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소비자보호법(금소법)이 지난 25일 시행된 지 엿새가 지났지만 시중은행의 일부 서비스는 여전히 ‘점검 중’이다. 이달 중순께 발표된 금소법 시행령을 완벽히 적용하는 데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이유인데, 금융당국은 ‘시간은 이미 충분했다’며 은행업계의 준비 부족을 질책하고 있다.
31일 금융업계 취재를 종합하면, 케이비(KB)국민은행은 금융소비자보호법의 전산 시스템 적용을 이유로 모바일 ‘리브’ 애플리케이션을 통한 간편 대출 서비스를 일시 중단했고 신한은행도 신한 마이카 대출과 개인사업자 인터넷 기업대출, 중도금·우리사주·이주비 대출과 관련한 서류를 접수 받지 않는다. 하나은행은 ‘HANA온라인 사장님 신용대출’ 및 ‘플러스 모바일 보증부 대출’을 취급하지 않고, 로보어드바이저를 이용한 펀드 가입도 중단했다. 우리은행은 스마트 키오스크를 통한 예금과 펀드, 신용카드 신규 판매를 중지했고 에스씨(SC)제일은행도 일부 대출상품과 방카슈랑스(은행에서 파는 보험) 상품 판매 절차에 금융소비자보호법을 적용하고 있어 현재 판매를 하지 않는다. 이런 서비스는 이르면 4월 안에, 늦으면 올 상반기 안에 재개될 예정이다.
은행들이 아직 다 마치지 못한 작업은 주로 금융상품 설명서를 소비자에게 이메일 등으로 제공하는 기능을 추가하는 것이다. 금융소비자보호법은 과거에 상담원이 읽거나 화면에 띄우기만 했던 설명서를 이제는 소비자에게 직접 제공하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일부 비대면 대출상품이나 자동화기기는 아직 고객에게 서류를 온라인으로 전송하는 기능이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금융상품을 추천하기 전에 금융소비자 투자 성향을 미리 확인하는 절차도 기존 로보어드바이저에 다 적용하지 못해 추가 작업을 하고 있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고객 이용률이 높은 상품부터 순차적으로 적용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고객들이 덜 찾는 상품은 서비스 적용이 늦어졌다”고 설명했다.
은행들은 또 구체적 지침 역할을 하는 시행령의 주된 내용이 입법예고 과정에서 조금씩 바뀌었고, 법 시행 약 일주일을 남겨둔 지난 17일에야 최종적으로 확정돼 미리 대처하기 어려웠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금융소비자보호법 시행령이 입법예고될 당시에는 ‘금융소비자가 원하면 서류를 받지 않을 수 있다’는 선택지를 만들었으나 확정된 시행령에선 삭제되는 등 조금씩 바뀌어 관련 시스템을 미리 반영하기는 어려웠다는 것이다. 은행권 관계자는 “금융회사 입장에선 보수적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었고, 가급적 완성된 지침을 그대로 따르고자 했더니 시간이 촉박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금융소비자에게 상품 설명서를 제공해야 한다는 의무사항 자체는 지난해 3월 금융소비자보호법이 국회를 통과할 때부터 널리 알려졌다. 금소법 시행령도 지난해 12월 행정예고될 당시 금융소비자에게 ‘서면 등’으로 설명서를 교부해야 한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적법한 상품 추천을 위해 금융소비자의 투자 성향을 미리 확인해야 한다는 조항도 마찬가지다. 은행들이 관련 전산 시스템을 업데이트할 시간이 짧게는 3개월, 길게는 1년 이상 있었다는 뜻이다. 이에 따라 카카오뱅크와 씨티은행은 시행일에 맞춰 서비스에 법안 내용을 모두 적용했다.
윤민섭 한국금융소비자보호재단 연구위원은 “증권회사는 이미 증권신고서를 투자자가 다운 받을 수 있게 하는 등 관련 기능을 다 갖췄는데 은행업계만 시간이 더 필요했다는 주장은 믿어주기 어렵다”며 “금융회사가 최고경영자의 제재심 리스크 등에 집중하느라 금융소비자보호법 적용을 우선순위에서 미뤘다가 지금에 와서 급하게 추진하니 시간이 촉박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금융당국이 세세한 규정이 아닌 법 원칙 중심으로 감독해 금융회사에 자율권을 주겠다고 수차례 밝혀 왔는데 아주 사소한 규정까지 다 정해줬어야만 추진할 수 있다고 말하는 건 무리가 있다”고 말했다.
금융소비자보호법은 지난 2011년 발의돼 약 9년 동안 국회에 머물다 지난해 국외 파생결합상품(DLS·DLF) 사모펀드 부실 판매를 계기로 극적으로 국회 문턱을 넘었다. 1년 남짓 안에 금융당국이 하위 법령을 제정하고 은행업계가 이를 적용해야 해 혼란이 따를 것이라는 우려가 꾸준히 제기돼 왔다. 금융위는 이런 지적을 받아들여 6개월 동안은 제재보다는 계도 위주로 감독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신다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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