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만 두산인프라코어 회장이 3월4일 오후 서울 중구 을지로 두산타워 33층 집무실에서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으로서 젊은 기업가들을 위한 법과 제도 개혁에 힘쓰던 일을 얘기하고 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에게는 재벌 대기업 회장, 경제단체 회장 외에도 왕성한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활동가, 호기심 많은 ‘얼리어답터’, 틈만 나면 카메라를 손에 드는 사진 마니아, 자칭 요리사, 국제적인 봉사단체 ‘몰타기사단’ 한국지부 회장을 맡은 자원봉사가 등 수많은 호칭이 따라붙는다. 박 회장은 오는 23일 상의 총회에서 7년8개월 동안 맡아온 회장직을 내려놓고, 자신의 말처럼 ‘영혼이 자유로운 사람’으로서 제2의 삶을 시작한다. 그는 최근 첫 산문집 <그늘까지도 인생이니까>를 출간했다. 지난 4일 흥인지문이 내려다보이는 서울 동대문 두산타워 33층 사무실에서 특유의 멜방고리 바지를 입은 박 회장과 만났다.
박용만(66) 회장은 2013년 부친인 박두병 두산그룹 회장과 형인 박용성 회장에 이어 한집안에서 세번째로 대한상의 회장을 맡았다. 국내 경제단체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앞으로도 깨지기 힘든 진기록일 것이다. 그는 재임 기간 중 10년, 20년 앞을 내다보면서 경제 활력을 되찾고 신산업을 일으키려면 낡은 법과 제도, 규제 혁파가 필수조건이라고 줄기차게 강조했다. 박 회장은 인터뷰에서도 “우리 같은 기성세대가 만든 법과 제도가 젊은이들이 미래를 향해 가는 것을 막고 있다”며 “청년들에게 미안하다. 백번이고 미안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기성세대가 단기 이슈에만 몰입돼 젊은이들의 변화 노력을 다 잠재워놓고 있다”며 “젊은이들의 오늘을 이해 못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젊은이의 미래를 만들어주느냐”고 탄식했다.
박 회장은 상의가 지난해 ‘규제 샌드박스’ 활성화에 앞장선 것도 젊은이들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라고 털어놨다. 규제 샌드박스는 새 제품이나 서비스가 출시될 때 일정 기간 기존 규제를 면제·유예하는 제도다. 법과 제도가 좀처럼 바뀌지 않는 현실에서 새로운 산업을 일으키기 위한 ‘비상구’인 셈이다.
박 회장은 정부의 눈치를 보거나 회원 기업의 이해 대변에 급급한 다른 경제단체장들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모습을 보여왔다. 2019년 7월 일본의 수출 규제 이후 국론이 분열됐을 때 정부 중심으로 단결하자고 강조하고, 그 직후 ‘조국 사태’로 경제 이슈가 실종됐을 때는 “경제는 버려지고 잊힌 자식 같다”고 일침을 놓았다. 박 회장은 경제계에서 ‘미스터 바른소리’ 역할을 했다는 말에 “표현이 마음에 든다”며 만족해했다.
박 회장은 ‘대한상의는 회원사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은 물론 국가 경제에 어떻게 도움이 될 것인지를 항상 생각해야 한다’며 ‘대한상의 균형추론’도 강조했다. 그는 “경제단체가 세 과시로 의견을 관철하던 시대는 지났다”며 “경제단체도 일하는 방식을 바꿔서, 목소리만 키우지 말고, 팩트와 논리를 가지고 치열하게 토론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 경총이 경제단체의 힘을 키워야 한다며 전경련과의 통합론을 제기한 것에 대해 “동의할 수 없다”며 혀를 찼다.
박 회장은 최근 카카오 김범수, 우아한형제들 김봉진 창업자 등 성공한 벤처기업인들의 잇따른 재산 기부에 대해 “훌륭하고 좋은 일로, 많이 동참했으면 좋겠다”고 높이 평가했다. 다만 “부의 대물림을 무조건 죄악시하고 그것을 막기 위해 모든 법과 규제를 동원하는 현실이 오히려 편법을 낳는다”고 지적했다.
박 회장은 코로나 위기 이후 양극화 심화에 대해 “국가적 재난 상태에서 어려운 국민을 돕는 게 국가의 역할”이라며 재정의 적극적인 역할을 강조했다. 또 “정부와 정치권은 증세론을 포함해 재정건전성에 대한 논의를 지금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부자증세론에 대해서는 “방법론의 하나로 논의할 수 있다”며 열린 자세를 보였다.
박 회장은 산문집 제목에 ‘그늘’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것에 대해 “책을 보면 내가 평생 양지만 걷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며 “오히려 그늘에 있을 때 깨달음도 많았고 성장과 성숙의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박 회장은 책에서 자신을 ‘영혼이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영혼이 자유로운 사람은 삶의 외형이 속박당하고 불편하고 자유가 없어도, 내면은 끝까지 자유로울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또 자신에게 글쓰기는 “소통”이라며 “글을 통해 공감을 이룰 때 행복하다”고 말했다.
박 회장은 평소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채 서울역 앞 등 여러 곳에서 다양한 봉사활동을 한다. 박 회장은 “봉사를 시작할 때 항상 ‘우리 자신의 베풂을 자랑하기 위함이 아님을 늘 생각하게 해달라’는 기도문을 읽는다”며 “신앙(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의 실천이면서, 공동체의식”이라고 설명했다. 박 회장은 “책 인세 수입도 봉사활동에 쓸 계획”이라며 “그동안 봉사활동을 외부에 일절 알리지 않았는데 앞으로는 후원을 위해 좀 달라져야 할 것 같다”고 조심스레 말했다.
박 회장은 상의를 떠난 이후에 대해 “이 사회에 선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일을 하면 좋겠다”며 “나의 이기적 목적을 위한 일은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박 회장은 이후의 삶을 백지에서 시작한다는 취지로 ‘백지명함’을 만든다. 박 회장은 정치권 진출 가능성에 대해 “정치가 싫다”며 “효율성과 생산성을 중시하는 기업인은 정치에 맞지 않는다”고 소신을 밝혔다.
박 회장은 힘든 표정으로 2시간여의 인터뷰를 마치면서 “이제 우리 사회도 대립과 갈등을 넘어서자”며 “남 탓을 하는 것으로는 한 발짝도 앞으로 못 나가고, 미래에 대한 준비를 할 수 없다”고 간곡히 말했다.
―<그늘까지도 인생이니까>를 보면 책이 그림·사진 거의 없이 400페이지가 넘어요.
“책을 쓴 게 처음이라 400페이지가 그렇게 많은 양인지 몰랐어요. 원래는 600페이지가 넘었는데 줄인 거예요, 그런데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이 책이 그렇게 진도가 안 나가는 책이 아니에요. 굉장히 술술 잘 읽히는 책이에요.”
―주위에도 재미있게 읽었다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요. 그래도 저자가 술술 읽힌다고 하는 것은 지나친 자신감일 수도 있는데요.
“그건 아니고, 책 속에 있는 상당수 얘기가 내가 후배나 친구들하고 술 한잔하면서 해주던 이야기들이거든요. 글체도 친구나 선배가 조곤조곤 편안하게 얘기하듯이 쓰겠다고 생각했어요.”
―평상시 글쓰기를 좋아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언제 이렇게 많은 글을 썼나요?
“에피소드 석 줄, 생각 석 줄, 이런 식으로 휴대폰에 메모를 해놨거든요, 글로 엮어서 쓰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3월 코로나 때문에 모든 약속이 강제로 없어졌잖아요. 집에 있는 시간이 많더라고. 그래서 16일 만에 80% 정도 썼어요. 밤낮없이 계속 썼어요.”
―박용만에게 글쓰기란 어떤 의미인가요?
“공감과 소통. 남한테 안 보여줄 글은 안 써요. 소통하기 위해서 글을 쓰는 거고, 그것으로 공감할 때 행복해요.”
―평생 양지만 걸었을 것 같은 분이 책 제목에 ‘그늘’이라는 표현을 썼네요.
“책을 보면 내가 평생 양지만 걷지 않았다는 게 나와 있어요. 누구나 삶을 살아가면 양지가 있는가 하면 그늘도 있어요. 또 양지만 있는 사람도 없고 그늘만 있는 사람도 없어요. 단지 양지의 양이 얼마나 되고 그늘의 양이 얼마나 되느냐는 비율이 다르고, 같은 그늘이라 하더라도 추워서 괴로운 그늘이 있는가 하면, 서늘해서 시원한 그늘이 있어요. 양지도 굉장히 밝고 좋은 양지가 있는가 하면 내가 원하지 않는 양지도 있지 않겠어요? 그늘에 있을 때 깨달음도 많았고 성장과 성숙의 계기가 된 적이 더 많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책에서 가족사에 관해서도 썼더라고요.(박 회장은 박두병 두산그룹 초대 회장의 6남1녀 중 5남인데, 위의 형제들인 4남1녀와는 어머니가 다르다는 내용을 담았다.)
“조금 썼죠. 그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책의 스토리가 이해가 안 돼요. 예를 들면 내가 처음 회사에 들어가면서 가졌던 갈등에 관한 얘기들이 있거든요. 아버지 회사에 자동으로 들어왔는데 이게 뭔 소리냐고 할 수 있죠. 그런 이해를 돕기 위해서 앞부분에 아주 최소한도의 이야기만 한 거예요.”
―책 뒤 에필로그에 ‘인간 박용만’에 대한 얘기를 담았네요.
“간단하게 썼어요. 영혼이 자유로운 사람이다. 그런데 회사 일을 몇십년 하다 보니, 실제로는 영혼이 자유롭게 살지 못했어요. 하지만 내가 정말 영혼이 자유롭지 않게 살았는가를 되돌아보니까 그건 또 아니더라고. 그래서 ‘자유로운 영혼을 갖고 사는 것은 자유롭지 않아도 자유롭다’고 썼어요. 난 틀에 얽매이는 게 싫어요. 누가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도 싫고. 그리고 생각도 가급적이면 새로운 게 좋아. 새로운 거에 대한 호기심도 많고. 그리고 한자리에 머물러 있지 못해. 그게 사업할 때 도움도 되지만 굉장히 고통을 줬던 기질이에요. 새로운 일을 벌이고 회사를 인수하고 할 때는 굉장히 기쁘고 즐거운데, 동일한 사업을 차분하게 경영하는 거는 굉장히 고통스러워.”
―이해될 듯하면서도 어렵네요.
“영혼이 자유로운 사람은 삶의 외형이 속박당하고 불편하고 자유가 없어도, 내면은 끝까지 자유로울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책 곳곳에 젊은이들에 대한 애정을 표현했어요. 2015년 말 두산인프라코어 신입사원 희망퇴직 논란 때 마침 상의 출입기자와의 송년모임이 있었는데 밤새 한숨도 못 자며 희망퇴직 철회 등 후속 대책을 지시했다면서 갑자기 눈물을 글썽여서 놀랐던 일이 생각나네요. 그건 책에 안 썼던데요?
“그런 얘기는 왜 해, 부끄럽게. 젊은 사람들한테 너무나 미안하고 안됐었고. 내 의지와 전혀 다르게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에 설명도 하고 항변도 해보고 싶었지만 다 소용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답답함도 있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다 풀렸어요. 해당 신입사원들 하나씩 하나씩 다 접촉해서 돌아오라고 했고요.”
―상의 회장 그만둔 뒤 ‘제2의 삶’은 백지에서 시작한다는 취지로 ‘백지명함’ 만든다고요?
“백지명함 결정하기 전에 생각을 많이 했어요. 창업을 한번 해볼까, 투자 같은 것을 해볼까, 누구한테 어드바이스를 해주는 그런 걸 해볼까? 심지어는 법과 제도의 틀에 얽매여서 힘들게 일하는 젊은이를 도와주는, 또는 그런 법과 제도에 대해서 뭔가를 좀 좋은 방향으로 갈 수 있게 도움이 되는 엔지오(NGO)를 해볼까, 또는 내가 하는 사회봉사를 조금 더 키워서 더 임팩트가 크게 해볼까. 그런데 이게 새로운 게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어요. 지금까지 내가 살아왔던 방식 그대로 놓고, 다루는 소재만 여러 가지를 늘어놨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거 자체를 다 그냥 지워버리자고 했어요.”
―하고 싶은 일의 방향은 있지 않을까요?
“이 사회에 선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일이라면 좋겠어요. 젊은이들이 긍정적으로 세상을 보고 노력해서 갈 수 있게 돕는 것도 그중의 하나고. 지나치게 대립이 있다면 완화할 수 있게 대화를 유도하는 것도 할 수 있는 일이고. 또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돕는 것도 선한 거고. 돈을 벌겠다든지, 내 목표를 이루겠다든지, 나의 이기적 목적을 위한 일은 이제 더는 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평소 어려운 사람들에게 깊은 관심을 보였잖아요. 상의 차원은 물론 개인적으로도 여러 봉사활동을 하고, 그것도 외부에 알리지 않고 조용히 하는데, 어떤 생각으로 하나요?
“내가 봉사를 시작할 때는 항상 직접 쓴 기도문을 읽어요. ‘가난한 이웃은 우리와 같은 형제입니다. (중략) 하느님께서 주신 것들을 내 형제와 나누는 것임을 깨닫게 하여주소서. 우리가 하는 일이 담장 너머로 먹을 것을 던지는 행위가 되지 않게 이끌어주소서. (중략) 우리 자신의 베풂을 자랑하기 위함이 아님을 늘 생각하게 하소서.’ 보통 자선이라고 하면 뭘 주잖아요. 헌금도 하고. 그런데 도움을 받아야 할 그늘에 있는 사람을 직접 접촉하고 그 사람들과 대화를 해보고 그 사람들의 삶에 가까이 가보지 않으면, 제대로 된 도움을 줄 수 없어요. 반드시 우리 손으로 직접 땀 흘려 일해서 봉사를 해야 한다는 것이 내 철칙이에요. 그리고 봉사는 내가 베푸는 게 아니고 우리가 가진 의무 중의 하나다. 우리 신앙에 나와 있는 얘기이긴 한데,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공동체의식 같은 것 아닐까? 그리고 봉사 조금 하고 홍보를 크게 하는 거 싫어해. 지금까지는 한번도 취재에 응해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이제는 조금 달라져야 할 거 같아. 그동안은 내가 (비용을) 충당했는데, 후원을 받을 필요가 있을 것 같아.”
―책 인세도 봉사에 쓸 계획이라던데요. 책이 많이 팔려야겠네요.
“많이 벌면 많이 벌수록 좋지. 그런데 인세가 뭐 그렇게 나오겠어요?”
―혹시 알아요? 100만부 팔리면.
“에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상의 회장을 맡은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7년8개월이 훌쩍 지나갔네요. 감회가 어떤가요.
“솔직히 시원하지도 않고 섭섭하지도 않아요. 내가 임기 내내 우리나라의 경제 앞날을 봤을 때 극복해야 할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이 법과 제도의 개혁이었거든요. 그것이 내가 원하는 만큼 되질 않아서 그다지 시원하지 않아요. 그런데도 하느님이 나한테 준 능력으로는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섭섭하지 않아요. 그리고 후임 최태원 회장이 내가 보기에 가장 적임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희망적인 생각도 있으니까.”
―재임 중 10년, 20년 앞을 내다보면서 경제 활력을 되살리고 신산업을 일으키려면 낡은 법과 제도, 규제의 혁파가 필수조건이라고 강조했죠. 그래서 2020년부터 ‘규제 샌드박스’를 활성화해 규제 혁파의 돌파구를 열었는데요.
“<포천> 500대 기업의 평균수명이 17년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지난 20년 동안 상위 기업의 랭킹이 전혀 변하지 않고 있어요. 기업계 전체의 다이내믹이 떨어진다는 얘기예요. 왜? 법과 제도를 둘러싼 환경이 그런 성장을 이끌어낼 만큼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에요. 성장하는 기업들을 담는 틀이 결국 이 사회가 제공한 법과 제도인데, 그것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에 다다른 거죠. 그런데 그게 너무나도 힘든 거예요. 그런데도 분명히 아무 문제 없이 시장에 나가도 괜찮은 사업들이 보이더라고요. 이런 것들은 일단 법과 제도의 틀을 넘어서 시장에서 한번 시도를 해보라고 허락해주고, 리스크 없이 잘 간다고 생각하면 거기에 맞춰 법과 제도를 바꾸면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생각한 게 샌드박스였어요.”
―법과 제도의 개혁과 신산업의 순서를 바꾼 거네요.
“그렇지, 그러니까 샌드박스는 단순히 벤처 회사를 돕기 위한 제도가 아니라, 견고하게 짜여서 바꾸지 못하고 이 사회를 꽉 움켜쥐고 있는 법과 제도를 무시하고 새로운 시도에 대한 가능성을 여는 첫번째 시도라고 봐야 돼요. 그게 2년, 4년이 지나서 동일한 업종의 회사들이 수십개가 성업이 되고, 거기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수만명씩 늘어나면, 우리가 기회가 있는데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증명하는 결과가 되잖아요.”
―2020년 상의 주도로 규제 샌드박스 민간접수 창구를 만든 뒤 몇개 사업이 적용을 받았나요?
“200일 정도 지났는데 80건이 넘는 허가를 받아냈어요, 거의 사흘에 한번씩 받은 거지.”
―그렇게 규제 혁파의 돌파구를 열었지만, 여전히 큰 물꼬를 바꾸지는 못했다는 평가도 있어요. 기업이 반대하는 사전적 규제를 대폭 줄이는 대신 징벌적 손해배상제나 집단소송제처럼 공정경제에 필요한 사후적 규제를 강화하는 ‘규제빅딜’을 추진하면 어떨까요?
“아이디어로서는 그럴듯한데, 현실성이 없어요.”
박용만 두산인프라코어 회장이 3월4일 오후 서울 중구 을지로 두산타워 33층 집무실에서 젊은 직원과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 벽면 가득 정리해둔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왜 그런가요?
“양쪽이 다 내가 취할 것만 생각하고 내줄 건 전혀 생각 안 하니까. 경사노위에서 그 간단한 것조차 합의가 안 되잖아요.”
―2019년 7월 일본 수출 규제 이후 국론이 분열됐을 때 ‘정부와 국회, 나아가 민과 관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차분하고 치밀하게 대처해야 한다’며 정부 중심의 단결을 강조했잖아요. 경제계에서는 정부 때문에 한-일 관계가 파탄 났다는 비판도 많았는데요.
“일본 정부는 치밀하게 오랫동안 준비했어요. 그 전해부터 각계를 다 돌며 설득을 끝냈더라고. 우리는 그 국면에 비난만 하고 있으니까 대처가 돼? 비난하고, 문제를 지적할 건 하더라도, 경제계와 정부가 똘똘 뭉쳐서 대처해야 협상력이 생기고 해결이 되지. 정부를 중심으로 기업들도 같이 동참해 협의해서 제대로 대처하자고 촉구한 거였죠.”
―경제계에서 뭐라고 하는 사람 없었나요?
“서로 비난하는 데에 나를 동참시키려고 애를 쓴 사람들이 있었어요. 전체 맥락을 보지 않고, 뜬금없이 왜 대통령 편드냐고 하길래, 일언반구 대꾸를 안 했어. 나는 해야 할 일을 지적했는데, 그걸 정치적인 초이스로 해석하면 어쩌자는 거예요.”
―그 직후 조국 사태로 여야가 정쟁에 빠져 경제 이슈 논의가 실종됐을 때 ‘경제는 버려지고 잊힌 자식 같다’고 일침을 놓았죠. 그래서 제가 ‘미스터 바른소리’라는 별명을 붙였는데요.
“그 표현 좋네요.(웃음) 일본의 수출 규제는 중장기적으로 특정 국가나 기업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은 국가 경제에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했죠. 이건 큰 물꼬를 바꿔야 하는 얘기잖아요. 그럼 연구도 하고 토론도 해야 하는데, 계속해서 단기적인 정치적 이슈에만 매몰되다 보니 일이 안되잖아. 사업하는 사람들은 정말 망연자실이죠. 법을 바꿔달라고 가면 국회는 보이콧하고 아예 국회에 안 나오고. 그럼 우린 누구한테 하소연을 하나? 언론도 똑같아. 언론도 당장 다룰 중요한 이슈가 있다 치더라도, 꾸준하게 돼야 할 일들도 취재하고 다뤄줘야 하는 거잖아. 그냥 전 언론이 똑같이 단기성 이슈에 매몰돼서, 누가 더 단독을 빨리 때리느냐 경쟁만 하고 있으니. 국가를 위한 주요 어젠다를 일관되게 다뤄주는 게 너무 부족해요.”
―언론이 갈등을 조정하기보다 오히려 조장한다는 지적이 적지 않죠.
“신문을 펼치면 맨날 국내 대립과 갈등을 다루는 주제들만 있어요. 그것이 국민의 관심을 반영한다는 측면도 있긴 하겠지만, 국민의 관심을 조금 더 폭넓게 넓혀주는 것도 언론의 사명 아닌가.”
―국가 경제를 위한 주요 어젠다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얘기하자는 거네요.
“그렇지. 젊은 친구들하고 사업 허가를 받을 수 있게 법을 바꿔달라고 국회에 갔는데, 여야 간에 이견이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럼 되겠네라고 했더니, 젊은 사업가가 ‘회장님, 여야 간에 이견이 없은 지 2년 됐습니다’라고 해. 그래서 ‘미안하다’고 했어. 법과 제도의 문제는 우리 같은 기성세대에서 만든 건데, 당신들이 미래를 향해 가려면 우리가 고쳐줘야 하는데, 미안하다, 수백번 미안하다고 했어. 정치적 상황은 이해해. 그런데 내가 젊은이한테 뭐라고 설명해야 하느냐고, 세상은 저런 거니 네가 참아라 그래야 하냐고. 내가 그냥 젊은 사람들과 같이 다니고, 법 제도에 더 매달리고, 샌드박스 하자고 한 게, 결국은 미안함이었어요, ‘너도 이다음에 나이 먹어보면 알겠지만, 이 세상이라는 게 그래. 다 원칙대로만 안 돼.’ 우리가 젊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많이 얘기하잖아요. 이제 고만하자고, 내가 봐도 옳지 않은 것을 젊은 사람들한테 세상이 그렇다고 설득하는 거 그만하자고. 아니라고 생각하면 바꿔야지.”
―젊은이들 생각하면 화가 많이 나는가 봐요.
“그렇잖아. 젊은 사람들이 앞을 향해서 나아가겠다는 변화에 대한 욕구도 있는데, 우리는 단기 이슈에 몰입돼 가지고 중장기적인 변화의 노력을 다 잠재워버리잖아요. 더 웃기는 게, 젊은이들이 나아갈 미래를 도와주겠다는 거야. 우리 기성세대의 상당수가 ‘우리가 경험도 많고, 이 사회의 오피니언을 주도하고 영향력도 있으니 젊은이들이 잘 성장할 수 있도록 우리가 뭘 좀 해주겠다’는 거야. 안 되지! 젊은이들이 이러한 법과 제도에 대해서 왜 불만을 가지는지 오늘도 이해 못 하는데 어떻게 젊은이의 미래를 만들어줘.”
―차라리 방해만 하지 말라는 뜻이네요.
“그러니깐 젊은 사람들을 보면 내가 아주 미안해 죽겠다니까. 젊은 사람들이 이렇게 마음대로 할 수 있게 해줘야지. 젊은 사람들한테 ‘내가 허락하는 것만 너희들은 해’, 법이 그렇게 돼 있어, 다. ‘내가 허락하는 것만 하고 나머지는 하지 마. 내가 겪어보니까 나머지는 하면 문제가 생겨. 하지 마. 내가 허락해주는 것만 해.’ 그러면 이거 가지고 저 사람들이 미래를 만들 수 있냐고. 못 만들지. 안 그래?”
―젊은이들을 믿고 맡기자는 거네요.
“그러니까. 이제 풀고, 자유화하고 깨면서 젊은 사람들을 믿어야 돼. 저 사람들이 만들어가겠지.”
글쓰기와 사진찍기를 좋아하는 박용만 두산인프라코어 회장이 3월4일 오후 서울 중구 을지로 두산타워 33층 집무실에서 <한겨레>와 만나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으로서 젊은 기업가들을 위한 법과 제도 개혁에 힘쓰던 일을 얘기하다가 취재기자의 모습을 사진기에 담으며 즐거워하고 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2014년 <한겨레>와 취임 1년 인터뷰 때 ‘대한상의는 회원사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은 물론 국가 경제에 어떻게 도움이 될 것인지를 항상 생각해야 한다’며 ‘대한상의 균형추론’을 강조했어요. 지금도 같은 생각인가요?
“이제 경제단체가 일하는 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거지, 목소리를 키운다고 되는 게 아니거든. 팩트와 논리를 가지고 치열하게 토론해야지, 경제단체가 세 과시로 의견을 관철하던 시대는 지났어요. 경제단체가 모여서 연명으로 사인한다고 국민이 대단하게 보겠습니까. 이제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불편한 얘기를 까놓고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상의는 법정단체이기 때문에, 사적인 이해를 대변하는 단체가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는 공적인 이해를 위해서 일을 해야 하는 단체라고요. 상공회의소법 1조에 ‘상공인들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높임으로써 국가 경제 발전에 이바지한다’고 나와 있어요. 사적인 이해를 대변하는 단체와는 좀 다르죠. 그러려면 균형감을 가져야 하죠.”
―상의처럼 법정단체가 아닌 곳은 국가 경제의 이익에 배치돼도 회원사의 이익만 대변해도 괜찮은가요?
“그건 뭐 그분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 그걸 내가 뭐라고 얘기할 수는 없지.”(다른 경제단체 얘기를 하는 것은 거북해함)
―지난해 말 상법·공정거래법 등 ‘공정경제 3법’ 개정에 경제계가 강력 반대할 때 상의는 공동행동을 하지 않았는데요.
“다른 경제단체들이 처음에 공동대응을 하자고 제안했는데 안 한다고 했어요. 그날로 다시 되돌아가도 내 행동은 바뀌지 않아요. 당시 정부는 하겠다고 하고, 경제단체는 못 하겠다고 하는데, 정작 내용은 잘 몰라. 그래서 여야에 ‘공청회를 열어 모든 의견을 다 들읍시다. 프로페셔널한 의견부터 다 들읍시다. 모두 테이블 위에 올라오고 나면 그다음에 어떤 방향으로 가야 될지를 논의합시다’라고 제안했어요. 그게 맞는 방식이라고 지금도 생각해요.”
―그렇게 해서 결국 상법의 경우 ‘감사위원 분리 선임 및 대주주 3% 의결권 제한’ 내용의 일부가 완화됐고, 중대재해처벌법도 규제 강도가 완화됐잖아요. 그것 때문에 진보진영에서는 반발도 있었고요. 상의로서는 성과를 낸 것 아닌가요?
“기업들이 원하는 것보다는 훨씬 덜 완화가 됐죠. 거의 원안에 가깝게 통과시켰어요.”
―최근 손경식 경총 회장이 ‘공정 3법과 노조법 국회 처리 때 경제단체가 무기력했다. 경제단체의 힘을 모아야 한다’면서 전경련과의 통합론을 제기했는데요.
“난 동의 안 해요. 목소리를 키우기 위해 힘을 모아야 한다? 목소리의 크기로는 안 된다니까. 그때도 경총은 목소리를 키우자는 거였고, 나는 목소리를 키우는 건 나중 얘기고 이슈를 먼저 테이블에 올려놓자고 했어요. 마치 상의는 미온적으로 대처했다는 식으로 얘기하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니에요. 경총과 전경련 통합론은 전경련에서 안 된다고 했잖아. 해프닝으로 끝난 거지.”
―최태원 신임 회장이 대기업 출신이다 보니 앞으로 상의가 대기업 의견을 상당 부분 대변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더군요.
“최 회장이 들어오시면서 대기업에 대한 대변 역할이 조금 더 강화되는 면은 자연스럽게 있을 거예요. 하지만 상의는 18만 회원의 거의 97%가 중견·중소기업이거든요. 최 회장께서 회원의 분포나 회원의 고른 이익 대변을 안 하실 수가 없을 거예요. 그게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그럴 일은 전혀 없을 테니 걱정은 안 하셔도 되고.”
―재임 기간에 ‘기업이 지속가능하려면 기업인 스스로 규범과 관행을 지키는 솔선수범을 해야 한다’고 일관되게 강조했죠. 구체적인 성과나 변화가 있다고 보는지요?
“성과가 측정 가능한 지수로 나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규범과 관행을 솔선수범해서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이제 공감대가 형성됐다고 봐요.”
―실제로 그런 인식이 행동으로 이어졌다고 보나요?
“행동으로 이어져가고 있고, 변화가 있긴 한데요. 왜 더 빨리 못 가느냐는 문제는 기업들만 탓할 일이 아니에요. 예를 들어볼까요? 기업 관련된 모든 규정에 기업 대표를 형사처벌하게끔 돼 있어, 여당에서도 이번 국회에서 가급적이면 징역형에 해당하는 건 좀 많이 바꿔야겠다고 얘기를 하거든. 까딱하면 징역 가니까 무조건 방어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잖아. 그런 것도 좀 바꿔주셔야지, 배임에 대한 얘기도 갑론을박이 많잖아요. 경영상 판단을 배임이라는 잣대로 형사처벌을 해버리니까. 그런 것도 이제 좀 바꿔서 어른 대접을 해줘야 어른답게 규범을 지키면서 자율적으로 움직이지.”
―최근 카카오 김범수, 우아한형제들 김봉진 창업자의 재산 기부 약속이 화제인데요.
“좋은 일이고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기업인들이 많이 그렇게 하면 좋죠.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지 않겠어요? 그 이유도 동시에 봐야 한다는 얘기고.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해서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거예요.”
―대기업 총수들이 부의 편법·불법 대물림과 관련해서 사회적으로 비난을 많이 받잖아요. 그 문제를 해결해야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있을 텐데, 보다 적극적인 솔선수범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 사회의 어떤 사람인들 부의 축적이 있으면 대물림하기 싫겠어요? 거의 99프로가 대물림하고 싶어 하지. 그 생각 자체를 죄악시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문제는 대물림의 대상과 방법이 중요한 거 아니겠어요? 기업에서의 부의 대물림이 부만 가는 것이 아니라 경영에 따른 권한까지 된다는 데 문제가 있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소유-경영 분리 얘기도 있고. 그렇지만 그거는 어느 하나가 옳으니 한쪽으로만 가라고 강요할 수 없는 문제예요. 그것도 역시 선택의 문제 아닐까? 우리나라처럼 대물림 자체를 너무 죄악시하고 그것을 막는 데 모든 법과 규제가 다 동원되는 상황에서는 자꾸 편법을 쓰고 싶은 욕구가 생기게 돼요. 일탈을 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하면서 규범을 왜 따르지 않냐고 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고 봐요.”
―미국에서는 재산을 자식들한테 주지 않고 대부분 사회에 기부하는 관행이 광범위하게 자리잡았잖아요. 빌 게이츠, 워런 버핏도 재산의 대부분을 재단에다 넘겼어요.
“참 답답하네. 환경이 다른 것도 감안을 해줘야지. 미국에서는 공익재단에 주식을 기부하면 자식이 운영할 수 있게끔 돼 있는데, 우리나라는 그것도 안 되잖아. 법으로 모든 걸 다 막아놨다고. 인간의 기본적인 동기가 존재하는데, 인정하지 않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 다 막아놓으면 자꾸 편법이 나올 수밖에 없잖아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논란과 비슷하네요. 이 강을 넘으려면 누군가 선제적인 노력이 필요하지 않나요. 회장님도 개인 기부로 공익재단을 만들어 봉사활동을 하는 것으로 아는데요.
“내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기업가는 그 강을 못 넘어가요. 법과 제도를 바꿔줘야지. 그러면서 자율적인 규범은 뭔가 이야기를 해야 돼요.”
‘얼리어답터’이자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대기업 시이오로 잘 알려진 그는 쉬는 날엔 혼자 골목 사진 찍으러 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사진 김춘호, 마음산책 제공
―평소 양극화 심화를 걱정하면서 재정과 사회안전망을 통한 직접적 분배 필요성을 강조했는데요. 코로나 위기 극복을 위한 재정의 적극적인 역할에 대해 일부에서는 재정 파탄이나 국가부채 급증을 이유로 강하게 반대하고 있습니다.
“내가 코로나 사태 초기 추경에 대해서 강력히 주장했잖아요. 추경 규모로 몇조원 얘기가 나왔을 때 40조는 해야 한다고 했죠. 결국 내 말대로 됐잖아요.(지난해 네차례 추경 규모는 총 67조원) 이런 국가적 재난 상태에서 어떻게 피해자들을 가만 내버려두냐고. 먹고살게 해줘야지. 그게 국가의 역할이잖아. 그게 세금 걷는 목적이잖아요. 재정건전성도 어려울 때 쓰자고 갖추는 거잖아. 문제는 홍남기 경제부총리가 재정건전성을 이유로 주저하고 걱정하잖아요. 그 걱정이 잘못된 게 아니에요. 재정을 다시 메꿀 수 있는 방안에 대해서 어느 정도 청사진이 나오고 토론이 된다면 반대하지 않겠죠.”
―결국 증세를 포함한 재정 대책 논의를 해야 하는데, 정부나 정치권은 부담스럽다며 피하고 있죠.
“정치적으로 뜨거운 감자니까. 하지만 재정 곳간을 다시 어떻게 채울 것이냐를 아무도 얘기 안 하는 상태에서 곳간을 왜 안 여냐고 몰아세우는 것은 정당하냐고요. 정치권도 그렇고 정부도 그렇고 ‘자, 그러면 이번에 급하니까 이렇게 쓰자. 그러면 어느 시기가 오면 증세를 하든지, 지출 규모를 대폭 삭감하든지 해서 모자라는 재정을 보충하는 것을 동시에 생각하자’고 얘기하면 반대할 이유가 없잖아요. 지금부터라도 이런 문제들에 대해 논의를 시작해야죠.”
―정치권에서 부자증세론을 제기하는데 어떤가요.
“그것도 방법론의 하나죠. 그거 자체에 대해 무조건 반대한다, 찬성한다고는 얘기 못 하겠어요. 왜? 디테일을 모르니까. 부자증세가 필요한 규모가 얼마며, 부자한텐 어떤 임팩트가 있고 그 효과는 뭔지, 이걸 다 얘기를 해야 이건 맞다, 이건 틀렸다고 얘기할 수 있지. 악마는 디테일에 있는데, 다 제쳐놓고 부자한테 증세할 거냐고 물으면 어떻게 답변을 해. 아무도 못 하지.”
―최근 빌 게이츠가 <빌 게이츠, 기후재앙을 피하는 법>이라는 책에서 기후재앙을 피하고 ‘탄소제로’로 가야 되는데 현재는 원전이 가장 값싸고 깨끗한 에너지라는 주장을 했어요. 이를 두고 보수와 진보 쪽이 서로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주장하며 논쟁을 벌였는데요. 원전 또는 탈원전 논란에 대한 생각은 어때요?
“나는 당연히 원전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지, 원전업자니까.”
―단지 원전업자이기 때문인가요?
“그렇죠. 하지만 그럼에도 국민이 다수결로 대통령을 뽑았고, 대통령이 자신의 정치적인 신념과 판단을 국민 앞에 제시했고, 국민이 그걸 받아들였고. 나도 국민의 한 사람인데 무조건 내 얘기만 강변할 순 없잖아요. 그래서 원전 이슈에 대해서는 관련 업체들이 급작스러운 변화에 적응하기는 너무도 힘드니 좀 도와달라는 얘기를 일관적이게 해왔죠. 원전, 탈원전에 대한 찬반을 우리가 소리 높여 얘기하지는 않았잖아요.”
―퇴임 이후와 관련해 정치권의 콜도 없었고, 정치가 맞지 않으며, 뜻도 없다고 했는데요.
“난 정치에 관심이 없어요, 하기 싫어요. 그리고 효율과 생산성, 수익성을 중시하는 기업인은 정치에 맞지 않아요.”
―선출직 아닌 임명직 제안이 온다면 ‘케이스 바이 케이스’라고 그랬잖아요. 좋다는 건가요?
“임명직이 어떤 게 있는지도 잘 모르겠어. 어쨌든 정치를 얘기한 건 아니에요. 임명직이 한두 개가 아니니까. 모든 가능성을 다 제로라고 말할 필요는 없겠죠.”
―끝으로 강조하고 싶은 말은요?
“이제 우리 사회가 좀 대립과 갈등을 넘어섰으면 좋겠어요.
대립과 갈등 이야기를 하면 나는 아닌데 저쪽에서 그러니까 이렇게 할 수밖에 없지 않냐고 얘기를 하는데, 그 상대를 비난한다고 내가 정당화되지 않아요. 정치는 경제를 못마땅해하고, 경제계는 정치를 못마땅해하고. 또 경제는 언론을 못마땅해하고, 언론은 기업을 못마땅해하고, 서로서로 다 못마땅해하잖아. 상대가 못마땅하다는 걸 지적하는 거로 더는 이뤄지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것으로는 한 발짝도 앞으로 못 나가겠다는 게 내 생각이에요. 상대방 못마땅한 것보다 내가 먼저 고칠 게 없나를 들여다보고, 이제 소통을 통해 건전한 토의를 해서 앞으로 나아갈 생각을 해야지. 대립을 통해서 이기겠다고 해서 이겨지냐고. 안 이겨지잖아.”
―경제단체들부터 회장님 말대로 노력하면 좋겠네요.
“끝없는 대립과 갈등은 건전한 토론과 소통을 못 하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큰 부작용이 있어요. 경제·사회·정치 어느 하나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어요. 다 서로가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어요. 그런데 대립과 갈등을 위한 보이스만 나오다 보면 전체를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아요. 나한테 유리한 일단면만 끊어서, 그것으로 상대를 공격하거든. 그러니깐 쇠사슬처럼 서로 얽혀 있는 것을 제대로 다루고 논의할 수가 없어요. 그러면 미래에 대한 준비를 어떻게 하냐고. 이제 대립과 갈등을 내려놓고, 우리나라, 우리 사회,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마음을 열고 얘기를 할 때가 됐어요.”
곽정수 논설위원
jskwak@hani.co.kr, 녹취 홍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