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 하나은행에서 한 관계자가 5만원권을 보이는 모습. 연합뉴스
연재를 시작하며
화폐는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친숙한 대상이지만 누가 어떤 방식으로 화폐를 공급하고 관리하는 것이 바람직한가란 문제는 끊임없는 논란의 대상입니다. 현재 화폐제도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비판, 금융위기를 겪을 때마다 등장하는 개혁방안들, 가상화폐의 도전 등을 배경으로 현대 화폐제도를 둘러싼 논점들을 살펴봅니다.
지난 3월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에서 발생한 뱅크런은 은행의 내재적 불안정성을 새삼 일깨웠다. 이 사태 이후 금융규제와 감독 강화 방안, 예금보험의 보호한도 상향 여부 등의 논의가 전개됐다. 이 과정에서 보다 근본적인 개혁방안 중 하나로 ‘내로 뱅킹’(Narrow Banking)도 떠올랐다.
뱅크런의 근본 원인은 예금에 비해 부족한 지급준비금에 있다. 내로 뱅킹은 은행의 요구불예금에 상응하는 규모의 준비금을 중앙은행에 예치하도록 하자는 게 핵심이다. 미국의 대공황 직후인 1933년 초반 시카고대학의 학자들 중심으로 최초로 제기된 구상인 터라, ‘시카고 플랜’이라고 불린다.
■ 실리콘밸리은행 사태가 소환한 90년 전 아이디어
내로 뱅킹은 요구불예금에 기반한 민간은행의 대출을 금지한다는 점에서 매우 급진적인 방안이다. 프랭크 나이트와 헨리 시몬스, 어빙 피셔 등 당대의 저명한 경제학자들이 지지하거나 동참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카고 플랜이 현실화되지 못한 까닭이다. 1935년 미국의 금융개혁은 상대적으로 온건한 방안을 담은 ‘글래스-스티걸 법안’ 제정으로 마무리됐다. 이 법안은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분리, 연방예금보험공사의 설립 등이 주요 뼈대다.
내로 뱅킹은 은행의 사업모델을 근본적으로 바꾼다는 점에서 급진적 개혁방안이지만, 그 문제의식에 대한 공감대는 의외로 넓다. 시카고 플랜의 실패 이후에도, 내로 뱅킹에 대한 문제의식은 이후 제임스 토빈, 밀턴 프리드먼 등 다수의 경제학자들에 의해 간헐적으로 이어져 왔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인 2012년에도 국제통화기금(IMF)의 연구진들이 긍정적인 평가를 담은 보고서를 내놓은 바 있다.
내로 뱅킹의 흔적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제도화된 바젤3의 ‘유동성 커버리지 비율’(LCR) 규제에서도 발견된다. 엘시아르 규제는 은행이 1개월내 이탈가능성이 있는 예금규모에 상응하는 고유동성자산을 보유하도록 하는 게 핵심이다. 여기서 고유동성자산은 바로 중앙은행 예치금과 국채 등을 가리키며, 이외에 정부보증기관의 채권과 투자등급 회사채 등은 할인되어 평가된다. 요컨대 이 규제는 안전자산을 통한 지급준비 강화라는 내로 뱅킹의 문제의식이 완화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내로 뱅킹에 대한 공감대는 또한 보수와 진보를 넘나든다. 미국 시카고대학의 보수파 경제학자인 존 커크레인 교수는 유명한 내로 뱅킹 옹호자이며, 바이든 정부 초기 통화감독청장 지명을 받았다가 본인의 진보적 성향에 대한 보수언론들의 잇따른 비판에 후보직을 사퇴한 사울 오마로바 코넬대 교수도 내로 뱅킹의 좌파 버전으로 평가받는 ‘인민의 장부론’(People’s Ledger)을 주창했다. 또한 2003~2013년 영국 중앙은행 총재를 역임한 정통 중앙은행가인 머빈 킹 교수 역시 중앙은행의 최종대부자 기능의 확장된 형태로서 ‘상시적 전당업자’(pawnbroker for all seasons)를 개혁방안으로 내세우고 있는데, 이 또한 민간은행이 자신의 단기부채(예금 등)에 상응하는 담보물을 중앙은행이 인정하는 안전자산으로 보유할 것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내로 뱅킹의 변종에 속한다.
■ 디지털 화폐는 내로 뱅크의 현실화?
만약 내로 뱅킹 체제로의 이행에 따라 요구불예금에 근거한 은행 대출이 사라진다면, 은행의 기능은 어떻게 변화할까? 표면적으로 내로 뱅킹은 민간은행의 대출을 금지하지만, 그것이 실질적으로 금지하는 것은 민간은행의 화폐창조 행위다. 왜 그런가.
은행은 예금 기반으로 대출하지만 동시에 대출을 통해 예금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은행은 대출자 명의의 통장에 일정 금액을 기입하는 방식으로 예금을 창조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은행예금도 지급수단·가치저장이라는 화폐 고유의 기능을 갖는다. 은행이 대출 과정에서 예금을 만들어낼 수 있는 이유는, 예금규모와 일치하는 지급준비금을 보유하지 않아도 돼서다. 그런데 예금규모와 일치하는 준비금을 중앙은행에 예치해야 한다면, 대출을 통한 ‘예금 창조’라는 은행의 기능은 사라진다. 은행은 예금자를 대상으로 지급결제서비스를 제공하는 기관이 된다.
결국 내로 뱅킹 체제에선 중앙은행만이 유일한 화폐 공급자가 된다. 현 체제에서는 민간은행과 중앙은행이 각각 예금통화와 본원통화를 공급하지만, 내로 뱅킹 체제에서는 예금통화는 사라지고 본원통화만 남는다. 내로 뱅크의 예금은 존재하나, 그것은 내로 뱅크가 만들어낸 화폐가 아니라 중앙은행이 만들어낸 본원통화의 보관증일 뿐이다.
시카고 플랜의 작성에 참여한 어빙 피셔 교수는 중앙은행에 예치된 준비금에 의해 그 가치가 담보되는 화폐를 ‘100% 화폐’라고 불렀다. 대출자산에 의해 그 가치가 담보되는 민간은행의 예금화폐는 100% 화폐가 아닌, ‘불완전한 화폐’란 의미다. 시카고 플랜은 민간은행이 만든 불완전한 예금화폐를 없애고, 중앙은행이 만든 완전한 화폐만 사용하자는 주장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오래전 급진적인 화폐제도 개혁안으로 등장했던 내로 뱅킹은 최근 금융의 디지털화를 배경으로 새로운 모습으로 부활하고 있다.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가 바로 그것이다. 중앙은행의 부채로서 중앙은행이 가치를 보장하는 시비디시는 본원통화에 해당한다. 만약 시비디시가 개인들의 직접적인 보유를 허용하는 형태, 즉 소매 방식으로 도입된다면, 이는 내로 뱅킹과 매우 유사한 것이 된다. 개인들이 은행예금 대신 시비디시를 지급수단으로 사용하게 된다면, 이는 개인들이 중앙은행 준비금에 의해 완전하게 지지되는 예금을 사용하는 내로 뱅킹 체제와 다를 것이 없다. 요컨대 소매 시비디시는 내로 뱅킹의 디지털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시비디시가 민간은행의 예금을 대체할수록 화폐공급자로서 민간은행의 역할은 축소되고, 화폐발행은 중앙은행이 독점할 것이다.
■ 17세기로의 퇴화?…꼬리무는 의문들
이러한 변화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다시 말해 뱅크런은 민간은행이 만들어낸 불완전한 예금화폐에서 비롯된 것이니, 이것이 중앙은행의 완전한 화폐로 대체되는 것은 금융안정 측면에서 바람직한 변화라고 봐야 할까?
이런 질문에 답변하기에 앞서, 다음과 같은 두가지 의문이 떠오를 수 있겠다. 중앙은행과 민간은행이 화폐발행 기능을 공동으로 수행하는 현 체제에서 ‘중앙은행의 독점적 발권력’이라는 통념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대표적인 통화량 지표인 엠(M)1 구성을 보면, 민간은행의 예금통화가 차지하는 비중이 90%에 이른다. 중앙은행의 화폐가 완전한 화폐이고, 민간은행의 화폐가 불완전한 화폐라면, 이 불완전한 화폐가 통화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구조는 왜 만들어졌는가?
주창자들이 그리는 내로 뱅크의 모습은 17세기 은행업 태동기를 연상시킨다. 당시 영국의 금세공업자들은 고객의 금을 맡으면서 보관증을 주었는데, 이 보관증이 사실상 지급수단으로서의 화폐 역할을 했다. 그러나 고객들이 보관증만 주고받으며 대부분의 거래를 할 뿐 금을 되찾아가는 사례가 많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금세공업자들이, 금 보유량을 초과하는 보관증을 발급하게 되면서 근대 은행업이 시작됐다고 한다. 이러한 역사적 에피소드를 상기해보면, 내로 뱅크의 모습은 고객의 현금을 보관하면서 지급결제서비스만 제공할 뿐 대출은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은행업 태동 초기 금세공업자와 유사하다. 내로 뱅킹 체제로의 이행은 금융안정을 위한 근본 개혁인가 아니면 과거 은행의 초기적 형태로의 퇴행인가란 질문에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다.
이상의 질문들에 답변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이중적 화폐구조, 즉 중앙은행 화폐와 민간은행 화폐가 공존하는 시스템이 형성돼온 역사와 그 특성, 불안정성을 보완하기 위해 만들어온 여러 안전장치들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이것이 앞으로의 주제다.
(위 내용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필자가 소속된 기관의 입장과는 무관합니다)
임일섭 예금보험공사 예금보험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