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 잔디밭에서 ‘반도체 칩과 과학법’에 서명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메모리 반도체 회사를 차려 중견기업으로 일궜던 한 기업인이 5년 전인 2017년 책을 펴내면서 제목을 <규석기 시대의 반도체>로 달았다. 원자번호 14번 규소를 주성분으로 삼는 반도체가 철기 시대를 잇는 지식 정보화 시대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는 뜻을 담았다.
책의 지은이가 창안자는 아니었던 듯 훨씬 앞서 나온 어느 과학자의 글에도 ‘규석기 시대’라는 표현이 들어 있었다. 반도체협회 쪽에 물어봤더니 “모든 전자기기의 기능을 반도체가 수행하게 되는 현상이 점점 심해지는 걸 표현한다는 뜻으로 (규석기 시대가) 쓰이기 시작한 게 10년도 더 된 것 같다”고 했다.
미국과 중국 사이 기술패권 경쟁의 핵심 실마리가 반도체임은 익히 알려진 대로다. 두 나라뿐 아니라 유럽연합(EU), 일본, 한국, 대만도 반도체 산업 키우기에 국가적 역량을 쏟고 있다. 미국 주도로 한국·대만·일본을 끌어들여 반도체 공급망 협의체를 결성하려는 ‘칩4’ 구상은 현실화 단계로 차츰 접어들고 있다. 이는 미국의 중국 견제 전략의 하나라는 분석과 얽혀 국제 정치·경제·안보 사안으로 부각돼 있다. 규석기 시대의 절정을 보는 듯하다.
국내에선 이달 4일 ‘국가첨단전략산업 경쟁력 강화 및 보호에 관한 특별조치법’이라는 기다란 이름의 법이 시행에 들어갔다. ‘국가첨단전략산업법’이라는 줄임말보다 ‘반도체특별법’이란 별칭으로 주로 일컬어진다. 지난해 입법 추진 당시엔 실제로 반도체특별법안이었다. 앞서 지난달엔 반도체 분야에 대해선 노동·환경 규제를 풀고 세제·인프라(전력·용수) 지원을 해주는 정부 방안이 나왔다. 반도체특별법과 아울러 전방위적이고 파격적인 내용이었던 것과 견줘 사회적 논란이나 반발이 크게 불거지지 않았다. 반도체를 중심으로 기술패권 싸움이 치열해지고 나라별로 앞다퉈 지원책을 들고나오는 분위기와 무관치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주요국별 경쟁적인 지원 방안을 넘어 훨씬 더 눈길을 끄는 반도체 이슈는 칩4이다. 미국 주도로 한국·일본·대만, 네 나라 간 반도체 공급망 협력을 강화한다는 이 구상은 올해 3월께 미국의 제안에서 비롯된 것으로 파악돼 있다. 이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중국 견제용이라는 해석을 낳았다. 칩4 구상을 실현하기 위한 논의의 출발점으로 여겨지는 예비회의가 이달 말이나 새달 초에 열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문지보다 얇고 손톱만한 사각형에 복잡한 회로를 새겨 넣은 칩(chip)은 반도체를 상징하는 대표어다.
칩4를 두고 국내에선 중국을 배제하는 ‘반도체 동맹’ 성격이라는 해석과 함께 한국의 참여는 ‘사드’ 배치 때처럼 중국의 보복을 불러올 것이란 우려와 분석이 일찌감치 제기됐다. 미국의 통첩에 따라 8월 말 시한으로 참여 여부를 정해 통보해야 한다는 일정이 거론되기까지 했다.
산업통상자원부 당국자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동맹이라는 표현은 언론에서 잘못 씌운 닉네임”이라며 “공급망 안정을 꾀하기 위한 협의체 내지 대화 채널이라 보는 게 적절하다”고 말했다. 반도체 분야에서 기존의 한·미 양국 산업담당 장관 간 대화 채널, 다자간 협의체인 ‘세계 반도체 생산국 민관 합동회의’(GAMS)에 덧붙여 길을 하나 더 내는 것이란 설명이었다. 자유무역협정(FTA)에서 양자뿐 아니라 다자간 채널이 두루 구축돼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말하자면 칩4는 울타리를 치거나 담장을 쌓는 게 아니라 반도체 주요 생산국 간 공급망 안정화를 위한 길을 더 내고 넓히는 시도라는 뜻이다. 이창양 산업부 장관이 지난 8일 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칩4와 관련해 “중국 등 특정 국가를 배제하거나 폐쇄적인 모임을 만들 생각은 없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는 단지 중국의 반발을 의식한 외교적 수사 내지 의례적인 발언이었을까?
세계화한 여느 산업 이상으로 반도체 부문은 ‘혼자선 할 수 없는’ 대표 영역으로 꼽힌다. 각국이 영역별로 독자적인 아성을 구축하고 있는 분업구조라는 데서 그 특성을 잘 드러낸다. 미국은 원천기술을, 일본은 소재·부품 분야를, 한국은 메모리 제조 기술을, 대만은 비메모리 분야인 시스템 반도체 위탁생산(파운드리) 부문을 틀어쥐고 있다. 국가 간 안정적인 공급망 구축이 매우 중요한 산업이다. 세계적인 공급망 교란이 벌어진 대표 영역이 차량용 반도체였음은 단적인 예다. 칩4 구상을 단지 중국에 대한 견제와 배제의 전략으로만 여길 수 없게 하는 대목이다. 중국이 반도체 생산 공급망에서 이렇다 할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는 못하나 최대 시장을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담쌓기라는 해석 틀의 설명력을 제한하는 점이다.
반도체 전문가로 꼽히는 김양팽 산업연구원(KIET) 전문연구원은 “미국이 반도체 지원법에서 중국에 대한 투자 확대를 금지해 견제 의도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지만, 칩4가 그런 성격인지 모르겠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는 “반도체 동맹이라는 표현의 출처가 어딘지, 미국 쪽에서 우리 정부에 요청한 사항이 정확히 무엇인지도 분명치 않다”며 “(칩4는) 반도체 생산에서 협력 관계를 굳건히 하자는 것”이라는 쪽에 무게를 뒀다. 겉명분과 속뜻 사이의 거리가 실제로 멀지 않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반도체협회 안기현 전무는 “중국 견제보다는 미국에 (반도체) 공장을 짓고 제조 기반을 구축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이라며 “(반도체 제조 공급망에서) 중국을 배제할 목적이라면 에이에스엠엘(ASML)을 끌어들였을 것”이라고 했다. 네덜란드의 에이에스엠엘은 반도체 장비 분야에서 대체 불가 업체로 꼽히며 흔히 ‘슈퍼을’로 일컬어진다. 안 전무는 “에이에스엠엘과 일본(소재·부품 영역 장악)만 잡으면 중국을 견제할 수 있으며, 이건 이미 시행하고 있고 중국을 규제할 법도 마련돼 있다”고 덧붙였다.
산업연구원은 지난달 펴낸 보고서 ‘반도체 지정학 변화와 한국의 진로’에서 칩4 구상의 키워드를 ‘대만’으로 꼽아 눈길을 끌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이 시스템 반도체의 제조를 지정학적으로 불안정한 대만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는 데서 탈피해 장기적이고 궁극적으로는 자국 내 제조 기반을 갖추는 것을 핵심 목표로 삼고 있다는 분석이었다. 각국의 반도체 지원 정책과 주요 인사들의 발언에 바탕을 둔 이 분석은 칩4를 반중 동맹으로 보는 단선적인 시각과는 차이를 띠었다. 그렇다면 숙제는 중국의 보복이 아니라 반도체 제조 거점의 점진적인 이전 가능성인 셈이다.
김영배 선임기자
kimyb@hani.co.kr
경제부장, 논설위원을 거친 뒤 산업 현장 취재를 맡고 있다. <민스키의 눈으로 본 금융위기의 기원> <휴버먼의 자본론> <무엇이 우리를 무능하게 만드는가> <관료제 유토피아> 등을 번역해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