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태평로 옛 삼성생명 본사. 한겨레 자료사진
“자살보험금 사건의 데자뷰다. 이렇게까지 파장이 커질 줄은 몰랐다.”
한 생명보험사 관계자의 말이다. 생보업계가 ‘즉시연금 과소지급 일괄구제’라는 당국 방침에 속앓이하고 있다. 고객들과의 계약서랄 수 있는 약관을 잘못 만든 귀책사유는 인정하면서도, 1조원 가까운 돈을 토해내란 것은 너무 심하지 않냐는 항변이다. 하지만 윤석헌 금융감독원장이 ‘소비자 보호 금융’의 첫 사례로 꼽은 사안이어서 금융당국은 관철 의지가 강하다.
즉시연금은 가입자가 한꺼번에 목돈(보험료)을 내면 보험사가 이를 운용해 매달 이익금(이자)을 생활연금으로 지급하고 만기 때 원금을 돌려주는 보험상품이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여파가 가시지 않았던 2000년대 초반 실직자 생활보장 명목으로 당국의 독려 속에 생보사들이 앞다퉈 상품을 출시했다.
이런 가운데 지난해 삼성생명 만기환급형 즉시연금 가입자가 ‘연금액이 가입 때 들었던 것보다 적다’며 금감원에 민원을 제기했다. 회사 쪽은 보험료 가운데 사업비를 공제한 금액을 기준으로 연금 지급액을 산정했다며 문제가 없다고 항변했다. 보험료 1억원을 냈다면 500만~600만원가량을 사업비로 공제하고 나머지 9400만~9500만원에 공시이율을 곱한 금액을 연금으로 지급했다는 얘기였다.
사건을 접수한 금감원 분쟁조정위원회는 지난 2월 가입자 손을 들어줬다. 약관에 사업비(만기환급금 지급 제원) 공제 내용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여기에 윤석헌 원장은 지난 9일 취임 뒤 두 달 만에 가진 첫 기자간담회에서 “즉시연금 미지급금에 대해 일괄구제 제도를 적용하겠다”고 밝히며 문제가 커졌다. 일종의 집단소송제가 적용된 셈인데, 업계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만기환급형 즉시연금 가입자는 16만여명으로, 금감원 방침대로라면 삼성생명 4000억 원대 등 업계 전체적으로는 추가 지급액이 8000억~1조원에 육박했기 때문이다.
보험업계에서는 “당시 금감원이 문제없다고 승인했던 약관”이라며 금감원 책임론을 제기하지만, 윤 원장은 18일 “(금감원) 책임 여부를 떠나 필요한 일은 해야 한다”는 원칙론을 다시 강조했다.
당국의 강공에 삼성생명은 곤혹스러워하면서 ‘이달 26일 열릴 이사회에서 최종 결정을 내리겠다’며 말을 아끼고 있다. 예상 지급액이 800억 원대로 두 번째로 많은 한화생명은 삼성보다 약관에 좀 더 설명이 돼 있다고 주장하지만 최근 분쟁조정위에서 지급 결정이 내려졌고, 이의제기 기간인 다음 달 10일께 공식 견해를 밝힐 예정이다. 추가 지급할 경우 규모가 1600억원에 달하는 엔에이치(NH)농협생명은 약관에 사업비 공제 내용을 충실히 적어 논란에서 빗겨나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다.
금감원 이현열 분쟁조정1국장은 “동양생명 전환사채(CB) 등 분쟁조정에 들어왔다가 일괄구제된 사례는 많다. 특히 삼성생명은 ‘회사에 끼치는 영향이 크다’며 이의제기 기간을 두 차례나 연기해달라고 했고, 결국 분쟁위 결정을 수용했다. 일괄구제를 염두에 두고 고민했던 것인데, 인제 와서 다른 소리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업계에서는 ‘자살보험금 사건’의 재판이라는 말도 나온다. 보험사들이 약관에는 ‘자살사고 때 (일반사망보험금보다 몇배 더 많은) 재해사망보험금을 지급하겠다’고 해놓고 일반보험금만 지급해오다가, 당국이 ‘약관대로 하라’고 하자 반기를 들었다. 당시에도 보험사들은 ‘자살은 재해에 의한 사고가 아니다’라는 논리로 소송전을 폈지만, 결국엔 여론 비판과 당국의 압력 속에 지난해 초 ‘약관대로’ 보험금을 지급하며 문제가 정리됐다.
이순혁 기자
hyu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