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반세기 동안 세계 반도체 산업의 발달 속도를 설명해온 ‘무어의 법칙’이 미세 공정 기술의 한계에 이르며 빛바랜 상황에서 인공지능(AI)의 연산 능력을 잣대로 칩의 성능 발전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는 ‘황의 법칙’이 부상하고 있다. 황의 법칙이 세계 반도체 산업의 신흥 강자 엔디비아에서 주창된 점도 눈길을 끈다. 이 법칙은 10여년 전 삼성전자 당시 황창규 사장이 무어의 법칙을 개량해 주창한 황의 법칙과는 다르다.
미 경제 매체 <월스트리트저널(WSJ)>은 19일(현지시각) “엔비디아 창업자인 잰슨 황이 제시한 반도체 발달 로드맵이 50여년 전 인텔이 주창한 무어의 법칙을 대체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황의 법칙은 칩 성능은 반도체 집적도가 아닌 인공지능의 처리 능력이 좌우하고 있으며, 성능의 발전 속도가 매년 두 배씩 증가한다는 게 뼈대다. 실제 엔비디아의 칩 성능은 2012년 11월부터 올해 5월까지 연평균 두 배씩 개선돼 왔다. 무어의 법칙은 인텔의 공동창업자 고든 무어가 1965년에 “반도체 칩의 트랜지스터 집적도는 약 24개월마다 2배씩 증가한다”고 주장한 이론으로, 60년대 이후 실제 세계 반도체 칩 집적도는 무어의 전망과 엇비슷하게 향상돼 왔다.
황의 법칙이 주목을 받는 이유는 우선 무어의 법칙이 한계에 이르면서 오늘날 반도체 산업의 발달 속도를 온전히 설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칩 집적도를 높이는 미세공정 기술이 2~3나노미터(1㎚=10억분의 1m) 수준의 초미세 영역까지 진입하면서 추가 개선이 물리적으로 어려워졌다. 2016년 2월 영국의 학술지 <네이처>는 반도체 업계가 무어의 법칙을 공식으로 폐기하고 새로운 로드맵을 제시할 것이라고 보도한 바 있다. 엔비디아의 젠슨 황도 지난해 1월 미국 가전박람회(CES) 기조연설에서 “무어의 법칙은 더이상 가능하지 않다”고 말한 바 있다.
두번째 이유는 칩 성능에 집적도보다는 인공지능의 고도화가 더 큰 영향을 미치는 현실에서 찾을 수 있다. 엔비디아가 주력해온 그래픽칩(GPU)은 이미지 픽셀 구현처럼 동시에 처리되어야 하는 병렬수행 작업에 적합해 그동안 주로 게임용 고성능 그래픽 구현 등에 활용되어왔다. 엔비디아의 뛰어난 병렬처리 능력은 자율주행 차량의 정보처리와 인공지능의 이미지 인식 등에서 쓰임새가 주목받으며 사용처가 늘고 있다. 수많은 연산이 순간적으로 매끄럽게 처리돼야 하는 인공지능과 사물인터넷 환경에서 병렬처리 능력이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다는 뜻이다. 엔비디아가 최근 영국의 아이티(IT) 기업 암(ARM)을 사들이기로 한 이유도 인공지능과 사물인터넷 환경에서 시너지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시장은 이미 황의 법칙의 판정승을 노래하고 있다. 지난 7월8일 뉴욕 증권시장에서 엔비디아는 인텔의 시가총액을 추월하며 미국 최고 가치의 반도체기업으로 올라섰다. 이는 엔비디아가 코로나19로 인한 서버 수요 폭증으로 호실적을 이어간 반면, 인텔이 7나노 차세대칩 양산에 실패하는 등 두 회사가 대조적인 모습을 보인 데 따른 것이다. 업계에선 향후 반도체 발달 가늠자는 인텔이 아닌 엔비디아에서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마저 나오는 실정이다.
물론 승부가 끝난 것은 아니다. 칩의 집적도를 기준으로 한 무어의 법칙에 비해 황의 법칙은 인공지능 처리 능력이라는 기준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의 병렬처리 능력 발달의 중요성이 커진 것은 사실이지만 칩의 집적도가 좌우하는 중앙처리장치의 능력도 여전히 칩 성능의 관건이다. 엔비디아의 빌 달리 부사장도 중앙처리장치가 개선되지 않으면 병렬처리 결과도 충분히 소화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도 했다.
구본권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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