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수석부회장이 두달 만에 다시 만났다. 21일 삼성과 현대차의 설명을 종합하면, 이재용 부회장은 이날 경기도 화성의 현대·기아차 남양기술연구소를 방문해 정의선 부회장을 만났다. 삼성 쪽에선 김기남 삼성전자 부회장과 전영현 삼성에스디아이(SDI) 사장이, 현대차 쪽에선 서보신 현대·기아차 상품담당 사장과 박동일 부사장 등 양쪽 경영진이 함께했다. 두 사람은 친환경차와 도심항공모빌리티(UAM), 로보틱스를 주제로 의견을 나눈 뒤 수소전기버스와 넥쏘 자율주행차(레벨4)를 시승했다.
■ 두달 새 두번의 만남…기소 결정 앞둔 다급함?
이날 만남은 정의선 부회장이 지난 5월 충남 천안의 삼성에스디아이 사업장을 찾은 데 대한 답방의 성격이라 볼 수 있다. 재계 서열 1·2위 총수가 두달 새 두차례 공개 회동을 가진 셈이다. 전례 없는 일이지만 양쪽은 현장 사진과 총수의 메시지를 담은 보도자료는 배포하지 않았다. 앞서 정 부회장이 구광모 엘지(LG) 회장과 최태원 에스케이(SK) 회장과 만난 뒤 그룹별로 회동 사진과 상세 자료를 내는 등 적극 홍보한 것과 차이가 있다.
이와 관련해 삼성과 현대차 양쪽 모두 홍보할 만한 내용이 없었다며 과도한 의미 부여를 경계했다. 현대차 쪽은 “(이번 만남을) 홍보에 활용하고 싶지 않다는 의견을 삼성에 전달했다”고 밝혔고, 삼성 쪽은 “현대차와 삼성이 당장 협력한다기보다 미래를 보고 가자는 차원인데 (두 총수의 만남이) 이미 현대차와 거래 중인 엘지나 에스케이에 불안감을 주는 등 잘못된 시그널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두 차례 만남 모두 이 부회장에 대한 재판과 사법 처리 여부가 변곡점을 맞을 때마다 이뤄진 터라 재계에선 뒷말도 나온다. 5월 첫 회동은 이 부회장이 대국민 사과를 하며 “신사업에 과감히 도전하겠다”고 밝힌 지 일주일 만에 이뤄졌다. 현재는 이 부회장의 자본시장법 위반 등의 혐의 관련 검찰의 기소가 임박한 시점이다. 이창민 한양대 교수(경영학)는 “두 차례 모두 시기가 맞아떨어진 건 우연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 부회장은 본인에 대한 수사가 한창 진행 중인 최근 들어 현장 경영 행보를 부쩍 늘려왔다. 특히 이 부회장은 지난달 9일 구속영장 기각 후 삼성전자 반도체연구소(경기 화성, 6월19일)와 생활가전사업부(수원, 6월23일)를 연이어 방문했다. 두번 다 ‘위기’와 ‘미래’ ‘도전’을 언급했다. 대검찰청 수사심의위원회의 불기소와 수사 중단 권고(6월26일)는 이 부회장의 수원 방문 사흘 뒤에 나왔다.
■ 테슬라 ‘대항전선’ 구축 포석?
두 차례 회동을 두고 ‘사업적’ 의미를 찾는 시각도 있다. 배터리-완성차 업체를 중심으로 자동차 생태계가 크게 출렁이고 있는 상황에서 삼성(배터리)과 현대차(완성차) 최고경영진의 회동이라는 이유에서다. 이날 회동에 삼성그룹의 배터리 제조 계열사인 삼성에스디아이의 전영현 사장과 차세대 배터리 기술을 개발 중인 황성우 삼성종합기술원장이 배석한 점도 이런 맥락에서 눈길을 끈다. 두 회사가 중장기적으로 차세대 배터리 공동 투자협력에 나설 경우 전세계 배터리 시장은 물론 테슬라를 비롯한 완성전기차 시장까지 판도를 뒤흔드는 사건이 될 수 있다.
특히 미국의 전기차 업체 테슬라가 오는 9월15일 캘리포니아주 프리몬트공장에서 ‘배터리데이’를 열고 ‘수명 100만마일(160만㎞) 배터리’ 기술을 전격 공개할 것으로 알려져 정 부회장으로선 ‘테슬라 대항전선 구축’이 다급한 상황이다. 테슬라가 배터리 자체 생산을 위한 ‘로드러너 프로젝트’에서 기존 배터리보다 수명이 5배 길고 가격도 대폭 낮춘 배터리를 내놓는다면 완성차 업체인 현대·기아차는 물론 삼성에스디아이·엘지화학·에스케이이노베이션은 즉각 ‘경쟁력 열위’ 처지로 밀려나게 된다.
이재연 송채경화 조계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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