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마이클 크레이머 미국 시카고대 교수가 같은 해 12월7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스톡홀름/AP 연합뉴스
마이클 크레이머 시카고대 교수는 미국의 발전경제학자이다. 저개발국의 빈곤 해소 및 교육 관련 정책실험을 통해 정책효과를 검증하는 연구로 주목을 받았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2019년 노벨 경제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크레이머 교수는 다음달 2~3일 한겨레신문사가 주최하는 제11회 아시아미래포럼 첫날 ‘팬데믹 이후, 빈곤 퇴치를 위한 사회실험’을 주제로 기조강연을 한다. 그는 지난 18일 이뤄진 화상 인터뷰에서 “경기도 등 한국의 지방자치단체들이 추진하는 기본소득 정책실험을 지지한다”며 “정부 역할이 확장되는 요즘 같은 시기에는 확대된 재정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더 중요해지므로, 정책을 소규모로 시행하면서 실험을 통해 효과를 검증해가며 확대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정책실험 연구로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다. 정책실험이 왜 중요한가?
“스타트업에서 상품을 개발할 때는 여러 시제품을 만들어 ‘에이비(A/B) 테스트’를 먼저 한 뒤, 반응이 좋은 쪽을 대량 생산하는 게 보통이다. 정책에도 이런 테스트가 필요하다. 과거처럼 정책을 결정한 뒤 모두에게 바로 시행하는 방식이 아니라, 소규모로 시행하면서 과학적으로 평가한 뒤 조금씩 변화시키면서 확대하는 게 시대에 맞는 정책 개발 방식이다. 혁신적 정책은 일단 시행한 뒤 계속 새로운 방식을 찾아 나가면서 나온다.”
―국민이 원하는 정책은 바로 시행해야 하는 것 아닌가?
“국민들은 정책목표를 정부가 달성해주기를 원한다. 하지만 목표 달성 방법은 정부가 찾을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국제 표준 시험점수를 높이려는 목표를 갖고 있다고 해보자. 국민들이 점수를 높이자는 공동의 목표를 가질 수는 있지만, 이를 달성하는 가장 좋은 교육방법이 뭔지는 확실하게 알기 어렵다. 이런 경우 효과를 입증하기 위한 정책실험이 필요하다.”
―케냐에서 학생들의 교육 수준을 높이는 데 필요한 정책을 실험 방법을 통해 연구해서 큰 영향을 끼쳤는데.
“1990년대에 케냐에서 구충 프로그램의 교육 효과를 평가하는 연구를 했다. 아프리카 개발도상국 중 상당수가 낮은 교육 수준을 높이려 하는데, 결석률이 높아 쉽지 않다. 그래서 엔지오들은 교과서를 제공하는 사업을 펼치고 있었지만 효과가 크지 않았다. 그런데 구충 프로그램이 실시된 한 학교에서 교육적 영향을 평가했더니 결석이 4분의 1 정도 준 것으로 나타났다. 기생충 감염으로 학교에 못 나오는 학생들이 그만큼 많았던 것이다. 또한 사업 대상자뿐 아니라 주변 학교 학생들에게까지 영향을 끼쳤다. 전염이 줄었기 때문이다.”
―구충 사업에 들어간 예산과 비교해도 효과가 컸나?
“그 뒤 20여년 동안 지켜봤다. 장기적으로 보니 여학생들은 중등교육에 진학하는 비율이 높아졌다. 게다가 전체 학생들의 미래 소득도 높아졌다. 학생들의 미래 소득 증가분은 구충 프로그램 비용의 100배나 됐다. 사실 이로 인해 정부가 추가로 거둘 세금만 계산해도 프로그램 비용보다 컸다. 실험을 통해 구충 사업의 효과가 입증되자, 케냐는 중앙정부 차원에서 구충 프로그램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이후 인도와 아프리카의 다양한 나라에서 이 사업을 받아들였다. 결과적으로 전세계 1억5천만명의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구충 사업이 진행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에서 해볼 만한 정책실험이 있을까?
“한국은 소득 수준에 견줘 주관적 행복도가 많이 떨어지고 자살률이 높다고 알고 있다. 또한 성역할과 관련된 갈등이 크다고 들었다. 이런 모든 주제에서 정책실험을 해볼 수 있다. 성역할과 관련한 갈등을 예로 들어보자.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율에 대한 흥미로운 연구가 시카고대에서 있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많은 남성들이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에 대해 허용적이었다. 그렇지만 사우디아라비아 남성들은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에 대해 다른 남성들은 반대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경우 서로 어떤 생각을 하는지 내용만 알 수 있어도 문제 해결에 근접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기본소득 실험을 하겠다는 지방자치단체가 나오고 있다. 경기도에서는 농촌기본소득 사회실험을 준비 중이다. 서울 서초구는 청년기본소득 실험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보편적 기본소득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서로 다른 가정을 하고 전혀 다른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기본소득 지급 뒤 사람들이 게을러진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더 많이 일하게 된다고 보고, 어떤 이들은 기업가 정신을 발휘할 것이라고까지 한다. 이렇게 이견이 많은 경우 정책실험과 과학적 평가는 매우 유용하다. 실험을 통해 확보한 데이터가 기본소득 도입 때 실제로 벌어질 일을 내다보게 해주고 정책 설계를 도울 것이다. 따라서 도나 구 단위 등 작은 규모의 정책실험을 강력하게 지지한다.”
―이런 기본소득 정책실험을 할 때 주의할 점이 있나?
“사회적 맥락에 따라 효과가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농촌이나 청년을 대상으로 시행한 정책에서 나타난 효과가 다른 대상에게는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따라서 다양한 형태의 실험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다양하게 연구하고 논의하면서, 제도의 내용을 고쳐 나가며 시행할 필요가 있다.”
―정책실험은 정부 정책의 효과를 높여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데 초점을 둔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아직 많은 사람들이 소득격차 등은 시장에서 개인이 노력해서 풀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회과학이 윤리적, 철학적 질문에 완전히 답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미 입증된 근거를 논의할 수는 있다. 이 근거를 통해 올바른 윤리적, 철학적 답을 하도록 도울 수 있다. 예컨대 어떤 사람들은 특정한 개인적 특성이 판단을 그르치고, 그 개인이 가난해지는 원인이라고 본다. 여기에 대한 중요한 연구가 있다. 사탕수수 농부들이 추수 이전과 이후 어떤 판단을 내리는지를 평가한 것이다. 그들은 추수 이후 더 나은 의사결정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추수 이전 가난의 스트레스에 시달릴 때보다 추수로 자원을 확보해 여유가 생겼을 때 판단력이 높아지더라는 것이다. 같은 사람이라도 경제 상황에 따라 합리성이 달라진다는 이야기였다. 이런 근거를 바탕으로 올바른 정책 결정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코로나19 이후 전세계 정부가 재정을 확장하면서 큰 정부의 시대가 오고 있다. 이렇게 돈이 흔해진 시대에도 정책실험이 가치를 지닐 수 있나?
“정부 지출이 늘어나는 시대에 가치가 더 높아진다. 지출이 확장되면서 낭비 가능성도 커진다. 새로운 정책이 많이 나오는데, 그 효과를 아직 모르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럴 때야말로 실험 연구를 통해 효과를 미리 추정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원재 랩(LAB)2050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