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오후 전국금융산업노조 산하 케이비(KB)국민은행지부의 총파업 행사가 1박2일로 진행된 서울 잠실 학생체육관 외벽에 파업을 알리는 펼침막이 붙어 있다. 정세라 기자
“영업 압박이 너무나 커요. 핵심성과지표(KPI)로 펀드 하나 팔 때 수익 얼마, 대출 팔 때 얼마 하는 식으로 모든 게 촘촘하게 점수화돼 늘 성과 평가를 받아요. 올해는 장이 안 좋아서 펀드를 권하고 싶지도 않은데 팔았다가 마이너스 실적 난 고객들 민원에 마음고생은 얼마나 했는데요. 회사가 이런 힘듦을 전혀 이해하지 않고 단기 성과로만 몰아붙이고 나서, 정작 성과를 나눌 땐 자기 주머닛돈을 인심 쓰는 것처럼 고자세로 대하는 게 너무 화가 났어요.”
케이비(KB)국민은행 영업점의 개인종합창구에서 근무한다는 김아무개(37)씨는 8일 서울 잠실 학생체육관에서 열린 총파업 행사에 참가한 사유로 ‘지나친 성과주의 압박’을 첫손에 꼽았다. 국민은행에서 19년 만에 파업이 현실화한 것은 ‘성과주의’가 ‘단기 실적주의’로 변질했다는 내부 반발이 상당한데다 취업비리 사태 등으로 경영진에 대한 불신이 깊어지면서 적대적 노사관계가 심화했기 때문이란 지적이 나온다.
이날 국민은행은 파업 당일 새벽까지 이어진 노사 임금·단체협약 협상이 끝내 결렬되자, 조합원들이 밤샘 집회 뒤 오전 9시 파업 출정식을 시작해 오후 2시께 해산하는 하루짜리 경고성 파업을 진행했다. 임직원 1만6천여명 중 파업 인원을 회사 쪽은 5천~6천명, 노조 쪽은 9천~1만명으로 추산한다. 대규모 구조조정 위협이 없는 상황에 파업이 드문 은행권 성향을 고려하면 이번 파업 참가율은 상당히 높은 편이다. 총파업 찬반투표도 찬성 96.01%로 가결됐다.
이는 성과주의 압박에 대한 반발 정서에 더해 성과연봉제의 일종인 ‘페이밴드’ 적용 문제, 임금피크제 진입 시기 연장 문제, 성과급 배분 등 예민한 임단협 이슈가 맞물린 탓으로 보인다. 페이밴드는 일정 기간 승진을 못 하면 호봉이 올라가는 것을 제한하는 제도로, 회사는 전직원 확대 실시를 희망하지만 노조는 이를 거부하고 신입사원 강제 적용도 폐지해야 한다고 맞선다. 회사 쪽은 신입들도 입사 15년 뒤 극소수 업무 태만자만 영향을 받는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노조는 추후 성과 압박을 강화하는 수단이 될 것이라고 의심한다. 30대 조합원 ㄱ씨는 “취업이 우선인 신입 후배들이 페이밴드에서 선택의 여지 없이 근로계약에 서명을 한 게 문제”라고 짚었다.
임금피크제 진입 시기는 산별합의를 통해 만 55살에서 56살로 1년을 연장하기로 했는데, 팀장·팀원급 진입 시기를 정하는 세부 규정을 바꾸어 실질 연장기간이 1년이 아니라 평균 6개월로 줄어든다는 점이 갈등 요소가 됐다. 다만 성과급은 시중은행 최고 수준인 월급 300%를 맞추는 쪽으로 어느 정도 의견이 접근한 상태다. 앞서 회사 쪽은 “성과급 배분 방식 등 원칙을 세우자는데 돈을 더 받아내려고 과도한 요구를 한다”고 비난했고, 노조는 “신입사원 페이밴드 차별 철폐와 산별합의 왜곡 등을 문제 삼는데 ‘돈’만 보는 귀족 노조 프레임을 덧씌운다”고 반발했다.
8일 케이비(KB)국민은행 총파업이 벌어진 가운데, 서울 시내 한 영업점 문 앞에 고객 불편에 대해 사죄하고 향후 원만한 노사합의를 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임직원 일동 명의의 사과문이 붙어 있다. 정세라 기자
하지만 이런 은행권 파업을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않아서 노사 양쪽에 부담이 되는 측면이 크다. 금융거래 인프라를 담당하는 공공성 탓에 파업에 따른 고객 불만이 큰데다, 은행의 좋은 실적이 독과점 환경에 기댄 것으로 보는 시선이 강한 탓이다. 현재 노조는 협상 의지를 피력하면서도 자금수요가 많은 이달 말 2차 파업 계획을 잡아놨다.
이날 국민은행은 지점·출장소 1058곳 가운데 441곳을 거점점포로 지정해 정상 운영을 하고, 나머지 600여곳은 대출·외환 등 일부 대면업무는 중단한 채 단순 업무만 처리하는 비상대책을 가동했다. 금융당국도 본점에 검사 인력을 보내 고객 피해를 점검하는 등 대응에 나섰다. 언론을 통해 파업 예고가 이뤄져 영업장을 찾는 고객 수가 줄어든데다 송금 등 일상 거래의 90%가 디지털 뱅킹으로 이뤄지다 보니, 크게 혼잡이 빚어지진 않았다. 다만 파업 참가율이 높은 점포에선 대출 업무나 펀드 판매 등이 중단되면서 고객들이 헛걸음을 하는 불편이 생겼고, 은행도 영업에 차질을 빚었다. 이날 오후 국민은행은 사과문을 붙여 “총파업을 지켜보는 고객님의 따가운 질책과 비판을 겸허히 받아들이겠다”며 원만한 합의 노력을 약속했다.
정세라 선담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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