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비(KB)국민은행에서 새해 첫달 8일에 19년 만의 총파업 일정이 잡혔다. 국민은행은 2000년 주택은행 합병 갈등으로 7박8일간 전례 없는 총파업이 벌어진 이후 개별 사업장 차원에서 파업을 가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어서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린다. 디지털·모바일 뱅킹이 대세가 되기 전이었던 2000년 파업에 견줘 금융환경이 많이 달라진데다 파업기간도 하루로 짧지만, 대표적 가계대출 은행으로 지점 수가 많고 지역·노령 고객층이 두터워 파장이 예상된다.
28일 전국금융산업노조 산하 케이비국민은행지부는 올해 임금·단체협약 협상(임단협) 결렬과 관련해 전날 파업 찬반투표를 벌여 96.01%의 찬성으로 파업을 가결했다고 밝혔다. 이번 파업은 중앙노동위원회 중재 절차 등 합법적 요건을 모두 갖춘 상태다. 국민은행은 1만7천여 임직원 가운데 관리직급을 뺀 1만3700여명이 조합원으로, 이번 찬반투표엔 투표 불참자와 휴직자 등을 뺀 1만1990명이 투표해 1만1511명이 찬성표를 던졌다.
국민은행은 4대 시중은행 가운데 임직원 수도 가장 많고, 지점·출장소 수도 올해 9월 말 현재 1050곳으로 가장 많다. 또 대표적 가계대출 은행으로 다른 시중은행에 견줘 자영업자와 서민 등의 고객층이 두터운 편이어서, 파업 당일엔 고객 불편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은행산업은 공공성 때문에 일상 영업이 파행을 빚을 경우 사회적 불만이나 기업 이미지 타격이 큰 편에 속한다. 정부의 금융감독 아래 고객 돈을 맡아 관리하고 일상적 금융거래를 처리하는 공공적 특성 때문에 은행 합병 등 구조조정 갈등이 전면화할 때를 빼곤 개별 사업장의 총파업 카드는 잘 나오지 않았다. 물론 산별노조 차원의 총파업은 간간히 있었지만, 특성상 일선 지점에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았다.
26일 밤 서울 여의도 케이비(KB)국민은행 본사 인근 도로에서 조합원들이 총파업 결의대회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 금융노조 산하 케이비국민은행지부 제공
이런 상황에서 성과급 배분 방식, 페이밴드(승진 정체 시 호봉상승 제한), 임금피크제 시점 조정, 점심시간 1시간 보장 등 임단협 안건을 두고 노사가 대립을 지속하다가 전례없이 총파업까지 치닫게 된 데는 윤종규 금융지주 회장이 은행장을 겸임하던 시절부터 상당기간 누적된 적대적 노사관계가 자리 잡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윤 회장은 은행장 겸 지주회장을 하다가 2017년 말 연임에 성공하고 두 직위를 분리했다. 윤 회장이 은행장을 겸임하던 시절 노조는 “수익성 압박으로 직원들이 고객 피해를 초래하는 금융상품 불완전 판매까지 감수하는 영업압박을 받고 있다”고 반발하는 등 ‘성과주의’ 경영방식을 둘러싼 갈등이 깊었다. 이에 노조는 지난해 말 대대적인 연임 반대 운동을 펼쳤다. 이어 브이아이피(VIP) 특혜 채용 리스트가 불거져 나온 채용비리 사태 이후엔 윤 회장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퇴진 주장이 일상화했다. 윤 회장이 은행장을 하던 시절 인사라인은 채용비리 혐의로 줄줄이 재판이 진행 중이다. 다만 윤 회장은 증거 부족으로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노조는 최근 국민은행 본사에 퇴진 펼침막을 내걸려다가 물리적 충돌을 빚은 적도 있다.
이런 적대적 노사 관계가 총파업으로 터져 나온 직접적 계기가 된 것은 올해 은행 실적 성과 배분 등을 둘러싼 임단협이다. 은행 노사는 통상 9~10월께 한해 성과가 어느 정도 윤곽을 드러내면 임단협을 시작해 ‘밀고 당기기’를 계속하며 해를 넘겨 이듬해 2월쯤 타결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올해 은행권은 금리상승기에 예대금리 격차가 커지는데다 주요 기업 구조조정이 마무리된 뒤 손실충당금 비용이 크게 낮아지면서 사상 최대 실적 행진을 벌였다. 이런 상황에서 윤종규 회장을 이어 ‘성과주의’ 바통을 이어받은 허인 행장이 “최고의 실적에 걸맞은 최고의 보상”을 언급하며, 성과-보상 연계 발언을 이어왔다. 그러나 성과급 배분 방식 등을 두고 노사가 합의점을 찾지 못하자, 누적된 노사불신이 총파업 가결로 이어지게 된 셈이다.
하지만 최근 은행권 전반의 사상 최대 실적 행진이 경영진과 임직원들의 차별화된 노력에 따른 성과만으로 보기 어렵다는 시선도 만만찮다. 부동산 시장 급등에 올라탄 가계대출 위주의 영업, 예대금리 격차 확대 환경에 기댄 이자수익 집중, 대형 은행들의 독과점 시장환경 등에 따른 결과란 얘기다. 이런 상황에서 회사와 노조 모두 파업에 따른 고객 불만 등 사회적 파장에 대한 부담을 질 수밖에 없다.
최근 국민은행 인사·노무(HR) 담당 부행장은 직원들에게 전자우편을 보내 “페이밴드는 성과나 역량과 무관하게 연공에 따라 임금이 상승하는 걸 막기 위한 제도로 주요 시중은행이 이미 전직원 대상으로 시행을 하고 있으며, 점심시간 1시간 보장도 업무 중 휴게시간 1시간 보장으로 산별 합의한 것이기 때문에 제도화는 어렵다”, “성과급은 지급하지 않겠다는 게 아니라 지급방식을 합의한 뒤 주겠다”는 주장을 펼치는 등 노조 요구에 선을 그었다. 노조 쪽 역시 “회사가 외부에 노조를 오로지 성과급, 돈을 많이 받기 위해서 파업을 하는 것으로 호도하고 있다”며 “실질적인 산별합의 위반과 성과주의 확대로 인한 금융 공공성 훼손 등이 파업까지 이르는 갈등의 기저에 깔려 있다”고 반박했다.
정세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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