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달 21일 주요20개국 재무장관·중앙은행총재회의 차 워싱턴을 방문한 자리에서, 한은의 목표에 고용안정을 명기하는 것을 검토중이라고 밝혔다. 사진은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9일 이 총재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뒤 환담장으로 이동하고 있는 모습. 청와대사진기자단
최근 고용 사정이 부진하면서, 통화정책 목표로 ‘고용안정’을 명시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의 지난 달 발언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지난 2~4월 취업자 수는 석달 연속 10만명대에 그쳤고 올해 연간으로도 고용사정이 암울할 것이란 관측이 나오고 있어, ‘일자리 정부’에 비상등이 켜진 상태다.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는 최대고용, 물가안정, 적절한 장기금리 유지라는 병렬식 목표를 지향하고 있다. 한은 목표에 고용이나 성장을 추가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은 2000년대 후반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물가안정이라는 오래된 단 한가지 정책목표에서 탈피해 경제환경 변화에 맞게 목표를 재설정해야 한다는 주문이 학계 등을 중심으로 제기돼 온 것이다. 반면 물가와 고용이라는 경험적으로 상충되는 목표를 동시에 추구할 경우 되레 독립성이 저해될 수 있다는 반론도 여전하다.
■ 고용안정 추가, 어떻게? 한은(금융통화위원회)의 가장 중요한 책무는 물가안정이다. 정부의 무분별한 발권력 동원이나 원자재 가격 급등이 초래했던 인플레이션의 부작용을 방지하기 위해 독립된 중앙은행에 통화정책을 맡기게 된 역사적 맥락을 감안하면 당연한 얘기다. 한국도 1950년 한국은행법을 제정할 때부터 ‘통화가치의 안정’이 목적으로 제시됐고, 이후 법 개정 과정에서 ‘물가안정을 도모’로 용어만 바뀌었다.
2011년 한은법에 ‘금융안정에 유의하여야 한다’는 조항이 추가됐다. 한은에 따르면, “2007~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금융시스템 안정이 물가안정 달성에 매우 중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된 결과였다. 하지만 당시 정부와 한은의 물밑 신경전이 치열했다고 한다. 물가안정을 위해 긴축적 통화정책을 운용하면 자금대출도 줄어들기 마련이다. 그런데 민간 금융기관들에 대한 자금 대출 기능을 수행하는 금융안정 의무를 지게 하자, 한은은 권리도 함께 주어져야 하는 것 아니냐며 1997년 정부에서 독립하면서 내줬던 금융회사 검사권 부여를 요구했다는 것이다.
한은의 목표로 고용을 추가하는 방안이 추진된다면, 이런 논란은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 더욱이 고용은 선진경제에서도 기준금리와 직접적 관련성이 갈수록 떨어져 새로운 정책수단의 필요성은 더욱 크다.
한은 정책목표에 고용을 추가하기로 하면 그 위상을 어느 정도로 할지가 남는다. 한은 안팎에서는 고용을 물가안정과 같은 반열에 놓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고, 적절하지도 않다고 입을 모은다. ‘물가안정을 도모하되 금융안정에 유의하여야 한다’는 현행 한은법도 물가안정을 기본으로 하고, 금융안정은 보조적 목표로 규정하고 있다. 박광온 의원(더불어민주당) 등이 제출해 국회에 계류 중인 한은법 개정안도 ‘금융안정에 유의하여야 한다’를 ‘금융 및 고용의 안정과 적정 인구수 유지에 유의하여야 한다’로 대체하는 정도다.
신관호 고려대 교수(경제학)는 “고용이 궁극적으로는 더 중요한 문제일 수 있는 만큼, 한은이 갈수록 고용을 중시하는 게 맞다. 하지만 고용을 너무 내세우면 물가를 희생시킬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 물가를 기본으로 보되 이를 훼손시키지 않는 범위 안에서 고용을 보는 게 맞다”고 말했다. 최근 물가와 고용(실업률)의 상충관계를 나타내는 이른바 ‘필립스 곡선’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 실업률이 완전고용 수준으로 떨어졌는데도 필립스 곡선 이론과는 달리 물가가 오르지 않아 미 연준의 금리 인상 속도가 늦춰지기도 했다. 이렇듯 필립스 곡선이 고장났다는 사실은 중앙은행이 예전보다 ‘고용목표’를 더 비중있게 고려해 통화정책을 구사할 수 있는 우호적 환경을 제공한다.
■ “법개정보다 한은이 바뀌어야” 하지만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어느 정도 고용상황(실업률)을 목표로 할지부터 논란의 여지가 크다. 김소영 서울대 교수(경제학)는 “현재 한은은 (통화정책을 결정할 때 물가와 더불어) 실질 국내총생산(GDP)이나 지디피갭 등 지표를 주로 보는데, 이를 고용으로 대신하거나 고용을 그 정도로 병행해 보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며 “하지만 현재 고용 관련 데이터가 거시경제의 목표로 활용할 수 있는 만큼 정확하냐는 문제가 있다. 또 고용이 지디피보다 정치적으로 읽히는 문제도 있다”고 지적했다. 인플레이션이 일어나면 돈을 많이 가진 부유층의 손실이 커지는 반면 사회경제적 약자는 일자리를 구할 가능성이 높아짐에 따라 통화정책이 정치적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내로라하는 통화정책 전공자들인 김소영·김인준 서울대 교수와 신관호·김진일 고려대 교수, 김성현 성균관대 교수는 지난해 초 공동으로 발표한 <한국은행의 역할과 정책수단: 금융안정정책을 중심으로> 보고서에서도 이런 점 등을 고려해 “현 단계에서 명시적으로 고용을 통화정책 목표로 고려하는 것보다는 신축적 물가상승률 목표제를 시행하면서 암묵적으로 이를 고려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결론 내렸다.
한은의 지상목표는 물가안정인데, 이는 물가안정이 성장과 고용으로 이어진다는 믿음에 바탕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경제는 ‘저성장’ 또는 ‘고용없는 성장’기에 접어든지 오래다. 소규모 개방경제의 특성상 물가가 환율 등 대외변수에 큰 영향을 받아 물가안정목표제의 실효성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은이 고용에 더 주목하거나 가치를 부여하는 것에 동의하는 의견이 많지만, 이 총재의 “검토 중” 발언에 대한 평가는 다르다. 금융권 한 관계자는 “미국 연방준비제도나 유럽중앙은행 수장의 발언이나 보고서를 보면, 고용시장 상황에 대한 자세한 언급이 등장하고 금리정책 변화의 근거도 고용시장에서 찾는 경우가 늘고 있다. 사실 한은도 (목표에 고용을 추가하는) 한은법 개정 없이 그렇게 하면 되는데, 그냥 안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현재 4~5급 직원 3~4명이 전담하고 있는 고용 담당 파트를 확대하고, 고용관련 데이터 고도화와 고용정책 연구 확대 등 법 개정이 없이도 할 수 있는 ‘실천’은 방기한 채 즉흥적 발언으로 논란만 일으키고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경제학)는 “지금도 물가안정 해치지 않으면서 (금리 내리고 경기를 부양해) 고용을 늘릴 수 있었는데, 여기저기 눈치를 보느라 안한 것”이라며 “고용을 정책목표로 삼느냐는 것은, 한은법이 아니라 한은의 문제”라고 말했다.
이순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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