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항 부두에 수출입 컨테이너가 쌓여 있는 모습. 연합뉴스
냉각기 제조업체 ㄱ사는 인도로 수출하기 위해 샘플 통관을 마치고 본격 수출을 시작하려던 때 인도 세관으로부터 갑자기 냉각기의 냉매를 제거하라는 통보를 받아 혼란을 겪었다. 냉매를 제거해야만 냉각기를 수출할 수 있게 한 인도의 기술 규정을 몰랐던 탓에 당한 일이었다. 케냐에 에어컨을 수출해온 가전업체 ㄴ사는 케냐 정부가 수입 에어컨의 에너지 효율 실험온도를 열대지역 조건으로 바꾼 데 따라 한동안 애를 먹은 적이 있다.
무역기술장벽(TBT)에 부딪힌 사례다. 티비티는 국가 간 서로 다른 기술 규정, 표준, 시험인증 절차를 적용해 상품의 자유로운 이동을 저해하는 무역 장애요소를 말한다. 관세 부과와 같이 명시적으로 나타나지 않지만 기업에는 수출을 지연시키는 비관세 장벽이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지난해 세계무역기구(WTO)에 통보된 무역기술장벽 건수를 분석한 결과, 3966건으로 나타났다고 12일 밝혔다. 기존 가장 높은 통보 건수를 기록한 2020년의 3352건보다 18.3% 늘어난 수치다.
대한상의는 “코로나19로 침체된 자국 경제를 회복시키고, 첨단산업 주도권 확보를 위한 기술·표준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세계 각국이 기술 규제를 전략적 도구로 활용했기 때문”으로 분석했다. 여기에 더해 개도국들이 에너지효율 등급 같은 선진국의 기술 제도를 차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는 것도 무역기술장벽 급증의 원인으로 꼽았다. 지난해 신규 무역기술장벽 통보 건수는 2584건으로 이전에 가장 많았던 2018년 2085건에 견줘 23.9%나 늘었다.
저개발국을 뺀 주요 국가별 전체 통보 건수에선 미국이 391건으로 가장 많았고 중국 126건, 한국 117건, 유럽연합(EU) 104건 순이었다. 핵심기술 표준 및 인증 절차를 둘러싸고 주요국 간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반영한다고 상의는 풀이했다. 통보 건에서 미국보다 많은 나라는 우간다(507건), 브라질(443건)이었다. 케냐(175건), 탄자니아(172건)도 많은 편에 들었다.
보호무역과 핵심기술 보호주의는 선진국에서 전략적 업종 기업의 외국인직접투자(FDI)를 억제하는 형태로도 나타나고 있다. 유엔 무역개발협의회(UNCTAD) 자료를 보면, 코로나가 시작된 2020년 한 해 글로벌 외국인직접투자 규모는 전년(1조5302억달러)보다 53.2% 줄어든 9989억달러를 기록했다. 주요 선진국을 중심으로 국가 안보, 주요 인프라(기반시설)에 대한 외국인 소유권 제한, 핵심기술 이전 제한을 통해 자국의 주요 산업을 보호하는 흐름의 반영이다. 대한상의는 “가파른 물가상승, 주요국 중앙은행의 금리 인상으로 세계 경기가 둔화할 전망”이라며 “올해부터 선진국을 시작으로 각국의 무역제한 조치는 더 강화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김영배 선임기자
kimyb@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