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는 이미 와 있다. 다만 널리 퍼져있지 않을 뿐이다.”
캐나다의 유명 에스에프(SF) 작가 윌리엄 깁슨(William Gibson, 1948~)이 한 말이다. 기존 체제를 비판하며 등장하는 새로운 시도들은, 종종 자신을 미래로 포장한다. 화폐와 금융에서도 그렇다. 수년 전 암호화 기술과 분산원장을 기반으로 등장한 세력은 기존 금융을 ‘중앙화’된 것으로 비판하며, ‘탈중앙화 금융’(DeFi·디파이)이 미래라고 주장했다.
몇 년이 흐른 지금, 그에 대한 공감대는 찾기 힘들다. 오히려 디파이는 금융을 흉내 낸 온라인 카지노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확산 중이다. 그러나 기존의 금융이 중앙화되어 있다는 시각 그 자체는 디파이 진영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특히 중앙은행의 권한과 기능에 주목하며, 중앙은행이 화폐발행 권한을 독점하고 있다는 인식이나 중앙은행의 ‘본원통화’를 기반으로 민간의 ‘파생통화’가 만들어진다는 통념 등도 ‘중앙화된 금융’이란 시각에 따른 것이다.
■ “중앙화된 금융? 글쎄”
시장경제의 의사결정은 분권화된 개별 경제주체들에 의해 이뤄진다. 시장 거래에 필수인 화폐의 생산과 분배도 시장에서 이뤄진다는 점에서, 화폐는 이미 탈중앙화(분권화)돼 있다. 민간은행들은 대출을 통해서 화폐를 만들어내며, 화폐 가치를 담보하는 것은 대출의 건전성이다. 완전한 무위험대출은 존재할 수 없는 탓에 민간화폐의 가치도 완전하게 보장되지 않는다.
다수의 은행들이 각자 불완전한 민간화폐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지급(payment)과 구별되는 결제(settlement)라는 절차가 필요해졌다. 19세기 서구에서 널리 사용되었던 민간화폐인 민간은행권(private banknote) 사례를 보자. 민간은행들은 각자 자신들의 은행권을 발행했고, 이것이 지급수단으로 사용됐다. 내가 나의 거래은행이 발행한 은행권으로 물건을 구매하면, 판매자는 그 은행권을 자신의 거래은행에 입금한다. 이런 거래가 계속되면 각 은행들에는 타 은행이 발행한 은행권이 쌓인다. 이 은행권은 개별 은행들의 채무증서일 뿐 완전한 화폐가 아니기 때문에 채권채무 관계가 완전히 해소된 것이 아니다. 개별 은행들이 보유한 타 은행의 은행권들을 모아서 정산하는 과정, 즉 최종적인 결제를 거쳐야 하는데, 이는 모두가 신뢰하는 완전한 화폐로 이뤄져야 한다.
요컨대 일상 거래에서 사용되는 지급수단은 개별 은행들이 만든 불완전한 민간화폐이지만, 최종적인 결제자산은 모두가 신뢰할 수 있는 화폐여야 한다. 바로 이 결제자산 공급, 즉 지급결제의 안정성 보장이 중앙은행의 핵심 역할이다.
■ 최종 결제자산의 공급자로서의 중앙은행
최종 결제자산의 공급자가 형성되는 방식은 나라별로 조금 달랐다. 민간은행 중에서 상대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지닌 민간은행이 점차 중앙은행으로 발전하는 경우(영국, 프랑스 등)도, 정부 입법에 의해 제도화된 경우(미국, 캐나다 등)도 있었다. 본질은 같다. 중앙은행 제도가 정착되면서 최종 결제자산은 민간은행이 중앙은행에 보유한 계좌의 예치금, 즉 (지급)준비금으로 불리게 됐다. ‘연방준비제도’(Fed)라는 미국 중앙은행의 이름은 그 본질적 기능, 즉 결제자산인 준비금의 공급이라는 기능을 잘 보여준다. 연방준비법도 연준의 설립 목표를 탄력적인 통화 공급으로 명시하고 있다. 원활한 지급결제를 위한 결제자산의 탄력적인 공급이 중앙은행의 핵심 책무라는 뜻이다. 연준 설립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1907년 패닉도 결제자산의 부족에서 비롯됐다.
준비금은 중앙은행이 시장에 개입하는 경로이기도 하다. 평상시 준비금의 양 또는 대출조건을 통제함으로써 민간의 화폐창조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일반적인 통화정책이며, 위기 시 예금인출 등으로 준비금이 부족해진 민간은행에 준비금을 빌려주는 것이 최종대부자 기능이다.
최종 결제자산 공급이라는 중앙은행의 역할이 중요한 이유는 다수 민간은행들에 의해 화폐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만약 단 하나의 은행만 존재하고 그것이 중앙은행이며, 모두가 중앙은행이 발행한 화폐를 사용한다면 지급과 구별되는 결제라는 절차가 필요하지 않다. 중앙은행 화폐의 이전만으로 채권채무 관계가 해소된다. 여기서는 민간화폐의 불완전함으로 인한 패닉도 없고, 결제자산 부족에 따른 위기도 없지만, 화폐의 생산과 분배를 중앙은행이 좌우한다는 점에서 시장경제라고 하기 어렵다. 이와 달리 민간은행이 불완전한 화폐를 공급하되, 그 불완전함이 야기할 수 있는 문제를 중앙은행의 결제자산 공급으로 대응하는 현재의 체제가 시장경제에 부합한다. 전자는 계획경제의 폐해를 답습할 가능성이 크지만, 후자는 시장경제의 장점을 향유할 여지가 크다. 이처럼 민간화폐가 지급수단으로 역할을 하고, 중앙은행 화폐가 결제자산으로 기능하는 체제를 ‘이중(two-tiered) 통화체제’라고 한다.
■ 민간화폐 역사에 대한 오해
아마도 이중 통화체제라는 개념은 낯설 것이다. 중앙은행의 본원통화를 기반으로 민간은행이 파생통화를 만든다는 설명이 오히려 친숙하다. 이러한 그릇된 통념은 민간화폐의 역사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됐다.
규제와 기술의 변화 등에 힘입어 민간화폐 형태도 지속적으로 변화했다. 근대 초기, 환어음 등의 형태로 출현한 민간화폐는 은행권이라는 형태로 변화했다. 이후 민간 은행권이 널리 사용되면서 숱한 혼란을 겪은 주요국들은, 은행권 남발이 문제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민간은행의 은행권 발행을 금지하고 이를 독점한 중앙은행을 탄생시켰다. 이를 전후로 민간화폐의 주요 형태는 은행권에서 요구불예금으로 변화했다. 비록 민간은행권 발행은 중단됐지만, 요구불예금이 그 역할을 대신하면서 민간화폐 발행은 외려 활성화됐다. 이러한 민간화폐의 형태 변화에 대한 인식 부족은, 민간은행권으로 인한 혼란에 대응하는 과정을 화폐체제의 중앙집권화 과정으로 오해하게 만들었다. 즉 민간의 자유로운 화폐(은행권) 발행으로 인한 혼란이 중앙은행의 독점적 발권력에 의해 종식되었다는 내러티브가 만들어지고, 이에 따라 지금의 화폐체제를 중앙집권적인 것으로 간주하게 됐다는 뜻이다.
그러나 ‘중앙은행의 독점적 발권력’이 지칭하는 것은 은행권 발행권한의 독점일 뿐이다. 중앙은행 설립 이후에도 민간은행들은 요구불예금이라는 형태로 화폐 발행을 지속해오고 있다. 요구불예금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민간화폐에 대한 인식 부족은 예금보험제도 도입과정에서도 드러난다. 미국이 요구불예금으로 인한 패닉을 최초로 경험한 것은 1857년이었지만, 이에 대한 안전장치로 전국적인 예금보험제도를 도입하기까지는 무려 77년이 걸렸다.
역사는 반복된다. 19세기 민간은행의 요구불예금은 은행권 발행금지라는 규제를 회피하면서 화폐수요 증가에 대응하고자 한 혁신의 산물이었다. 그로부터 반세기 이상 지난 뒤, 은행 규제를 회피하면서 화폐수요 증가에 대응하기 위해 환매조건부채권(RP)·유동화기업어음(ABCP) 등 준화폐를 만들어내는 그림자은행, 즉 비은행금융중개라는 혁신이 등장했고, 이에 대한 적절한 대응 부재는 또 다른 금융위기를 낳았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그림자은행 부문의 뱅크런으로 평가한 미국 예일대학의 고튼 교수가 은행 요구불예금의 출현을 19세기의 그림자금융이라고 부른 까닭이다.
■ 코인은 미래가 아닌 과거
크립토와 디파이의 탈중앙화는 시스템의 작동이 의존하는 중개자를 제거하고자 하는 것이므로, 시장경제의 분권화와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이는 분산원장에 기반한 스테이블코인이 화폐의 미래이며, 주요 자산들의 토큰화를 통해 작동하는 탈중앙화 시스템이 금융의 미래라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적절한 담보를 통해 안정성을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되는 스테이블코인은, 최종 결제자산의 부재로 인해 항상 불안정했던 19세기 미국 자유은행 시대의 민간은행권과 동일하며, 따라서 화폐의 미래가 아니라 과거다. 분산원장 기술을 활용한 토큰화와 디지털화폐의 가능성을 중립적으로 모색해오던 국제결제은행(BIS)조차도, 올해 들어 분산원장 대신 통합원장에 기반한 토큰화를 주장하며 미래의 화폐시스템은 여전히 이중 통화체제에 기초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한 까닭이다. 이는 아직 추상적인 청사진에 불과하지만, 민간은행의 화폐창조와 중앙은행의 결제자산 공급이라는 핵심 구조가 유지된다는 점에서 디파이가 꿈꾸는 미래와는 다르다.
(위 내용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필자가 소속된 기관의 입장과는 무관합니다)
임일섭 예금보험공사 예금보험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