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년 만의 최악의 하루’. 세계보건기구(WHO)가 코로나19 사태를 팬데믹으로 공식 선언한 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30일간 유럽으로부터의 미국 입국을 금지한다는 내용을 발표하자, 12일(현지시각) 미국과 유럽 증시는 10% 안팎의 대폭락을 기록했다. 1987년 블랙먼데이 이후 33년 만에 최악의 하루였던 이날 뉴욕 증권거래소에서 한 직원이 모니터를 쳐다보고 있다. EPA 연합뉴스
“이탈리아의 금융 시스템은 영어를 사용하지 않기에 아무 문제가 없어요.”
2008년 9월, 158년 역사를 자랑하던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가 한순간에 파산했을 때만 해도, 입담 좋은 이탈리아 재무장관의 눈엔 모든 게 단지 ‘미국의 해프닝’으로 비쳤다. 하지만 금융시장이라는 핏줄과 신경망을 타고 작은 불씨가 세계경제를 집어삼키는 초대형 화마로 돌변하는 데는 채 한달도 걸리지 않았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시작이었다. 이듬해인 2009년 미국(-2.5%), 일본(-5.4%), 유로존(-4.5%) 등 주요 나라가 받아든 성적표는 하나같이 마이너스(-) 수치로 채워졌고, 결국 세계경제는 역성장(-1.7%)의 늪에 빠져들었다.
2020년 벽두, 중국 후베이성 우한에서 날아든 코로나바이러스 창궐 소식도 지구촌 사람들에겐 한동안 ‘중국의 불행’일 뿐이었다. 그로부터 두어달. 세상의 풍경은 완전히 바뀌었다. 바이러스가 중국과 아시아를 넘어 모든 대륙을 감염시키면서 세계보건기구(WHO)는 팬데믹(전염병 대유행)을 공식 선언했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30일 동안 유럽으로부터의 미국 여행 금지라는 사상 초유의 카드마저 꺼내 들었다. 전세계 금융시장이 충격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이 세계경제의 이음새는 하나둘 파괴되는 중이다. 과연 2008년의 악몽은 되풀이되는 것일까? 아니 10여년 전의 금융위기보다 더 깊은 퍼펙트 스톰(초대형 복합 경제위기)의 수렁 속으로 세계경제는 빠져들게 될까?
■ ‘언논’+‘언터처블’ 위기 금융시장의 불안과 충격을 제쳐놓더라도, 코로나 팬데믹의 초기 파장은 곳곳에서 감지된다. 향후 경기를 가늠해볼 수 있는 중국의 2월 구매자관리지수(PMI)는 2005년 통계 작성을 시작한 이래 최저치로 급락했다. 2008년 금융위기 때보다 낮은 수치다. 이달 들어 유럽 주요 나라와 미국마저 직격탄을 맞은 걸 고려하면 세계경제의 실물 부문에 미칠 충격파는 섣불리 예단하기조차 힘들 정도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올해 세계경제 성장률을 2.9%에서 2.4%로 낮춘 데 이어, 경우에 따라 성장률이 1.5%까지 내려갈 것으로 전망한다.
2008년 금융위기는 흔히 ‘무엇을 모르는지 모르는’ 위기로 불렸다. 숱한 최첨단 파생금융상품이 금융시장이라는 핏줄과 신경망을 타고 퍼지고는 있으나, 정작 상품에 숨어 있는 위험의 실체가 또렷하게 드러나지 않았던 까닭이다. 정확한 특성과 감염경로를 알 수 없는 바이러스가 빠르게 퍼져가는 지금의 모습과 너무도 유사하다. 문제는 현재 상황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는 데 있다. 금융시장을 서둘러 안정시켜 위기의 불씨가 실물 부문으로 옮겨가지 못하도록 하는 게 2008년의 수술법이었다면, 현재 최우선 과제는 단연 ‘방역’이다. 냉정하게 말해 경제를 넘어서는 영역으로, 정부와 중앙은행 등 경제정책 당국의 대응은 위기 치료가 아니라 지원 작업일 뿐이다. 말 그대로 ‘언논’(알 수 없는)에 더해 ‘언터처블’(손댈 수 없는) 위기인 셈이다.
■ 2008년과 2020년, 달라진 환경이 변수 물론 투기등급의 채권이 몰려 있는 미국 하이일드 본드 시장에서 국채 대비 스프레드(가산금리)는 2008년 금융위기 당시 수준을 밑돌고 있다. ‘면역력이 가장 낮은’ 채권의 위험도라는 관점에서, 위기 징후를 가장 먼저 감지하는 최전방의 더듬이라 할 크레딧시장은 금융위기의 현실화 가능성을 아직은 낮게 본다는 뜻이다. 사정이 이런 데는 2008년과는 크게 다른 거시경제 환경이 한몫한다. 미국의 중앙은행은 2008년 금융위기에 2~3년 앞서 이미 금리 인상을 시작한 바 있다. 사실상 금융위기의 사전 드라마였다. 부채 상환 능력이 떨어지는 가계가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라는 뇌관을 건드려 금융기관 파산으로 이어지며 폭발한 게 2008년 금융위기였다. 세계적으로 저금리 체제인 지금은 단기간에 금융위기로 폭발할 부채 압력은 상대적으로 낮다고도 볼 수 있다.
13일 유가증권과 코스닥시장에서는 사이드카와 서킷브레이커가 동시에 발동됐다. 이날 코스피는 전 거래일보다 62.89(3.43%) 떨어진 1771.44에 거래를 마쳤다. 사진은 이날 오후 서울 여의도 케이비(KB)국민은행 딜링룸 모습.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그럼에도 2008년과는 환경이 다르기에 외려 우려되는 대목은 적지 않다. 첫손으로 꼽히는 건 뭐니 뭐니 해도 중국 변수다. 2008년 당시 직격탄을 맞은 건 대서양을 사이에 둔 미국과 유럽이었다. 세계경제의 또 다른 축이었던 중국은 2008년과 2009년 각각 9.7%, 9.4% 성장하며 화마에서 한발 비켜서 있었다. 세계경제가 빠르게 회복세로 돌아서도록 ‘숨통’ 역할을 한 건 물론이다. 2020년 눈앞에 펼쳐진 상황은 전혀 다르다. 중국은 코로나 팬데믹의 발원지이고, 미국과 일본, 유럽 주요 나라 등 주요 7개국(G7)은 물론 중동지역도 초강력 바이러스에 감염된 상태다. 전세계 산업 가치사슬의 붕괴와 한계기업의 도산으로 실물 부문의 상처가 금융 부문으로 옮겨붙고 금융시장이 다시 실물 부문 위기를 증폭시키는, 진정한 글로벌 복합 경제위기의 가능성을 배제하기 힘든 이유다.
정책환경의 변화도 빼놓을 수 없다. 금융위기 당시 각국은 서둘러 금리를 큰 폭으로 내리며 금융시장에 실탄(돈)을 쏟아부었다. 미국은 연방기금금리를 0.25%까지 낮췄고, 한국만 해도 1년 새 기준금리가 5.25%에서 2%로 떨어졌다. 미국과 영국에선 아예 양적완화(QE)란 이름으로 한 해 국내총생산(GDP)의 4분의 1 남짓한 돈을 세 차례에 걸쳐 공급하는 비전통적 해법도 등장했다. 이에 반해 금리가 이미 충분히 낮은 지금, 통화정책의 여지는 크게 줄었다. 사실상 마이너스 금리 상태인 일본과 유럽의 경우는 특히 그렇다. 꺼낼 수 있는 카드가 예전보다 적다는 얘기다. 결국엔 재정을 풀어 정부가 직접 돈을 쏟아붓는(Let’s get fiscal) 재정정책이 절실할뿐더러, 위기에 맞서 재정정책이 더 많은 짐을 짊어져야 한다는 뜻도 된다.
이뿐 아니다. 우여곡절 끝에 세계경제가 금융위기의 터널을 벗어나는 데는 국제사회의 공조가 힘이 됐다. 이 점에서 2020년의 상황은 2008년 당시보다 상당히 후퇴한 게 틀림없다. 그사이 브렉시트는 유럽연합을 흔들었고 포퓰리즘은 곳곳에서 근육을 단련했으며 미-중 무역분쟁의 골은 깊이 팼다. 바이러스라는 원초적 공포 앞에서 각국 정부는 국경 빗장부터 걸어 잠그며 저마다 각자도생에만 매달리고 있다. 조율된 정치적 대응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Let’s get political) 이때, 세계경제가 누릴 수 있는 ‘신뢰 자본’이 크게 줄어든 건 코로나 팬데믹에 시달리는 2020년 세계경제엔 크나큰 불행이다.
■ 팬데믹과 제이(J)노믹스…한국 경제의 앞날은? 올해 세계경제의 성장·교역 회복세에 힘입어 우리 경제의 성장세에도 속도가 붙으리라 전망했던 정부로선 예상치 못한 초대형 암초를 만난 꼴이다. 세계경제가 코로나발 동반 불황에 빠질 경우 올해 성장률이 정부의 전망치(2.4%)를 크게 밑돌 것이란 목소리가 벌써 높다. 정부도 서둘러 11조7000억원 규모의 ‘코로나19 대응을 위한 추가경정예산안’을 내놓았으나, 사태의 심각성에 비춰볼 때 재정 투입 규모가 부족한 게 사실이다. 코로나 팬데믹은 문재인 정부 들어 가장 강력한 ‘외부 충격’이다. 관건은 ‘문재인 경제학’(제이노믹스)의 정책 기조와 코로나 팬데믹 위기 대응 사이에 ‘충돌’은 없을지, 만일 충돌이 벌어진다면 어떻게 정교하게 풀 것이냐다.
2008년 금융위기는 수출 중심의 성장 전략을 내세운 이명박 정부 출범 첫해에 찾아왔다. 원화 가치를 낮춰(고환율) 수출 대기업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한다는 건 애초부터 엠비(MB)노믹스의 뼈대였다. 금융위기로 원-달러 환율이 오르자 우리 경제는 자연스레 수출에 힘입은 경기회복의 길에 접어들었다. 역설적이게도 4대강 사업 등의 대규모 건설투자가 위기 대응 과정에서 경기부양 효과를 낸 측면도 무시할 순 없다. 실제로 2009년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 대비 경기부양액 규모는 3.9%로 미국(2%), 영국(1.4%), 일본(2.4%)에 견줘 월등히 높다. 물론 정부의 정책 기조와 조화(!)를 이룬 위기대응책이 불평등 악화와 환경 파괴 등 두고두고 우리 사회에 깊은 생채기와 후폭풍을 남긴 건 분명하다.
코로나 팬데믹의 한가운데서 문재인 정부가 처한 상황은 더없이 복잡하다. 신속한 위기 대응을 내세워 ‘묻지 마 경기부양’에 나섰다가는 그간의 정책 기조와 혼선을 빚을뿐더러, 자칫 위기 대응도 힘들고 정책 기조마저 흔들릴 가능성도 있어서다. 금리 문제가 대표적이다. 정부는 2017년 출범 이후 19차례에 걸쳐 부동산 대책을 쏟아내며 부동산 시장 안정 의지를 거듭 밝혀왔다. 금융시장과 수출, 내수 등 경제 모든 영역의 불안정성이 극대화한 상황에서 정부와 중앙은행의 고민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다. 정부가 당장 꺼내 들어야 할 카드는 과감한 재정 집행을 통한 수요기반 확대와 경제주체들의 심리 회복이다. 즉각 효과를 내는 현금지급을 확대하거나 부가세액 한시 면제 같은 조치 이외에 어려움에 부닥친 자영업자 등을 상대로 대출 보증 확대 등 다양한 금융정책도 생각해볼 수 있다. 물론 가장 중요한 건 규모보다는 내용, ‘얼마나’보다는 ‘어떻게’다. 코로나 팬데믹의 파장은 계층별로 다를 수밖에 없어서다. 불평등 완화와 포용성장이라는 정책 기조도 살리고 눈앞에 닥친 위기 대응에도 성공하는 길이다.
최우성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morge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