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서울시 중구 커뮤니티하우스 마실에서 열린 ‘공공부문의 사회적 가치 실현을 위한 2020 사회적 가치 포럼’에서 패널 토론이 진행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사회적 경제의 정체성은 ‘사회적 가치’에 있다. 재무적 성과(이윤)에 집중하는 일반 기업과 달리, 사회적 경제 기업들은 경제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를 동시에 추구한다. 국가별로 사회적 경제의 정의가 약간씩 다르지만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경제활동’이라는 고갱이는 변하지 않는다. ‘사회적 가치’라는 개념 또한 포괄적이지만, 대체로 ‘어떤 사회의 구성원들이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가치’ 정도로 받아들여진다. 이런 점에 비춰보면, 사회적 가치는 사회적 경제의 본질적인 요소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경제를 뛰어넘는 개념이다. 요컨대 사회적 가치는 사회적 경제 영역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가 추구해야 할 규범이라 할 수 있다.
‘공공기관의 사회적 가치 실현에 관한 기본법’(사회적 가치법)은 이런 문제의식의 결과물이다. 이 법안을 처음으로 국회에 제출한 사람은 다름 아닌 문재인 대통령이다. 문 대통령은 19대 국회의원 시절이던 2014년 6월 이 법안을 대표발의했다. 당시 법안 제안 이유에는 다음과 같은 표현이 들어 있다.
“인권, 노동권, 안전, 생태, 사회적 약자 배려, 양질의 일자리,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등 공공의 이익과 공동체 발전에 기여하는 사회적 가치가 경제 운영 원리의 중요한 축으로 자리매김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음. (중략) 이 법의 제정으로 사회적 가치를 우리 사회의 중요한 운영 원리로 설정함으로써 이윤과 효율만이 아니라 사람의 가치, 공동체의 가치를 중시하고 협동과 상생이 실현되는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임.”
그런데 왜 공공기관일까? 당시 법안 발의 과정을 잘 아는 사회적 경제 쪽의 한 전문가는 “2013년부터 문재인 의원실을 중심으로 민간 전문가들이 참여해 법안 준비 작업을 시작했는데, 그 과정에서 정부를 포함한 공공기관의 존재 이유가 공공성 실현이므로 사회적 가치를 가장 앞장서서 추구해야 할 주체도 공공기관이 돼야 한다고 의견이 모아졌다”고 전했다. 2012년 영국에서 공공서비스법(사회적 가치법)이 제정된 것도 영향을 줬다고 한다. 이 법은 공공기관이 위탁이나 조달을 할 때 사회적 가치를 고려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사회적 가치법은 상임위원회(기획재정위)에서 제대로 논의조차 되지 못한 채 19대 국회 임기가 끝나면서 자동으로 폐기됐다. 20대 국회 들어서도 더불어민주당 김경수 의원과 박광온 의원이 법안을 발의했으나 역시 국회 임기 종료와 함께 폐기됐다. 21대 국회가 출범하면서 박광온 의원이 다시 같은 법안을 발의해 현재 기재위에 계류돼 있다.
■ 사회적 가치법, 어떤 내용 담고 있나
사회적 가치법의 핵심은 공공기관이 정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가치를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조달 및 계약 등의 업무를 수행할 때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 민간부문을 우대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여기에서 ‘공공기관’은 중앙행정기관,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른 공공기관 등 모든 공공부문을 뜻한다. 이 법은 사회적 가치를 ‘사회·경제·환경·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공공의 이익과 공동체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가치’라고 규정한다. 세부 항목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하는 기본권리로서 인권의 보호 △사회적 약자에 대한 기회 제공과 사회통합 △지역사회 활성화와 공동체 복원 등 13개를 예시해 놓았다. 또 공공기관의 체계적인 사회적 가치 실현을 위해 △5년 단위의 ‘사회적 가치 실현에 관한 기본계획’ 수립 △대통령 소속 사회적가치위원회 설치 △연도별 사회적 가치 성과 평가 △사회적 가치의 민간 확산 지원 등의 규정을 두고 있다.
아직 국회의 벽을 넘지는 못했지만,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 법안이 규정한 사회적 가치의 정의는 이미 정책 현장에서 적잖이 활용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사회적 가치를 선도하는 공공기관’을 국정과제의 하나로 채택하고 ‘사회적 가치 중심 정부’를 천명하는 등 정부 출범 초기부터 사회적 가치를 국정 운영의 주요 기조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행정안전부가 2018년 3월 발표한 ‘정부혁신 종합 추진계획’과 기획재정부가 올해 1월 발표한 ‘사회적 가치 실현을 위한 공공부문의 추진전략’을 보면 사회적 가치의 의미 부분에서 사회적 가치법의 관련 규정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이 법안을 두고 일부에서 사회적 가치의 정의가 추상적이고 모호하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실제 적용 과정에서 혼선이 생길 수 있다는 우려다. 이에 대해 사회혁신기업 ‘더함’의 대표인 양동수 변호사는 “물론 현재 법안에 제시된 13개 항목이 지금 우리 사회에서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가치인지에 대해서는 논의가 필요하다”면서도 “사회적 가치법에 규정된 내용은 헌법적 가치에 기반해 공공부문이 추구해야 할 것들을 추려 놓은 것으로 보인다. 추상적인 가치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현할지는 공공부문의 책무에 속한다”고 짚었다.
■ 사회적 가치법의 의미와 효과는?
사회적 가치법은 공공부문의 혁신을 겨냥한 법이다. 모든 공공기관이 정책의 수립과 집행, 평가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에서 사회적 가치를 우선적으로 고려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는 ‘경제적 효율성’에서 ‘공공성’으로 공공기관 운영의 패러다임을 전환하자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사회적 가치법은 우리 사회의 운전대를 꺾는 법”이라는 김영식 ‘전국사회연대경제 지방정부협의회’ 사무국장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꽤 오랫동안 우리 사회는 모든 분야에서 돈의 논리가 지배했다. 이제 핸들을 반대 방향으로 꺾어야 한다”고 말했다. 돈이 아닌 사람 중심의 사회로 방향을 틀기 위해 공공부문이 선도적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얘기다.
공공기관은 정부의 정책을 실행하는 주체이자 시장의 ‘큰손’이기도 하다.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사회적 가치 확산에 공공부문이 중요한 이유다. 사회적 가치법을 대표발의한 박광온 의원은 “공공기관이 수행하는 조달, 개발, 위탁, 민간 지원 사업 등에서 비용 절감이나 효율성보다는 사회적 가치를 고려하도록 공공기관 평가에 반영한다면 약 160조원의 공공조달 시장을 비롯해 사회·경제 전반의 공공성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을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양동수 변호사도 “공공부문이 먼저 바뀌면 민간기업들도 그 방향에 맞춰 사회적 가치에 대해 고민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사회적 가치 실현은 민간기업에도 필요한 일이다. 유럽과 국제기구를 중심으로 사회적 가치가 국제규범으로 자리잡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유엔의 지속가능발전목표(SDGs), 국제표준화기구(ISO)의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국제표준’(ISO 26000), 유럽연합(EU)의 사회책임 조달 지침 등이 그 예다. 김영식 사무국장은 “사회적 가치법에 대해 보수 진영에서는 ‘사회주의 하자는 거냐’며 반대하는데,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추기 위해서라도 사회적 가치의 확산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종규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jk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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