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텔이 기술 개발에서부터 표준 설정과 상품화 및 기술개발 로드맵을 제시하며 독점에 가까운 지배력을 행사하던 반도체 산업의 지형이 크게 달라졌다. 종합반도체기업으로서 인텔이 누려온 지배력은 두 측면에서 흔들리고 있다.
우선 반도체 기술이 고도화하고 초미세공정으로 진입함에 따라, 반도체산업은 설계 전문기업(팹리스)과 제조 전문기업(파운드리)으로 분화하는 현상이 강화하고 있는 점이다. 종합반도체기업 인텔의 위상과 지배력이 흔들리는 산업적 배경이다. 인텔의 지위가 흔들리고 있는 또다른 측면은 급부상하고 있는 도전자들의 혁신과 성장에 의해서다. 컴퓨터의 두뇌이자 심장인 ‘중앙처리장치’(CPU) 설계와 생산에서 인텔이 누려오던 초우월적 지위가 경쟁자들에 의해서 위협받고 있는 현실이다. 엔비디아와 에이엠디(AMD)의 급성장은 인텔을 반도체산업의 절대강자 지위에서 끌어내리고 있다.
인텔은 지난 7월 올 2분기 실적발표회에서 차세대 컴퓨터칩(7나노칩)의 차질과 위탁생산을 언급한 이후 주가가 16년 만의 최저치로 폭락했다. 반면 에이엠디는 지난해 7나노 CPU 칩 출시에 이어 5나노 제품을 준비하는 등 미세공정에서 인텔을 앞서고 있다. 에이엠디의 올 1분기 PC CPU 점유율(17%)은 5년 전에 비해 2배 이상 커졌다.
최근 인텔의 2분기 실적 발표 이전인 지난 7월8일 엔비디아는 이미 인텔의 시가총액을 추월하며 미국 최고 가치의 반도체기업으로 올라섰다. 이후 두 기업간 시장가치 차이는 계속 벌어지고 있다. 지난해 인텔 매출액은 719억달러로, 109억달러를 기록한 엔비디아의 7배에 이른다. 하지만 2020년 9월 중순 현재 엔비디아의 시가총액(3198억달러)은 인텔(2145억달러)의 1.5배 수준이다. 미래 가치와 기대를 반영한 주식시장의 평가다.
지난 1년간(2019.9.30~2020.9.28) 인텔, 엔비디아, AMD의 주가 변동 그래프. 보라색이 엔비디아, 파란색이 AMD, 노란색이 인텔이다.
지난 1년간 인텔, 엔비디아, AMD의 주가 추이 그래프는 반도체 CPU 부문에서 진행되어온 경쟁의 결과를 한눈에 보여준다. 횡보하다 하락하고 있는 인텔의 그래프와 대조되는 엔비디아와 AMD의 지속성장 상승곡선을 확인할 수 있다.(그림 참조)
반도체산업의 후발주자 엔비디아와 AMD가 인텔을 위협하고 능가하는 지위에 올라서게 된 결정적 동력은 두 기업을 이끄는 경영자에게서 나왔다. 엔비디아의 공동창업자이자 최고경영자인 젠슨 황(57), AMD의 최고경영자 리사 수(50)가 그 주인공이다. 두 사람은 인텔에 맞서는 반도체기업을 이끄는 50대 경영자라는 점 말고도 여러 공통점이 있다. 대만에서 학자 부모 아래에서 태어나 부모와 함께 어릴 적에 미국으로 건너간 이민 2세대다. 각각 스탠퍼드 대학과 MIT에서 석사와 박사를 취득하고 반도체산업에 뛰어들었고, 기술을 기반으로 반도체산업의 혁신을 이끌며 새로운 경쟁을 주도하고 있다는 점 등을 공유한다.
엔비디아의 젠슨 황
2017년 미국의 경제지 <포천>은 인공지능시대에 주목받고 있는 엔비디아의 최고경영자 젠슨 황을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포천> 제공.
젠슨 황은 스탠퍼드 대학 졸업 이후 AMD에서 반도체 칩 설계자로 일하다가 30살인 1993년 엔비디아를 창업했다. 그래픽 등 멀티미디어 구현에 뛰어난 컴퓨터 칩 개발에 본격 뛰어든 것이다. 당시 컴퓨터 칩은 인텔 천하였고, 인텔은 X86(286,386, 486, 펜티엄 등)으로 CPU 시장을 지배하고 있었다. 젠슨 황은 CPU의 순차적 처리 기능과 차별화되는 병렬처리 기능이 뛰어난 고성능 그래픽 칩 GPU(graphic processor unit) 개발에 주력해 큰 성공을 거뒀다. GPU는 말 그대로 그래픽과 동영상 처리기능이 탁월해 게임과 영상구현용 등에서 주로 활용되는 그래픽전용칩이다. 젠슨 황은 GPU의 탁월한 병렬처리기능을 영상 구현만이 아니라 컴퓨터의 범용기능으로 확대하고자 시도했고, 이는 근래의 자율주행차와 인공지능 환경에서 엔비디아 GPU를 최고의 선택지로 만들었다. 영상 그래픽 픽셀 구현에서 병렬처리 기능이 핵심인 것처럼, 단순한 연산을 방대한 규모로 부단히 원활하게 진행해야 하는 자율주행차와 인공지능(AI)에서 엔비디아 GPU는 탁월한 성능을 구현했다.
엔비디아는 위기를 맞기도 했다. 2008년 금융위기 시기 고사양 그래픽칩에 대한 선호가 줄어들면서 매출이 41억달러에서 34억달러로 급감했다. 위기를 맞아 젠슨 황은 2009년 자신의 연봉을 1달러로 책정하며 연구개발 역량을 키웠고 2011년부터 반등에 성공했다. 이후 정보기술업계에 자율주행차와 인공지능이 화두가 되면서, 엔비디아의 고속질주에 시동이 걸렸다.
엔비디아는 단지 시장가치에서 인텔을 추월했을 뿐 아니라, 반도체산업의 지형도에 영향을 끼치는 역할까지 맡고 있다. 미국 경제지 <월스트리트저널>(WSJ)은 9월19일 “젠슨 황이 제시한 반도체 발달 로드맵이 50여년 전 인텔이 주창한 무어의 법칙을 대체하고 있다”며 ‘황의 법칙(Huang's Law)’을 소개했다. ‘황의 법칙’은 반도체의 칩 성능이 집적도가 아닌 인공지능 처리 능력에 달려 있다는 주장이다. 엔비디아의 칩 성능이 2012년 11월부터 올해 5월까지 연평균 두 배씩 개선돼 왔다는 것을 토대로 제시한, 인공지능 처리능력 위주의 ‘반도체 기술발달 로드맵’인 셈이다. 2000년대 초반 삼성전자의 황창규 사장이 무어의 법칙보다 빠른 속도로 삼성전자가 칩 개발을 했다며 주창한 `황의 법칙(Hwang's Law)'과는 구별된다.
AMD의 리사 수
AMD(Advanced Micro Devices)는 인텔 창립 1년 뒤인 1969년 페어차일드반도체 출신 엔지니어들에 의해 미국 실리콘밸리에 설립된 CPU 전문 반도체기업이다. 당시만 해도 인텔의 실질적 경쟁자는 못됐다. 오늘날 AMD의 성장과 성공은 리사 수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2007년 당시 PC용 CPU 시장에서 AMD 점유율은 22.7%로 인텔(77.1%)에 견줘 한참 뒤지지만, 탄탄한 기반을 갖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2011년 이후 잇단 제품 개발 실패로 점유율이 한자리 수대로 떨어지고 주가는 10분의 1(2달러)로 폭락하며 존폐가 거론되는 위기를 맞는다. 2011년 리사 수가 해외사업담당 부사장으로 AMD에 합류하면서, 변화가 시작됐다.
리사 수는 AMD에 합류하기 이전에 반도체 기술 연구와 개발에서 탁월한 업적을 내온 인물이다. 산업계에서 광범한 존경을 받으며 최고경영자임에도 ‘리사 수 박사’로 불린다. 리사 수가 MIT 박사학위 논문에서 제시한 칩내에 절연막층을 통해 반도체 성능을 높이는 방법은 나중에 업계에 채택돼 산업 발전으로 이어졌다. 리사 수는 반도체기업인 텍사스 인스트루먼트(TI)를 거쳐 1998년 IBM의 반도체 연구개발에 합류했다. 당시 그가 반도체의 알루미늄 배선을 구리 배선으로 교체해 효율을 높인 개발 방식은 이후 반도체 제작의 표준기술로 확립됐다. 리사 수는 탁월한 연구개발 능력을 바탕으로 2013년 AMD를 5분기 만에 흑자로 전환시키고, 2014년 최고경영자의 자리에 올라 본격적인 AMD의 성장시대를 열었다. 인텔 프로세서의 성능을 능가하는 AMD의 제품들이 나오고, 미세공정에서도 인텔을 추월하기 시작했다. 2019년 한 해 동안 주가가 150% 치솟았다. 그해 ‘S&P’ 500개 종목 중 최고실적을 거둔 기업이 AMD다.
리사 수는 여성경영인으로, 아시아 이민자 출신으로, 학자출신 경영자로 실리콘밸리에서 각별한 조명을 받는 인물이다. 리사 수는 2019년 S&P 500대 기업중 최고의 보수를 받는 경영자가 됐다. 에이피(AP)통신에 따르면, 지난해 리사 수는 급여와 성과보수, 주식지급 등을 포함해 5850만달러(약 700억원)를 받았다. 리사 수는 지난 9월15일 반도체산업협회(SIA)가 수여하는 최고 영예인 노이스상 2020년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구본권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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