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은 약속이다. ‘지금 돈(보험료)을 내면 미래 어려워졌을 때 손(보험금)을 내밀어 주리라’는 믿음에 기초한 약속.
우리나라 소비자들은 그 약속에 대한 믿음과 기대가 차고 넘친다. 지난해 보험사들이 거둬들인 수입보험료는 200조원이 넘는다. 경제규모(실질 GDP 기준 14위) 순위를 훌쩍 뛰어넘는, 세계 7위 규모다. 살림살이 규모에 비해 보험료 지출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다. 국내 보험사들 총자산은 20년 새 10배가 불어나 지난해 말 1100조원을 돌파했다.
보험사들은 어떨까. 보험에서 약속은 약관으로 구체화되는데, 이를 대하는 태도는 ‘그때그때 달라요’다. 소비자가 약관에 근거해 보험금을 청구해도 ‘실수로 잘못 만든 약관’이라며 보험금을 못주겠다고 버틴다. 10년 넘게 끌다 지난해에야 정리된 자살보험금, 최근 금융당국으로부터 ‘일괄 구제하라’고 압박받고 있는 즉시연금이 대표적이다. 반대로 암보험의 경우엔 약관 문구를 들이대며 ‘줄 수 없다’고 호통을 친다. 애매하거나 잘못된 약관을 만든 자기 잘못은 외면한 채, 사안에 따라 달면 삼키고 쓰면 내뱉는 꼴이다.
여기 보험사들의 또다른 약속이 있다. 무려 22개 생명보험사가 모여 조 단위 규모의 업계 공동 사회공헌 활동을 하겠다는 선언이다. 이 약속은 얼마나 지켜지고 있을까. 그에 앞서 보험사들은 왜 이런 약속을 했을까.
약속의 경위
“앞으로 20년 동안 22개 생보사가 참여해 1조5천억원 규모의 공익기금을 마련하겠다.”
11년 전인 2007년 4월6일, 기자회견을 자청한 남궁훈 당시 생명보험협회장은 이렇게 선언했다. ‘생명보험 업계 공동의 사회공헌사업 추진 방안’으로 이름 붙여진 아름다운(?) 약속은, 거의 모든 언론에서 대서특필됐다. 액수도 컸거니와, 업계 차원의 공동 사회공헌 활동이라니 낯설면서도 신선했다.
그 자체로는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었지만, 실은 물밑 거래의 산물이었다.
상장은 보험업계의 오랜 숙원사업이었다. 1989~90년 교보생명과 삼성생명이 상장을 위한 자산재평가를 한 것을 시작으로 여러차례 논의가 됐지만, 진전이 없었다. 보통 주식회사와 달리 계약자들로부터 보험료를 받아 운용한 뒤 남은 이익을 계약자들에게 배당해주는(유배당상품) 상호회사적인 성격이 문제였다. 당시 기준으로 계약자 몫이었던 자산재평가 차익의 30%(삼성 878억원·교보 662억원)를 보험사들이 내부유보금으로 적립해 자본금화했는데, 상장할 경우 이 가운데 얼마를 가입자 몫으로 할 것인지를 두고 보험업계와 시민단체·소비자단체가 대립했다. 1999년 생보사상장자문위는 그 절반 가까이 이용자 몫으로 배분하는 안을 내놨으나, 보험사들은 ‘그러느니 상장을 안하겠다’고 버티며 시간이 흘러갔다.
2007년 증권선물거래소 산하 생보사상장자문위가 이번엔 ‘가입자 몫을 배분할 필요가 없다’고 결론냈다. 이에 윤증현 금융감독원장은 이 방안대로 생보사 상장을 밀어붙이며, 보험사들에도 국민이 납득할 만한 ‘성의’를 보이라고 주문했다. 그 결과 보험업계가 내놓은 게 바로 ‘20년 동안 1조5천억원 출연’이었다. 이용자 몫 지분이라는 더 ‘큰 것’을 삼키기 위해 내놓은 타협책이었던 셈이다.
보험사들은 비상장사는 세전 이익의 0.25%, 상장사는 0.5%, 상장 논란의 중심에 서있던 교보생명과 삼성생명은 각각 0.75~1%, 1.5%씩 해마다 출연하기로 했다. 지급여력비율(RBC)이 150% 미만인 회사는 출연이 면제됐다. 당시 보험업계 관계자들은 언론 인터뷰에서 “20년간 예상 출연 규모가 삼성생명 7천억원, 교보생명 3천억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보험소비자연맹·경제개혁연대·참여연대는 공동성명을 내어 “공언한 대로 1조5천억원 공익기금 출연이 이뤄져도 현재가치로 환산한 생보사들 부담액은 그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금감위와 생보협회가 출연금액을 뻥튀기하는 알량한 사기극을 벌이고 있다”고 비판했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현 공정거래위원장)도 당시 인터뷰에서 “생보사 상장 논란의 핵심은 과거 (계약자 몫 배당을 미뤄) 계약자의 권익을 침해한 주주들이 이에 대해서 직접 보상하는 것”이라며 “공익기금을 조성한다는 것으로는 상장 문제에 면죄부가 될 수 없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하지만 이런 비판들은 묵살됐고, 동양생명(2009년), 삼성생명과 한화생명(2010년), 미래에셋생명(2015년), ING생명(2017년) 등이 차례로 증시에 상장됐다.
약속의 결과
약속대로 20년간 1조5천억원을 채우려면 한해 평균 750억원씩 출연돼야 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생명보험사회공헌위원회 자료를 보면, 보험사들의 한해 출연액은 482억원(2015년)이 최고였고, 152억원(2010년) 수준에 머물기도 했다. 지난해까지 11년 동안 누적 출연액은 3692억원이었다. 공언한 대로라면 8250억원(750억원×11)이 출연됐어야 했는데, 그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 셈이다. 단 한차례도 목표액이 달성된 적이 없다는 것은, 당시 발표 규모가 뻥튀기됐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상장 논란의 당사자였던 삼성생명과 교보생명의 누적 출연액은 각각 2359억원, 830억원으로 전체 출연액의 85%를 차지했지만, 애초 예상 출연금액인 3850억원(7천억원×11/20), 1650억원(3000억원×11/20)에는 크게 미치지 못했다.
또다른 문제는 출연금 산출 방식이 불투명하게 바뀌었다는 점이다. 애초 비상장사/상장사/교보/삼성이 세전 이익의 0.25%/0.5%/0.75~1%/1.5%씩 출연하는 방안이 논의됐으나, 이를 공식화하는 단계에서 지정기부금 한도액의 5%/10%/15~20%/30%로 바뀌었다. 애초 기준인 세전 이익은 공시된 사업보고서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지정기부금 한도액은 회사와 국세청만 알 수 있는 ‘세무상 이익’을 기준으로 산출된다. 출연금이 제대로 산출됐는지 외부 검증이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이와 관련해 생명보험사회공헌위원회 쪽은 “보험사들이 (협약서에 나온 공식대로) 계산한 금액을 보내오면 이를 재원으로 사업을 집행할 뿐, 제대로 출연금이 산정됐는지 검증하는 것은 아니다”며 “출연액 산정 기준 변경은 당시 당국과 논의를 거쳐 결정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또 “협약서에는 20년 동안 출연액이 1조5천억원에 미달하면 출연 기간이나 방법 등을 조정할 수 있도록 돼 있다”고도 했다.
누적 출연액이 1조5천억원이 될 때까지 출연 기간을 더 늘릴 수 있다는 얘기인데, 이 경우에도 보험사들에겐 유리하다. 시간이 흐를수록 화폐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2007년 발표 때도 “삼성생명이 20년간 7천억원을 출연한다면 이는 현재가치로는 2656억원인데, 1990년 자산재평가 때 계약자 몫 내부유보액인 878억원의 현재가치인 4928억원에 턱없이 못미치는 금액”이라는 비판이 있었는데, 실제 기여액은 그보다도 훨씬 더 줄어든다는 얘기다.
당시 공익기금 출연 방안 반대 운동을 펼쳤던 조연행 금융소비자연맹 대표는 “애초 자본금화한 내부유보금은 유배당 계약자 몫이었던 만큼, 계약자들에게 돌려주는 게 합당했다. 그나마도 약속했던 출연금이 애초 계획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니, 할 말이 없다”고 말했다.
이순혁 기자
h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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