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년 만에 종이 통장이 사라진다.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금감원, 금융거래 관행 혁신 나서
9월부터 금리우대 등 인센티브 부여
2020년까지 3단계 시행 방안 마련
미국은 1990년대부터 발행 안해
9월부터 금리우대 등 인센티브 부여
2020년까지 3단계 시행 방안 마련
미국은 1990년대부터 발행 안해
은행에서 월급통장을 만들거나 예·적금을 들때 종이통장을 발급받아온 풍경이 점차 사라질 전망이다. 국내 최초의 상업은행인 한성은행(조흥은행의 전신)이 1897년 설립된 이후로 120년 넘게 이어졌던 종이통장 발행 관행이 역사 속 유물로 남게 되는 것이다.
금융감독원은 종이통장 발행을 단계적으로 줄이는 내용을 담은 ‘통장기반 금융거래 관행 혁신방안’을 29일 발표했다. 인터넷·모바일뱅킹이 보편화되고 전자통장이 나온 지 10년이 넘었지만, 은행고객 대부분은 계좌를 만들때 여전히 종이통장을 발급 받아왔다. 올해 5월 말 현재 은행계좌 중 종이통장 발행 계좌는 2억7천만개(휴면예금계좌 제외)로 전체의 91.5%에 이른다. 해마다 신규예금 계좌 중 종이통장 발행 계좌 비중이 조금씩 줄고 있기는 해도 아직은 종이통장을 발행받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다. 지난해 은행 신규 예금계좌 중 종이통장이 발행된 계좌는 3820만개로 82.6%에 달했다.
종이통장 발행이 여전히 굳건한 관행으로 자리잡고 있지만, 금융 전산화로 종이통장은 별 필요가 없어진 지 오래다. 미국은 1990년대, 영국은 2000년대 들어 종이통장을 발행하지 않고 있고, 중국은 고객이 요청할 때만 발행해 준다.
통장 개수가 ‘부’를 상징하는 건 옛말이다. 되레 고객과 은행 모두에 불필요한 부담과 비용만 초래하는 존재가 돼 버렸다. 고객 입장에선 통장의 입출금 거래내역이 가득 차 이월하려면 직접 창구를 방문해야 한다. 분실·훼손하거나 인감을 변경할 경우엔 통장 하나당 2000원의 수수료를 내고 재발급받아야 한다. 지난해 고객이 통장 재발행 비용으로 은행에 낸 수수료만 60억원이다. 또 영업점에선 본인이라도 통장이 없으면 출금이 어렵고, 통장을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금융범죄에 노출될 우려도 있다.
해마다 1000만개 가량 종이통장을 찍어내는 은행들도 제작 비용과 인건비·관리비 부담이 만만치 않다. 금감원은 제작원가에 인건비·관리비까지 합치면 종이통장 1개당 5천~1만8천원의 비용이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신한은행의 경우 2013년 1100만개, 2014년 1090만개의 종이통장을 만들었다. 신한은행은 1개당 제작 원가가 174원이어서, 각각 19억1400만원과 18억9660만원의 비용이 들었다고 했다. 여기에 은행 창구 직원들이 통장을 발급하는데 들이는 시간 등 간접비용까지 반영하면 종이통장 발행에 연간 150억원가량 비용이 드는 것으로 시중은행들은 추산하고 있다.
그럼에도 국내 은행 창구에서 종이통장 발급 관행이 사라지지 않았던 이유는 뭘까. 몇몇 은행의 담당자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상당수 고객들이 계좌를 만들 때 실제 손에 쥘 수 있어야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성향이 있다고 한다. 또 중·장년층일수록 종이통장 거래를 선호하는 편이다. 오랜 거래 습관이 남아 있기도 하고, 인터넷·모바일뱅킹에 서투르거나 안전성을 믿지 못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신한은행에서 종이통장 관리를 담당하는 한 직원은 “장기적으로 통장없는 거래 형태가 확산될 것은 분명하지만 기존에 거래하던 습관이 쉽게 변하지 않기 때문에 짧은 시간에 바뀌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금감원은 이런 현실을 고려해 3단계로 나눠 종이통장 발행을 줄이는 방안을 내놓았다. 1단계로 오는 9월부터 2017년 8월까지 종이통장을 발급받지 않는 고객에게 은행이 자율적으로 금리우대나 수수료 경감 같은 인센티브를 주도록 했다. 2단계로 2017년 9월부터 2010년 8월까지는 신규 고객에게 원칙적으로 종이통장을 발행하지 않도록 했다. 다만 고객이 60살 이상이거나 금융거래기록 관리 등을 이유로 종이통장을 희망할 때는 예외를 두기로 했다. 3단계인 2020년 9월부터는 2단계 원칙을 유지하되, 종이통장을 원하는 고객에게 통장발행 원가의 일부를 부과하도록 했다. 무통장 거래를 위한 보완대책으로 금융거래 증빙자료를 원하는 고객에게는 전자통장, 예금증서, 거래명세서 등을 발행해 주도록 했다. 박세춘 금감원 부원장은 “혁신방안이 계획대로 추진되면 100여 년 지속된 종이통장 발행 관행이 사라지고 수년 안에 무통장 거래 관행이 정착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수헌 김정필 기자 minerv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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