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업무처리 후 대기시간 최소화 위해 업무처리 중간에 종료예정 시간을 안내하고, 요청 시 콜택시 예약 대행 서비스 제공.’
지난달 금융위원회가 처음으로 내놓은 ‘금융소비자 보호 종합방안’에 담긴 한 대목이다. 은행원이 대출 상담을 하며 종료 시각을 예상하고 콜택시까지 불러줘야 하는 것인가. 시중은행의 한 관계자도 얘기를 전해 듣고선 함께 웃었다. “저희야 당국의 방침에 잘 따라야죠. 그런데 내부적으로 알아서 진행하면 몰라도 콜택시 예약까지 정부가 정해줄 내용인가요?”
지난 10일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병상 생활을 한 지 만 5년이 됐다는 뉴스를 보면서 한달 전 ‘콜택시 지침’이 새삼 떠올랐다. 이 회장은 현재 그룹 경영에 실제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금융당국이 여전히 주시하는 인물이다. 삼성생명 지분 20.76%를 보유한 최대주주로서 두번째 적격성(자격) 심사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2016년 8월 시행된 금융회사지배구조법에 따라 금융투자·보험·카드회사, 비은행지주회사 등 비은행 금융사는 2년마다 정기적으로 금융감독원의 대주주 적격성 심사를 받아야 한다. 2017년에 처음 심사했고, 올해가 두번째다. 금감원은 늦어도 상반기 안에 심사를 마무리할 예정이다.
지배구조법은 대주주 자격 심사의 대상을 ‘금융회사의 최대주주 중 최다출자자 1인’으로 규정하고 있다. 최다출자자 1인이 법인이면, 최다출자자 1인이 개인이 될 때까지 모회사를 타고 올라가 ‘개인 최다출자자’를 지정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심사 대상이 된 대주주가 금융 관련법과 공정거래법, 조세범처벌법을 위반한 전력이 있으면 의결권이 제한된다. 지배구조법의 이 규정이 적용돼 2017년 첫 심사 때부터 이 회장이 삼성생명 대주주로서 적격성 심사를 받아야 했다. 의사결정도 내리지 못하는 대주주에 대한 자격 심사가 말이 되느냐는 논란이 일었지만 법 규정 탓에 어쩔 수 없었다.
이처럼 기존 지배구조법의 문제점이 드러나자 금융위는 지난해 3월 개정안을 발표했다. ‘최다출자자 1인’으로 돼 있는 적격성 심사 대상을 ‘금융회사의 최다출자자 1인과 특수관계인, 사실상 영향력을 행사하는 주요주주’까지 확대한다는 내용이 핵심이었다. 국회에서는 심사 가능 대상의 범위를 이보다 더 넓힌 의원입법안도 제출됐다. 이대로라면 삼성생명 지분 0.06%를 보유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도 심사 대상이 된다. 게다가 법안에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으로 금고형 이상을 받은 경우에도 대주주 의결권이 제한되도록 한 내용이 추가되면서, 향후 삼성 금융사 지배구조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는 점 때문에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개정안 발표 때만 요란했을 뿐 정작 법안을 심의해야 할 국회의 무관심이 이어졌다. 자유한국당은 ‘재벌 옥죄기’라며 반발했고, 여당도 당내 중점추진 법안 과제 목록에 넣지 않을 만큼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최근 들어선 정부도 동력을 잃은 모양새다. 지배구조법은 올해 신년사에서 최종구 금융위원장이 통과시키겠다고 밝힌 3개 법 중 하나지만, 실제 추진 의지를 보여준 발언이나 행보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이게 ‘콜택시 지침’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은행이 살뜰히 콜택시까지 불러준다는 데 불만은 없다. 하지만 더 중요한 금융소비자 보호 정책은 따로 있다. 우리는 정부가 민간 금융사 대주주 적격성 심사를 왜 하느냐에 대한 질문을 다시 떠올릴 수밖에 없다. 대주주 적격성 심사는 고객 돈을 받아 안전하게 운용해서 돌려줘야 할 금융업의 특성상 대주주의 전문성과 도덕성, 사회적 신용도가 두루 중요하다는 합의의 산물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금융사 대주주 자격에 대한 엄정한 잣대는 더 중요해졌다. 금융당국의 관리감독을 믿고 이용하던 금융사가 대주주 리스크로 문제가 생긴다면 어떻게 될까. 이미 저축은행과 동양 사태에서 충분히 경험하지 않았던가.
박수지
경제팀 기자 suji@hani.co.kr
경제팀 기자 suji@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