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권시장 수요의 중심축을 담당했던 보험사들이 자취를 감추고 있다. 고객들이 저축성보험 대신 금리 경쟁력이 높아진 은행 예·적금으로 몰려가자, 현금이 궁해진 보험사들이 채권을 시장에 던지는 모습이다. 이미 한전채와 은행채 등으로 공급물량 부담이 늘어난 마당에 수급 불균형이 더 심각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 이유다. 시장에서는 금융당국의 유동성 완화 조처가 보험사들의 행보에 미칠 영향에 주목하고 있다.
7일 금융투자협회 집계를 보면, 장외채권 유통시장에서 보험사는 지난 1∼4일 4869억원어치를 순매도했다. 이 기세가 이어지면 이달 순매도 금액은 지난달 기록을 넘어설 가능성도 있다. 보험사는 지난 9월 올해 들어 처음으로 순매도(6317억원)로 전환한 뒤 지난달 2조2319억원으로 순매도 규모를 더욱 늘렸다. 올해 상반기에 월평균 4조307억원어치를 순매수한 것과는 차이가 크다.
기존에 보험사들은 장기물 채권 시장에서 ‘큰손’ 역할을 해온 터라 우려가 크다. 보험사들은 보험상품(부채)의 만기가 길기 때문에 자산도 장기물 위주로 운용해왔다. 특히 국채 시장에서 보험사들은 은행·연기금과 함께 가장 많은 물량을 소화해왔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전체 국고채의 28%를 보험사들이 들고 있다. 유통시장에서도 올해 상반기 보험사들의 국채 매수금액은 전체의 14.8%에 이르렀다.
한국전력공사채권(한전채) 등으로 구성된 특수채 시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올 상반기에 특수채 유통시장에서 보험사들은 전체 매수 금액의 17.5%를 차지했다. 올해 들어 급증한 한전채 발행 물량의 상당 부분도 보험사들이 사들였을 것으로 보인다.
보험업계에서는 과거와 달리 장기물 채권을 시장에 던지게 된 이유로 저축성보험 문제를 꼽는다. 최근 예·적금 금리가 상승하자 저축성보험의 금리 경쟁력이 떨어졌고, 이에 소비자들이 저축성보험을 해약하고 예·적금으로 갈아타는 경우가 늘었다는 것이다. 저축성보험을 해약하면 보험사는 소비자들이 납입했던 보험료를 돌려줘야 하므로 그만큼 현금이 빠져나가고 유동성 비율이 떨어진다. 유동성 자산을 그만큼 더 많이 확보해야 하는 보험사들은 규제상 유동성 자산에 포함되지 않는 장기물을 매도해 현금화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실제로 생명보험업계의 저축성보험 규모는 올해 하반기 들어 감소 추세가 더 가팔라졌다. 내년 새 회계기준(IFRS 17) 도입을 앞두고 보험사들이 저축성보험 판매를 축소하면서 이미 규모가 줄어드는 추세이긴 했으나, 예·적금 금리 상승으로 해약 사례가 늘면서 감소 속도가 더 빨라진 것이다. 생명보험협회 집계를 보면, 지난 8월 말 생명보험사들이 보유한 저축성보험 계약액은 424조8183억원으로, 한 달 전에 비해 3조320억원 줄었다. 직전 1년간 평균 월간 감소액이 1조6603억원에 그친 것과 비교하면 차이가 있다.
시장에서는 금융당국이 꺼내 든 ‘유동성 규제 완화’ 카드가 효과를 발휘할지 주목하고 있다. 금융위원회는 유동성 비율을 계산할 때 유동성 자산에 만기가 비교적 많이 남은 채권도 포함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보험사들 입장에서는 장기물 채권을 팔지 않고도 유동성 비율이 개선되는 효과가 있는 셈이다. 주로 국채와 특수채의 만기 기준을 완화해줄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채권의 발행주체와 상관없이 만기 3개월 이하의 채권만 유동성 자산으로 인정해주고 있다.
이재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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