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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경제일반

‘ESG 바람’ 탄 정부…노동자·사회적 약자는 못 보나

등록 2021-06-07 09:13수정 2021-06-07 09:20

국민연금 ‘탈석탄 투자’ 선언
금융위·금감원은 TCFD 지지
정부 부처·기관도 ESG에 가세

기업·금융 주도 ESG에
일자리 소멸로 가장 피해가 큰
노동자·소상공인·농민은 소외

2050 탄소중립위도 산업계가 주도
민주노총 “불참”, 환경단체 보이콧 논쟁

석탄발전·자동차부품사 설문조사 결과
“미래 준비 전혀 안돼 고용불안 시달려”
ESG 추진 과정에서
노동자·사회적 약자와 적극 소통해야
자동차 산업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는 이에스지(ESG) 전환 과정에서 가장 큰 타격을 받는 계층이다. 국내 한 완성차 제조업체에서 비정규직 노동자가 일을 하고 있다. 울산/김태형 기자
자동차 산업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는 이에스지(ESG) 전환 과정에서 가장 큰 타격을 받는 계층이다. 국내 한 완성차 제조업체에서 비정규직 노동자가 일을 하고 있다. 울산/김태형 기자

금융계와 재계에 이어 정부도 ‘이에스지(ESG: 환경, 사회책임, 지배구조) 유행’에 가세했다. 지난 5월24일 금융위원회는 금융감독원과 산업은행 등 13개 금융 유관기관과 함께 ‘기후변화 관련 재무정보 공개 협의체’(TCFD)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 이 협의체는 주요 20개국(G20)의 요청에 따라 금융안정위원회(FSB)가 기후변화 관련 정보의 공개를 위해 설립한 글로벌 협의체다. 지배구조, 전략, 리스크 관리, 지표·목표치 등 4개 주요항목의 공개를 통해 기업이 기후변화 관련 위험과 기회를 의사결정에 반영하도록 만드는 게 목표다. 이 협의체의 정보공개 권고안은 이에스지 중 환경 정보 관련 국제표준으로 떠올랐다.

지난 5월28일에는 국민연금이 ‘탈석탄 투자’를 선언했다.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기금위)는 이날 정기회의를 열고 석탄 채굴 및 발전 산업에 대해 투자를 제한하는 내용의 ‘네거티브 스크리닝’을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네거티브 스크리닝은 이에스지 관점에서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산업이나 기업군을 투자 포트폴리오에서 제외하는 것이다. 기금위는 국내외 석탄발전소 신규 건설을 위한 프로젝트에 투자를 하지 않기로 하고 단계별 실행 방안을 수립하기로 했다.

정부의 이에스지 대응은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면서 속도를 내고 있다. 지난해 연말까지만 해도 기후변화 관련 재무정보 공개 협의체 지지를 선언한 정부 기관은 9개에 불과했다. 그러나 올해 초부터 대기업과 자산운용사를 중심으로 협의체 지지 선언이 잇따르자 정부의 대응도 빨라졌다. 불과 6개월 만에 협의체 지지 선언을 한 국내 기관이 45곳에 이를 정도로 속도가 붙었다.

■ 중립적이지 않은 ‘탄소중립위원회’

하지만 노동계와 시민사회는 ‘이에스지 속도전’에 곱지 않은 시선을 던진다. 이에스지에 가장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노동자와 소상공인, 농민 등 사회적 약자 계층이 소외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스지의 핵심 이슈인 ‘탈탄소’는 철강과 자동차, 화학, 정유 등 국내 대표적 제조업은 물론 자동차 정비업체와 주유소, 하우스재배농업 등 관련 업종의 일자리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탄소배출량 감축은 필연적으로 이들 업종의 일자리 감소를 수반한다.

그럼에도 이에스지 도입 과정에 노동자와 사회적 약자를 위한 대책은 전무하다시피 한 상황이다. 우선 국내외 600여개에 이르는 이에스지 평가지표 가운데 노동자 실직 대책 등을 평가 항목에 넣은 지표는 아직 없다. 장자영 블룸버그 코리아 이에스지 애널리스트는 “기업들의 이에스지 관련 공시에 노동자 실직 대책 등이 포함돼 있지 않기 때문에 평가지표에도 반영이 안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정부 대책도 마찬가지다. 지난 5월29일 정부의 ‘2050 탄소중립위원회’가 출범했을 때 노동계와 환경단체 그리고 정의당, 녹색당, 진보당 등은 “보여주기식 정책 추진을 중단하라”며 날 선 비판을 가했다. 탄소중립위원회가 이전 정부에도 있었던 각종 위원회처럼 생색내기용에 그칠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97명에 이르는 위원 가운데 석탄화력발전·내연기관 노동자, 농민, 중소상공인 등 직접적 타격을 받는 당사자들은 배제됐다. 진보당은 논평을 내어 “막대한 온실가스 배출로 기후위기를 유발해온 산업계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반면, 실제 전환 과정에서 위협에 내몰릴 수 있는 노동자·농민·여성·지역민·청년·빈민·장애인 등의 고려는 미미하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위원회에는 최정우 포스코 회장(한국철강협회장), 이현준 한국시멘트협회장, 문동준 한국석유화학협회장, 김동욱 현대자동차 부사장, 추형욱 에스케이이엔에스(SK E&S) 대표이사 등 산업계 주요 인사들이 대거 포함됐다. 하지만 노동계를 대표하는 민주노총은 불참을 결정했다. 취약산업 노동자를 지원하는 ‘공정전환’ 분과위원회에 김동명 한국노총 위원장이 참여했을 뿐이다. 환경단체들 내부에서는 ‘보이콧’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탈탄소’ 전환 과정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보는 노동자와 농민, 소상공인들의 목소리는 탄소중립위원회에 제대로 반영될 수 없게 된 것이다.

“발전소 폐쇄 시점 안다” 8.7% 그쳐

지난 5월25일 ‘정의로운 전환, 그린뉴딜 국회의원모임’이 주최한 토론회에서 공개된 설문조사는 이에스지에서 사회적 약자가 소외된 실태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류호정 정의당 의원실과 공공운수노조 발전비정규직전체대표자회의가 석탄화력발전소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 3634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다. 이 조사에서 응답자의 92.3%가 탈탄소 전환으로 고용 불안을 느끼고 있다고 답했다. 하지만 응답자 가운데 자신이 일하고 있는 발전소의 폐쇄 시점을 정확히 알고 있다고 답한 이들은 8.7%에 불과했다. 발전소 운영 중단 시 다른 일자리가 준비돼 있다는 응답도 4.3%에 그쳤다. 탈석탄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정작 이해당사자인 석탄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 대다수는 언제 일자리가 없어지는지도 모른 채 불안에 떨고 있는 것이다.

설문조사를 진행한 정의로운 에너지전환 연구팀은 “이번 설문조사는 2050년 탄소중립 실현을 위한 로드맵을 마련하는 과정에 이해당사자의 적극적인 참여가 반드시 필요함을 보여준다”고 짚었다. 이헌석 정의당 기후정의특별위원장은 “기업들은 기후대응에 대한 준비가 상대적으로 잘돼 있지만, 비정규직 같은 사회적 약자들은 준비가 전혀 안 돼 있다. 이런 현상이 지속되면 사회적 약자가 탈탄소에 저항하는 세력이 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제조업 가운데 이에스지에 가장 신속하게 대응하고 있는 자동차 산업은 ‘약자 소외 현상’이 더욱 뚜렷하다. 자동차 제조업체가 전기차 등 미래차로의 전환에 속도를 내고 있는 상황에서 역설적으로 기존 부품업체 노동자들은 실직 위기에 내몰리고 있다. 엔진 등 기존 자동차 부품들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기 때문이다.

한국노총이 지난해 9월7~18일 동안 금속노련 산하 자동차 부품업체 99곳의 노조 간부들을 상대로 벌인 설문조사는 부품업체 노동자들의 불안감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미래차로의 전환이 회사에 미칠 영향에 대해 응답자의 절반 이상(56.6%)은 부정적으로 보는 것으로 나타났다. 긍정적인 반응은 19.1%에 그쳤다. 또 미래차가 고용안정에 미치는 영향을 두고서도 60.6%가 부정적으로 본다고 답했다. 긍정적이라는 응답은 13.1%였다. 반면 숙련도 등 노동자 개인의 능력 향상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47.5%가 별 영향 없을 것이라고 답했고, 직업만족도도 50.5%가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응답했다. 미래차가 일자리를 줄이기만 할 뿐 노동자 개인의 삶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자동차 부품업체의 일자리 감소는 이미 스마트 공장(제조 전 과정을 정보통신과 로봇 기술로 통합한 공장)의 도입으로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다. 가장 먼저 타격을 받는 이들은 항상 그렇듯 비정규직 노동자다. 에어백 제조업체인 ㅇ사의 이원로 노조위원장은 “현재 3개 하청업체의 비정규직 170여명이 일하고 있는데, 이들을 2024년까지 50명으로 감축하는 게 회사 목표로 알고 있다. 정규직은 자연 감소로 해결하지만, 비정규직은 바로 구조조정에 들어간다”고 말했다.

미래차 경쟁력 막는 단가 후려치기

자동차 산업의 원하청 간 불공정 하도급 거래는 부품업체들의 미래차에 대한 대응을 더욱 어렵게 한다. 원청기업의 독점적 시장 지위를 악용한 ‘갑질’이 부품업체의 수익과 기술혁신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부품업체들이 오랜 시간과 비용을 들여 경쟁력 있는 미래차 부품을 개발하더라도 원청기업이 납품 단가를 후려치면 버텨낼 수가 없다.

한국노총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한 변속기 제조업체는 3~4년 전 이익률이 6%인 미래차 부품을 개발했지만 3~4년 만에 이익률이 1%대로 떨어졌다. 완성차 업체가 단가 인하를 지속적으로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런 관행이 근절되지 않으면 부품업체의 혁신 의지는 꺾일 수밖에 없다. 한국노총중앙연구원 황선자 부원장은 “자동차 부품산업은 불공정 하도급 거래 관행이 먼저 개선돼야 미래차로의 전환이 공정하게 이뤄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춘재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기자 c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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