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감독원이 불법 대부계약의 사상 첫 무효화 판례를 이끌어내기 위한 작업에 착수한다. 금감원 신고센터에 접수된 사례 중 무효화 가능성이 높은 계약을 선정해 소송 비용 전액을 지원한다는 계획이다. 다만 이는 금감원의 업무 범위를 벗어난 민법 영역인 탓에 금감원이 대통령 지시 사항을 추진하려다 무리수를 둔다는 평가도 나온다.
금감원은 이런 내용의 불법 대부계약 무효화 추진 방안을 7일 발표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9일 민생현장 간담회를 열어 법무부와 금감원 등에 “불법 사금융 처단”을 주문한 데 따른 후속 조처다. 당시 윤 대통령은 “법이 정한 추심 방법을 넘어선 대부계약은 효력이 없다”며 “이자뿐 아니라 원금까지 그 자체가 무효”라고 발언한 바 있다.
금감원은 민법 조항을 활용해 대부계약을 무효화한 첫 판례를 이끌어내겠다는 계획이다. 민법은 사회질서에 어긋난 내용의 계약은 무효로 한다는 포괄적인 규제 조항을 두고 있다. 이 조항을 이자율이 법정 최고금리를 초과하는 등 불법 소지가 있는 대부계약에 적용하겠다는 것이다. 지금도 이런 대부계약의 경우 채무자가 부당이득 반환 청구 소송을 통해 법정금리 초과분을 받아낼 수 있지만, 아예 계약 자체를 무효화해 원금과 이자를 모두 돌려받도록 하겠다는 게 요지다.
금감원은 이를 위해 불법사금융피해신고센터에 접수된 일부 사건의 무효 소송을 돕기로 했다. 무효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는 약 10건을 선정해 소송 비용 전액을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예산 확보 문제는 금융위원회와 논의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이를 위해 대한법률구조공단과 업무협약(MOU)을 맺고, 법률구조공단 소속 변호사를 대리인으로 선임하기로 했다.
금융당국 안팎에서는 이번 방침이 무리수라는 평가가 나온다. 금감원이 윤 대통령의 지시 사항을 이행하기 위해 업무 범위와는 거리가 먼 민법까지 건드리고 나섰다는 것이다. 금융당국은 기존에도 불법 사금융 피해자의 소송을 지원해왔으나, 이는 주로 대부업법과 채권추심법 등 금융당국 소관이거나 금융당국 업무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법률을 근거로 하는 소송이었다. 반면 민법은 금감원이 전문성이 없는 영역인 만큼 업무 효율성이 떨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금감원 고유 업무에 집중돼야 할 인력 자원과 예산이 분산될 위험도 있다.
금감원은 전문성을 보완하기 위해 법무부 등 소관 부처·기관과 협의한다는 계획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대통령 지시를) 다각도로 검토한 결과 금융 관계 법령보다는 민법을 적용하면 (무효화가) 가능할 것 같다고 판단했다”며 “민법 법리는 법률구조공단 소속 변호사들이 검토해주고 있다”고 말했다.
이재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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