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은 2일 청와대 상춘재에서 최태원 SK 그룹 회장(왼쪽 두번째),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왼쪽 네번째), 구광모 LG 그룹 회장(왼쪽), 김기남 삼성전자 부회장 등 4대 그룹 대표와 간담회에서 앞서 환담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사면론이 제기되고 확산되는 과정에서 동원된 명분의 열쇳말은 ‘반도체‘와 ‘총수’였다.
사면론 쪽으로 한발 다가섰다는 분석을 낳은 지난 2일 대통령과 4대 그룹 대표 간 청와대 오찬 간담회 자리에서 김기남 삼성전자 부회장은 “반도체는 대형 투자 결정이 필요한데 총수(이재용 부회장)가 있어야 의사결정이 신속하게 이뤄질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달 27일 한국경영자총협회를 비롯한 경제5단체가 청와대에 전달한 사면 건의서와 꼭 닮았다. 이들 단체는 “치열해지는 ‘반도체’ 산업 경쟁 속에서 경영을 진두지휘해야 할 ‘총수’ 부재로 과감한 투자와 결단이 늦어진다면 그동안 쌓아 올린 세계 1위의 지위를 하루아침에 잃을 수도 있다”고 했다.
삼성 전직 임원은 “삼성전자 정도 되는 회사면 시스템을 갖추고 있고, 그 시스템에 따라 운영되는 게 사실이긴 하지만, 총수 고유의 역할이 있다”며 대표 예로 ‘대규모 투자’와 ‘사장단 인사’를 들었다. “전문경영인은 단기 실적에 더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멀리 내다보는 투자 결정과 계열사 사장단 포진은 총수 몫이다.” 이 부회장 사면과 관련된 여러 여론조사에서 찬성률이 꽤 높게 나온데 비춰 이런 식의 인식은 기업 바깥 일반인들 사이에도 꽤 많이 퍼져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재계의 총수 역할론에 류영재 서스틴베스트 대표는 “이사회가 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라고 풀이했다. 상법상 회사의 의사 결정은 주주의 대리인으로 구성된 이사회 몫이고 이사회가 정책 방향을 정하면 경영진은 그에 따라 집행하는 게 정상적인 일처리 방식인데 여기에 어긋나게 운영되고 있는 현실을 스스로 털어놓고 있는 격이라는 뜻이다. 이재용 부회장은 미등기 임원으로 삼성전자의 이사회 구성원도 아니다.
사면론의 적절성 여부를 떠나 여기에 동원된 명분만큼은 재계 자체 논리로 따지더라도 자가당착이란 비판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기업지배구조 개선과는 동떨어져있고 오히려 반대 흐름인 까닭이다. 글로벌 추세에 발맞춘다며 재계에서 대대적으로 내세우고 있는 이에스지(ESG, 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과도 맞지 않는다. 이에스지는 ‘환경을 보호하고 이해관계자들을 중시하고 지배구조를 투명화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 중 지배구조 투명화에서 핵심은 이사회의 전문성, 독립성을 높여 기업 가치, 주주 이익을 강화하는 내용이다. 사면론에 동원된 총수 역할론과는 양립 불가다.
기업평가 기관 시이오(CEO)스코어 대표를 지낸 박주근 리더스인덱스 대표는 “삼성 스스로 ‘국정농단 사건’ 뒤 지배구조를 투명화하겠다고 해놓고 총수 없이는 안 돌아간다고 하는 건 이율배반이며, 취약한 지배구조를 갖고 있다고 스스로 반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 대표는 “지난 5년간 삼성이 투자 타이밍(적기)을 놓쳤는가? 미국 투자도 총수 부재 중에 이뤄진 것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총수가 있어야 신속한 의사 결정이 이뤄진다’는 주장에 김진방 인하대 교수는 “(그런 식의 의사 결정은) 바람직하지도, 필요하지도 않으며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 수긍하는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사업가로서 경영 역량을 쌓아 자리를 차지한 게 아니라 불합리한 지분구조와 변칙적인 세습을 통해 정점에 오른 총수의 결정을 받아서 사람을 임명하고 투자를 결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인정하고 들어가는 잘못된 인식이라는 뜻이다.
홍익대 전성인 교수도 “(총수가 있어야 의사결정을 할 수 있다는 말은) 결국 우리의 경영 환경이 안 바뀌었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라며 “총수가 자신을 위해선 이사회에서 무슨 결정을 하든 통 큰 투자를 할 수도 있고 미룰 수도 있다는 것이냐”고 반문했다. 전 교수는 “삼성전자가 2030년까지 할 투자 계획을 밝혀놓은 상태이고, 미국에 대한 투자 규모도 20조원으로 제시한 상태인데, 총수가 갑자기 이를 바꾸거나 늘릴 수 있다는 것인지 의문”이라며 “결국 부당한 사면론의 명분을 찾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영배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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