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건 경기개성공단사업협동조합 이사장. 박경만 기자
“북이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하고 개성공단 폐쇄와 9·19 군사합의 파기 등을 거론하고 있지만, 미래에 대한 준비를 포기하고 손놓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 정부와 기업은 당장 실현은 안 되더라도 중장기적인 대책을 세우고 각자 해야 할 일을 차분히 준비해야 합니다.”
2015년 4월 창립된 경기개성공단사업협동조합의 이희건(65·중소기업중앙회 경기북부회장) 이사장은 최근 급랭한 남북관계에 대해 “할 말이 많다”며 말문을 열었다.
6·15 남북공동선언 20돌을 맞은 지난 15일 경기도 고양시 일산테크노밸리에서 이 이사장을 만난 뒤 18일 추가로 전화 인터뷰를 했다.
이 이사장은 일부 개성공단 기업인의 정부 성토 분위기에 대해 “전체가 동의한 것은 아니다”고 선을 그은 뒤, “남북관계는 과거 연평도·천안함·박왕자 사건 등 크고 작은 사건이 터질 때마다 긴장이 고조되었지만 롤러코스터 타듯 시간이 지나면 복원되곤 했다. 기업인 입장에서 남북관계 복원과 평화안정, 공동번영을 위해 애쓴 정부의 진정성을 의심할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
앞서 개성공단기업비상대책위원회는 지난 17일 기자회견을 열어 “4·27 판문점선언과 9·19 평양공동선언이 이행 안 돼 남측에 대해 신뢰가 깨지고 분노하던 상태에서 전단 문제가 기폭제가 된 것”이라고 정부를 강하게 비판한 바 있다.
다만, 경영위기를 겪는 개성공단 입주기업에 대해 정부의 지원과 관심은 지금보다 더 커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정부가 동해선·경의선 철도 연결을 추진하고 경기도 파주에 남북산림협력센터 등을 만든 것도 훗날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등 남북 경협의 기초가 될 것이란 판단 때문”이라며 “개성공단 입주 기업들도 언젠가 공단이 다시 열릴 것에 대비해 개성공단 복합물류단지 조성을 추진 중”이라고 말했다.
‘공단’ 폐쇄 대비·판로 개척 위해
자유로변에 ‘복합물류단지’ 추진
중단 뒤 입주기업 15%만 현상유지
“코로나19 중기지원책도 ‘그림의 떡’
개성공단지원특별법으로 보상을”
쌍방울 18년뒤 의류업체 ‘나인’ 창업
그는 개성의 길목인 파주시 탄현면 자유로 성동나들목 인근에 21만1200㎡(6만4천평) 규모 개성공단 복합물류단지를 건립하기 위해 정부 부처를 수년째 쫓아다니며 설득하고 있다. 현재 40여개 기업이 참여 의사를 밝혔으며 총사업비는 850억원가량으로 예상된다.
그가 개성공단 복합물류단지 건립에 전력을 쏟기 시작한 것은 2013년 6개월간 개성공단이 폐쇄될 당시 업체들이 생산된 완제품과 반제품, 원·부자재를 가지고 나오지 못해 막대한 피해를 본 다음부터다. 개성공단 입주기업 80% 이상은 주문자가 요구하는 제품과 상표명으로 완제품을 생산하는 오이엠(OEM) 기업으로 원·부자재와 제품을 보관하고 있다가 필요할 때 조달할 수 있어야 하는데, 공단 폐쇄 때 원·부자재 등 수천억원 상당을 두고 나와야 했단다. 보관 창고가 없어서다. 그는 “기업들이 국내든 국외든 제조를 해야 원청과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데 국외 생산이나 판로 개척을 위한 플랫폼으로도 당장 물류센터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공공성을 인정받은 이 사업은 2018년 6월 국토교통부의 실수요 검증을 통과했고, 지난해 8월에는 경기도지사·파주시장과 ‘개성공단 복합물류단지 조성 협약서’를 체결하는 등 순조로운 진행을 보였다. 하지만 최근 실시계획 승인을 위한 행정절차 협의과정에서 ‘군 작전상 이유’로 난항을 겪고 있다. 복합물류단지가 조성되면 3600명 규모의 일자리가 생기고 지역주민 우선채용 등으로 경제 활성화에도 도움이 될 전망이어서 접경지역 주민들도 ‘민군 상생’을 건의하고 있다.
그는 개성공단 입주기업들이 제조기반 상실로 존폐의 갈림길에 서 있다며, 정부의 정책 결정으로 인해 발생한 거래관계 단절·신용 하락 등 ‘영업손실’에 대한 정부의 추가 지원을 호소했다.
지난해 중소기업중앙회의 조사결과를 보면, 원청 의존도가 높은 개성공단 기업은 전체 124개 기업 중 20여개 기업만 현상유지하고 있을 뿐, 86%는 생산 중단·매출 감소·자금난 심화를 겪고 9.3%는 사실상 폐업 상태인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정부는 확인된 유동자산의 90%만 보상할 뿐, 폐쇄에 따른 영업손실 등은 지원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다. 기업들은 피해 규모가 1조5404억원이라고 주장하지만, 정부 지원은 5709억원만 가능하다고 선을 그은 이유다.
이 이사장은 또 정부의 코로나19 피해 중소기업 지원책이 이미 신용도가 떨어진 개성공단 기업들에는 ‘그림의 떡’이라며 특례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이사장은 경기도내 60여개 제조·영업 기업이 속한 경기개성공단조합을 설립한 뒤 공동브랜드인 ‘시스브로’를 출시하고, 일산 킨텍스에 개성공단평화누리 명품관을 개설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해왔다. 그는 1979년 쌍방울에 입사해 18년간 근무한 뒤 97년 의류업체인 나인을 설립한 데 이어 2007년 나인제이아이티(JIT)를 설립해 개성공단 진출에 앞장섰다.
“하루빨리 개성공단지원특별법을 만들어 개성공단 재기 지원을 위한 영업피해 보상과 정부지원 등을 담았으면 좋겠습니다. 기업들도 쓰러지면 공단이 다시 가동돼도 들어갈 수 없으므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합니다.”
박경만 기자 mani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