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28일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운구 차량이 서울 리움미술관 앞을 지나가고 있다. 연합뉴스
2020년 10월25일,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서울삼성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자택에서 호흡곤란과 심장마비로 쓰러진 지 6년 만이다. 한국 경제계에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던 그가 숨진 것에 많은 사람이 애도를 표했다. 삼성을 설립한 사람은 이병철 선대 회장이지만, 삼성을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시킨 사람은 이건희 회장으로 평가된다.
이건희 시대의 명암
이건희 회장이 취임한 1987년 10조원에 못 미쳤던 삼성그룹 매출은 386조원(2018년 기준)으로 40배 가까이 늘었다. 이익은 2천억원에서 72조원으로 259배, 시가총액은 1조원에서 396조원으로 396배나 증가했다. 삼성전자 시가총액은 코스피 상위 13위 기업을 모두 합친 것보다 많고, 영업이익은 시가총액 상위 18개 기업을 합친 것보다 많다. 가히 압도적이다. 삼성의 브랜드 가치는 2020년 623억달러로 글로벌 5위였다. 스마트폰, TV, 메모리 반도체 등 20개 품목에서 월드 베스트 상품에 올랐다. 삼성은 대한민국 성장을 이끌어온 기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성은 놀라운 성장만큼이나 정경유착과 불투명한 경영으로 한국 재벌의 어두운 면을 자주 보여준 기업이다. 1995년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을 수사할 때, 이건희 회장은 대검 중앙수사부의 조사를 받았다. 2003년 대선자금 수사, 2005년 국가안전기획부 X파일 도청 사건 수사 때도 수사 선상에 올랐다. 여러 차례 소환 위기를 넘긴 이건희 회장은 2008년 김용철 전 삼성그룹 법무팀장의 폭로로 시작된 삼성 비자금 특별검사 수사로 최대 위기를 맞았고, 경영권을 내려놓고 2선으로 물러났다. 가장 존경받는 기업인 1위, 가장 취업하고 싶은 기업 1위의 영예와 함께 재벌 개혁의 첫 번째 대상으로 꼽히는 기업인, 기업. 이건희, 삼성의 명암이다.
상속세와 그룹 지배
삼성그룹 지배구조와 관련해, 막대한 상속세 재원에 세간의 관심이 쏠렸다. 이건희 회장은 국내 주식 부자 1위다. 삼성전자 2억4927만 주를 비롯해 이 회장이 보유한 주식 평가액은 모두 18조2251억원이다. 20억원 넘는 증여액에 부과되는 최고세율 50%, 최대주주에게 적용되는 주식평가액 20% 할증을 고려하면 세금만 10조6천억원에 이른다. 정확한 액수는 2020년 12월쯤 확정될 전망이다. 삼성 총수 일가가 내야 할 상속세는 유사 이래 최대 금액이 될 것이다.
한국 대기업 집단에서 총수 일가의 사익 편취나 편법 증여가 일어났던 것은 대부분 경영권 승계와 관련 있다. 자식이 아버지 지분을 상속받으려면 그 절반에 해당하는 돈을 상속세로 내야 한다. 지분율이 반으로 줄어드는 것이다. 상속세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자식 명의의 계열사를 만들어 일감 몰아주기를 하거나, 회사 분할과 합병 등으로 회사 자산을 편취해 자식에게 넘겨주는 ‘은밀한 거래’가 지속됐다. 불법과 합법의 경계선에서 회사 자산을 개인에게 이전하는 작업이 끊이지 않았다.
불법과 합법의 경계선을 넘나든 삼성그룹이 그 대명사다. 삼성 방식이 고스란히 다른 기업들 승계에 이용되기도 했다. 이재용 부회장은 1995년 이건희 회장에게서 60억8천만원을 증여받았다. 이 자금은 삼성엔지니어링, 삼성에버랜드, 삼성SDS 등 계열사 주식을 매입하는 데 쓰였다. 삼성SDS는 삼성그룹 계열사의 정보기술(IT) 일감을 받아 성장했고, 이후 이재용 부회장의 그룹 승계를 위한 재원이 됐다.
1996년 삼성에버랜드는 낮은 가격에 전환사채를 발행해 이재용 부회장을 비롯한 이건희 회장 자녀에게 배정했다. 이후 삼성에버랜드는 제일모직과 합쳐 제일모직이 되고, 제일모직은 삼성물산과 합쳐 그룹 지배회사인 삼성물산으로 탈바꿈했다. 이재용 부회장은 이 복잡한 과정을 거쳐 삼성물산의 지분 약 17%를 확보한 최대주주가 됐다. 지분 구조를 볼 때 막대한 상속세를 내더라도 이 부회장 지배력이 흔들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지배력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제기된 수많은 불법·편법 의혹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이재용 운명 가를 두 재판
이재용 부회장은 두 건의 재판을 받고 있다. 먼저 ‘국정농단’ 사건이다. 이 부회장은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삼성그룹 경영권 승계를 도와달라고 청탁하고 298억원 뇌물을 제공한 혐의로 2017년 2월 기소됐다. 1심은 일부 혐의를 유죄로 인정해 징역 5년의 실형을 선고했고, 이 부회장은 구속됐다. 2심이 대부분을 무죄로 판단해 징역 2년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해 그는 풀려났다. 대법원은 2심에서 무죄로 판단한 승마 지원과 후원금을 ‘뇌물로 봐야 한다’며 서울고법으로 사건을 돌려보냈다. 이르면 2020년 안에, 늦어도 2021년 초에는 결론이 날 전망이다.
두 번째 재판은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의혹에 관한 것이다. 이 또한 그룹 경영권과 직결된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과 관련 있다. 의혹 핵심은 제일모직 가치를 높이기 위해 제일모직 자회사인 삼성바이오로직스의 기업 가치를 분식회계로 부풀렸다는 것이다.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 과정에서 제일모직 가치가 높으면 제일모직 지분을 많이 가진 이 부회장에게 당연히 유리하다.
검찰은 2020년 9월 이 부회장을 비롯해 삼성그룹 경영진을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시세조종 등의 혐의로 기소했다. 국정농단 재판에서 삼성 쪽이 유리한 판결을 받더라도 이제 시작 단계인 두 번째 재판은 한동안 삼성그룹과 이 부회장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2020년 11월9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서울고법에서 열린 ‘국정농단’ 사건 파기환송심 재판에 출석한 뒤 법정을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지배구조의 마지막 고리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은 대부분 마무리됐다. 2018년 삼성SDI와 삼성전기, 삼성화재가 보유하던 삼성물산 지분을 모두 매각해 삼성그룹의 순환출자는 해소됐다. 삼성그룹에서 현행법에 저촉되는 지배구조는 없다. 문제는 삼성생명이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이다. 보험업법에 따르면, 보험사는 총자산 3%까지만 계열사 주식을 보유할 수 있다. 삼성생명 장부에 기록된 삼성전자 지분의 가치는 5400억원으로 삼성생명 총자산의 0.1%에 불과하다. 하지만 보험 고객들의 보험금으로 지배구조를 유지하는 방식에 대한 문제는 끊임없이 제기됐다.
이와 함께 더불어민주당 박용진·이용우 의원은 보험사가 보유한 주식의 가치를 취득원가가 아닌 시장가격으로 반영하는 보험업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삼성생명이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을 시장가격으로 계산하면 약 30조원에 이른다. 삼성생명 총자산의 10% 수준이다. 법이 통과되면 보유 지분의 3분의 2, 약 20조원 규모의 삼성전자 주식을 매각해야 한다. 삼성화재도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 시장가격 5조2500억원어치의 삼성전자 주식 가운데 3조2500억원어치를 팔아야 한다. 삼성그룹 심장과도 같은 삼성전자 지분 23조원을 내놓아야 하는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갈지는 삼성그룹에 놓인 또 하나의 과제다.
삼성전자의 미래
이건희 회장 사후 삼성그룹 미래를 조망하며 언론들은 주로 상속과 지배구조 개편에 초점을 맞췄다. 하지만 삼성그룹과 삼성전자의 미래는 이재용 부회장의 거취뿐 아니라 치열한 글로벌 경쟁과도 직결된다. 글로벌 반도체 업계에선 영원할 것만 같던 인텔의 아성이 무너지는 조짐이 보이자, 수십조원 단위의 빅딜이 수시로 일어나고 있다. 그래픽처리장치(GPU)의 최강자인 엔비디아는 GPU를 넘어 인공지능(AI)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중앙처리장치(CPU) 설계의 최강자 ARM을 47조원에 인수하기로 했다. 인텔에 이어 영원한 이인자였던 AMD는 인텔 자리를 넘보며 반도체 소자 FPGA를 전문으로 하는 자일링스를 39조원에 사들였다.
SK하이닉스는 인텔의 낸드 사업부를 10조원에 인수했고, 이에 질세라 낸드 부문 2위 업체인 키옥시아는 11조원 규모의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삼성전자가 메모리 반도체에 이어 로직 반도체 위탁생산(파운드리) 시장에 진출하자 전통의 강자인 대만 TSMC는 삼성의 추격을 뿌리치기 위해 20조원을 추가 투자하기로 했다.
애플은 14년 만에 인텔에 결별을 선언하고, 자체 설계한 CPU를 아이폰·아이패드·컴퓨터 등 모든 장비에 탑재해 애플만의 생태계를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스마트폰, 메모리, 팹리스, 파운드리 등 모든 분야에서 세계시장을 둘러싼 무한경쟁이 날마다 벌어지고 있다. 안에는 걱정이 많고 밖에는 환난이 많은 ‘내우외환’(內憂外患). 이건희 회장 사후 리더십을 굳건히 해야 하는 삼성을 설명하는 사자성어다.
권순우 <머니투데이방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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