게 탄생해 7월27일 상원에서, 이튿날 하원에서 가결됐다. 미국 현지에 반도체 제조공장을 짓는 기업에 자금을 지원해주되 지원금을 받는 경우 중국 등 ‘우려 국가’에서는 첨단 반도체 생산 시설을 확장하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이다. 무역협회는 “중간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공화당도 미국의 기술경쟁력과 직결된 반도체·과학법안에 반대할 명분을 찾기 어려웠다”고 분석했다.
공교로운 점은 반도체·과학법안이 상원을 통과한 바로 당일 더 나은 재건법안이 인플레이션 감축 법안이라는 새로운 타이틀로 전격 공개된 점이었다. 무역협회는 “인플레 감축 법안이 미리 공개됐더라면 미치 매코널 상원의원(공화당 원내대표)의 발언대로 반도체·과학법안에 대한 공화당의 지지를 얻어내지 못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척 슈머 상원 민주당 원내대표는 반도체·과학법안 논의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더 나은 재건법안을 반대해온 조 맨친 의원과 지속해서 협의를 벌여 지지 뜻을 받아낸 것으로 파악돼 있다. 인플레 감축 법안이 지난 8월7일 상원, 12일 하원 통과에 이어 16일 대통령 서명을 받아 일사천리로 발효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대로다. 인플레 감축법이 정치적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으며 반도체·과학법과도 밀접하게 얽혀 있다는 분석으로 이어진다.
무역협회는 두 법에 대해 “미래 산업의 핵심이자 미국 안보와 직결된 반도체 산업을 지원하는 정책과, 민주당이 전통적으로 추진했던 사회보장 개선, 기후변화 대응, 노동자들을 위한 제조업 부활 정책을 마침내 법제화한 것”으로 평가하면서도 “두 법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끊이지 않고 해결해야 할 숙제가 많이 남아 있다”고 짚었다. 반도체 산업 지원과 관련해선 중국에 얽힌 가드레일(투자제한 안전장치) 조항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적용될지 상무부와 기업 간 논의가 진행될 예정인 게 한 예다. 중장기적으로는 반도체 산업 지원이 실제 미국의 반도체 제조 경쟁력 강화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고 무협 워싱턴지부는 전하고 있다.
인플레 감축법의 경우, 법안 발표 당시부터 인플레이션을 감축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조장한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기후변화 대응에서도 모순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특히 전기자동차 지원금과 관련 배터리에 사용되는 핵심 광물 조달에서 중국을 배제하는 요건과, 배터리 부품이 북미지역에서 제조되고 조립돼야 한다는 요건이 비현실적이라는 회의론도 나온다. 지원금 대상을 북미에서 제조된 전기차로 한정해 수입산을 차별하는 조항은 한국·유럽연합(EU)·일본 등 대미 수출국들의 반발을 불러 통상 마찰을 예고하고 있다는 점이 여기에 덧붙는다.
무협 워싱턴지부는 “두 법률이 중간선거를 앞둔 민주당의 치적이라고 평가되지만 워싱턴의 분위기는 11월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에 큰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라며 “중간선거 결과 상원의 의석수 변화가 크지 않더라도 하원에서 공화당이 다수당을 차지할 경우 워싱턴 정가는 다시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현재 미 하원은 민주당 220석, 공화당 211석으로 이뤄져 있다.
김영배 선임기자
kimyb@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