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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경제일반

“화폐 민주화가 위기의 교훈”…기본소득에 새로운 지평 열릴까?

등록 2019-09-23 09:22수정 2019-09-23 09:49

[더 나은 사회]
민간 은행에 맡긴 ‘화폐 생산’ 권력
금융위기와 불평등의 주범 꼽히기도
‘주권화폐’ 등 화폐 개혁 주장 잇따라
세금과 공유부 맴도는 기본소득 논의
‘혼합형’ 등 새로운 재원 가능성 제시
영국의 ‘주권화폐’ 운동단체인 ‘포지티브머니’ 회원들이 2016년 8월 영국은행 앞에서 현행 양적완화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들은 민간 은행으로부터 화폐 생산 권력을 빼앗아 국가한테 되돌려주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영국의 ‘주권화폐’ 운동단체인 ‘포지티브머니’ 회원들이 2016년 8월 영국은행 앞에서 현행 양적완화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들은 민간 은행으로부터 화폐 생산 권력을 빼앗아 국가한테 되돌려주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은행은 자금의 중개자가 아니다’.

영국의 중앙은행인 영국은행이 최근 내놓은 연구보고서의 제목이다. 국제통화기금(IMF)과 영국은행의 이코노미스트가 공동으로 펴낸 보고서는 화폐 생산(창출)에 관한 지극히 익숙한 ‘상식’을 뒤집는다. 지갑과 계좌, 모바일뱅킹과 금융시장을 자유로이 헤엄쳐 다니는 돈의 대부분은 민간 은행이 무(無)에서 만들어냈으며, 세상에 늘 금융위기가 찾아오는 건 바로 그런 이유에서라는 게 뼈대다. 주류 중의 주류라 할 사람들한테서 나온 목소리다. 무슨 사연일까?

양적완화의 효과 ‘기대 이하’

2008년 터진 금융위기 대응 과정부터 잠시 복기해보자. 정책금리가 이미 0% 수준에 이르러 금리를 더 내릴 여지가 없자 주요국 중앙은행은 특단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말 그대로 “비상 상황에 따른 비상조치”(벤 버냉키 당시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였다. 중앙은행이 금융시장에서 단기 국채를 매입해 단기 금리에 영향을 미치는 전통적 방식의 통화정책 대신, 장기 국채는 물론 모기지담보증권(MBS) 등 다양한 민간 채권을 직접 사들여 시장에 유동성을 공급하는 ‘변칙 플레이’였다. 중앙은행 대차대조표상의 자산 규모가 이례적으로 부풀어 오르는 양적완화가 세상에 등장한 배경이다.

미국에선 2008년 11월부터 2014년 10월까지 세차례 이어진 양적완화로 연준의 자산이 무려 4조5천억달러(당시 환율 기준 약 4740조원)까지 늘어났다. 2014년 미국 국내총생산(GDP)의 25%를 웃도는 수치다. 비슷한 기간 3750억파운드(약 650조원)를 시중에 푼 영국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2015년 3월부터 뒤늦게 양적완화에 나선 유럽중앙은행(ECB)은 다달이 800억유로(약 112조원)를 국채 및 민간 채권을 사들이는 데 썼다. 유로존 전체 인구(3억2500만명)에게 다달이 246유로(약 35만원)씩 나눠 줄 수 있는 규모다.

그럼에도 비전통적 통화정책인 양적완화조차 효과는 기대에 크게 못 미쳤다. 은행들은 대출을 꺼렸고 얼어붙은 대출 수요도 좀체 살아나지 않았다. 중앙은행을 떠난 돈이 가계나 기업 등 실물 부문의 최종 종착지까지 이르지 못했다는 뜻이다. 대신 분배구조엔 외려 악영향을 끼쳤다. 풀린 돈이 자산시장을 맴돌며 자산가격 상승을 부추기다 보니 이미 자산을 보유하고 있던 계층의 주머니만 더욱 불린 셈이다. 이뿐 아니다. 국내총생산 대비 비중을 기준으로 삼았을 때, 1단계 양적완화에서 미국(7%)이 투입한 자금은 영국(14%)의 절반에 그쳤으나, 국내총생산 증가 효과 면에선 외려 두배를 웃돌았다(4% 대 1.5~2%). 오바마 정부가 양적완화와는 별도로 8천억달러(약 1020조원) 규모의 재정지출 카드도 병행한 득을 크게 봤다.

2013년 10월 스위스의 기본소득 활동단체 ‘기본소득세대’가 2013년 10월 스위스 베른의 연방광장 앞에 기본소득 국민투표 청원자가 12만5천명을 넘은 것을 기념해 5센트짜리 동전 800만개(1인당 하나)를 쌓아놓고 환호를 지르고 있다. 2016년 치러진 기본소득 국민투표는 부결됐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2013년 10월 스위스의 기본소득 활동단체 ‘기본소득세대’가 2013년 10월 스위스 베른의 연방광장 앞에 기본소득 국민투표 청원자가 12만5천명을 넘은 것을 기념해 5센트짜리 동전 800만개(1인당 하나)를 쌓아놓고 환호를 지르고 있다. 2016년 치러진 기본소득 국민투표는 부결됐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화폐란 무엇인가’라는 근본 물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의문은 반성과 성찰로 이어졌다. 통화정책의 전달 경로를 처음부터 다시 살피자는 목소리는 이참에 화폐 생산 과정 자체를 근본적으로 되짚어보려는 움직임으로 본격 진화하는 중이다. 바야흐로 ‘화폐란 무엇인가’라는 근본 물음 앞에 ‘위기 이후’의 자본주의 세계가 다가선 셈이다. 영국은행 보고서가 나온 사정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마치 제1차 세계대전에서 대공황으로 이어진, 100년 전 대혼돈과 위기의 시대에 온갖 대안적 화폐이론이 활짝 꽃피던 상황을 연상시키는 분위기다.

이와 관련해 민간 은행의 손에서 화폐 생산 권력을 빼앗아 이를 국가에 넘겨주자는 더욱 급진적인 주장도 차츰 힘을 얻고 있다. 이른바 ‘주권화폐’(sovereign money)란 이름을 내건 흐름이다. 큰 틀에서 보자면, 국가의 발권력을 강조하는 현대통화이론(MMT)이 최근 몇년 사이 부쩍 목소리를 높이게 된 것도 금융위기 이후 근본적으로 달라진 환경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주류 경제이론과 낯익은 상식에 따르면, 국가의 주머니를 늘리는 길은 오직 민간 부문에서 세금을 걷거나 꾸어 오는 방법 둘뿐이다. 국가가 허리띠를 바짝 졸라매야 한다는 재정 건전성 신화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만일 사회가 민간 은행으로부터 화폐 생산 권력을 빼앗아 온다면 세상의 모습은 지금과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영리기업인 민간 은행의 손에 돌아가던 엄청난 혜택(이자수익)은 이제 오롯이 사회의 몫이 된다. 국가가 주권의 이름으로 통화를 발행하고, 그에 따른 ‘주조차익’(시뇨리지)을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위해 적극적으로 쓸 여지가 생겨서다. 이른바 ‘화폐의 민주화’가 안겨주는 편익은 특히 위기 때 더 커지기 마련이다.

“헬리콥터머니, 기본소득 가능성 열어”

흥미로운 건 화폐의 민주화가 안겨줄 대표적 편익으로 사회 구성원 누구나 누리는 보편적 기본소득의 가능성 유무다. 민간 은행의 과도한 화폐 생산 권력을 제어하려는 움직임과 기본소득, 둘 사이를 직접 잇는 연결고리는 아직 없다. 하지만 금융위기를 계기로 기존의 재정정책 및 통화정책 패러다임이 근본적으로 도전받으면서, 둘 사이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을 수도 있음을 지적하는 목소리는 하나둘씩 늘고 있다. 기본소득 연구자인 이노우에 도모히로 일본 고마자와대 경제학부 교수는 “2000년대 초반부터 일본에서 시작한 양적완화 정책은 은행 부문이라는 우회로를 거치지 않은 사실상의 헬리콥터머니”라며 “국가가 화폐 생산 권력을 되찾아 기본소득 재원으로 쓸 수 있는 가능성을 증명해준다”고 지적했다. 스위스의 주권화폐 운동단체들도 국가의 화폐 발행과 기본소득을 직접 연결하는 연구 작업을 진행 중이다.

2011년 9월 미국의 금융 중심지 월스트리트에서 열린 ‘오큐파이(점령하라) 운동’에 참가한 한 시민이 ‘우리가 99%다’라는 글귀를 적은 종이를 들어 보이고 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2011년 9월 미국의 금융 중심지 월스트리트에서 열린 ‘오큐파이(점령하라) 운동’에 참가한 한 시민이 ‘우리가 99%다’라는 글귀를 적은 종이를 들어 보이고 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현재 기본소득 재원과 관련한 국내외 논의는 세제 개편이나 공유자산 배당 쪽에 한정돼 있다. 새로운 세금을 물리거나 혹은 기존 세목을 조정해 재원으로 쓰자는 얘기다. 기본소득 주장을 전면에 내걸고 내년도 미국 대통령선거 민주당 경선 후보로 나서 화제를 모으는 앤드루 양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는 산업 자동화로 이익을 보는 대기업들에 세율 10%의 부가가치세를 물려 이 돈으로 모든 성인에게 다달이 1천달러의 자유배당(기본소득)을 주자는 주장을 펴고 있다.

국내 일부에선 국세인 종합부동산세를 폐지하고 전국 토지를 인별 합산해 국토보유세를 신설한 뒤, 이를 재원으로 기본소득 제도를 도입하자는 목소리도 나온다. 한국은행의 2018년도 국민대차대조표 자료를 보면 지난해 말 기준으로 금융법인과 비금융법인, 가계 및 비영리단체가 보유한 토지자산 가치는 6167조원에 이른다. 이 밖에 가계에 귀속되는 근로소득·사업소득을 비롯해 이자·배당·임대료 소득, 부동산 매매 차익 등 모든 가계귀속소득에 단일 비율로 시민소득세(시민 배당)를 거두거나 탄소세(탄소 배당)를 도입하는 방안 등도 거론된다.

‘조세형’, 경기에 재원 좌우되는 한계

사회가 소유한 부라 할 만한 공유자산도 기본소득 재원으로 쓰일 수 있다. 국내의 경우엔 2017년까지 유예됐다가 지난해 부활한 재건축 초과이익환수제로 조성된 세수를 꼽을 수 있다. 재건축 개발이익은 전형적인 도시의 공유자산임에도, 현행 제도에선 환수 개발이익조차 대부분 자산계층에만 집중적으로 혜택이 돌아가는 실정이다. 최근엔 거대 플랫폼 기업의 이윤 원천인 빅데이터도 공유자산의 하나이며, 여기서 나오는 재원으로 기본소득을 나눠 주자는 인식도 나라 안팎에서 확산하는 중이다. 지난 8일 창당발기인대회를 연 기본소득당 창당 준비위원회도 탄소 배당과 더불어 디지털 공유부 배당 및 데이터 주권을 내세운다.

하지만 큰 틀에서 봤을 때, 이들 방식은 모두 기존 재원의 재조정 혹은 재배치에 가까운 편이다. 재원 규모가 기본적으로 경기 상황(세수)이나 자산가격에 좌우된다는 한계도 있다. 예를 들어 국토보유세만 해도 세금을 물려 지속해서 자산가격이 내려간다면 그만큼 재원도 줄어드는 딜레마에 빠지기 마련이다. 이에 반해 화폐 발행권을 활용한 기본소득은 국가의 무한한 발권력을 토대로 적극적으로 재원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제3의 길을 열어준다.

지난해 6월 스위스에서 치러진 ‘주권화폐 국민투표’를 앞두고 지지자들이 홍보 활동을 벌이는 모습. 위키미디어 코먼스
지난해 6월 스위스에서 치러진 ‘주권화폐 국민투표’를 앞두고 지지자들이 홍보 활동을 벌이는 모습. 위키미디어 코먼스
물론 쉬운 길은 분명히 아니다. 화폐 제도는 한 사회를 지탱하는 핵심 제도라 변화나 개혁은 항상 그릇된 상식에서 비롯된 두려움이나 공포라는 장애물과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민간 은행에 화폐 생산 권력을 넘긴 현행 부분지급준비제도는 500년은 족히 된 금속본위 전통에 기대고 있긴 하나, 자유로운 신용 팽창을 통해 자본주의 경제에 역동성을 안겨준 공도 무시하긴 어렵다. 화폐 민주화의 정신은 충분히 살리되 급격한 신용 위축을 막을 정교한 설계도가 필요한 법이다.

더글러스 ‘사회신용’의 핵심

그럼에도 국가의 화폐 생산 권력 회복을 통한 기본소득 아이디어는 열린 가능성으로 진지하게 검토해볼 만하다. 좀 더 현실적으론 세금 징수 방식의 ‘조세형’과 화폐 발행 방식의 ‘통화형’을 혼합하는 기본소득 방안도 가능하다. 안현효 대구대 일반사회교육학과 교수는 “전체 기본소득 재원 규모를 사회적 합의로 정해둔 뒤, 경기가 나쁠 땐 적극적으로 화폐를 발행하고, 경기가 좋을 땐 늘어난 세수를 바탕으로 세금을 더 걷는 혼합 방식도 괜찮을 것”이라 지적했다. 굳이 어느 한쪽 방식만 선택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모두의 것을 모두에게’. 기본소득당 창당 준비위원회가 내건 슬로건이다. 일부 연구자와 활동가 단위에 머무르던 국내 기본소득 운동은 지난 10년 사이 정책실험 단계까지 성큼 진전된 상태다. 다만 기본소득 재원을 둘러싼 논의만큼은 여전히 조세와 공유자산 배당의 틀에서 무한정 맴돌고 있다.

화폐는 한 사회의 핵심 공공재다. 화폐 주조차익이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고루 돌아가고, 경기의 변동성을 줄여주는 디딤돌 역할을 맡아야 하는 기본 이유다. 이런 점에서 거대한 금융위기의 파고가 잦아든 지금, 화폐 민주화와 기본소득은 서로에게 신선한 자극제가 되기에 충분하다. 기본소득 운동엔 재원과 관련한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고, 화폐의 민주화 진영엔 주조차익의 구체적 쓰임새에 관한 고민의 기회를 줄 수 있다.

실상 이 둘은 처음부터 따로 떼어내 생각하기 어려운 존재인지도 모른다. 20세기 초반 기본소득의 최초 주창자로 활동했던 영국 출신의 기업인 클리퍼드 더글러스는 사회의 총수요를 끌어올리기 위해 사회 구성원에게 지급하는 ‘국민배당’을, 은행을 통한 빚(부채 화폐)이 아니라 국가가 발행한 화폐(이자를 물지 않는 돈)로 충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말한 ‘사회신용’의 핵심이자, 100년이 지난 지금 더욱 절실한 상상력이다.

최우성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morg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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