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공공기관 사회적 가치 포럼’이 15일 오후 서울 중구 명동 커뮤니티 하우스 ‘마실’에서 열려 전국에서 모인 200여명의 참석자가 공공기관의 사회적 가치란 과연 무엇이며, 어떻게 실현할 것이냐는 주제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빨리빨리’와 ‘크게 크게’.
5년 전 304명의 생명을 앗아간 세월호 참사는 속도와 규모에만 매달려 앞으로 내달리던 우리 모두에게 뼈아픈 물음 하나를 던졌다. 지금 우리에겐 진정 어떤 가치가 필요하냐고. ‘사회’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가치, 되살려야 할 가치였다. 무엇보다 공공 영역이 한걸음 앞장서야 한다는 공감대도 널리 퍼졌다. 국가의 무능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세월호 참사의 원죄이자, 안전한 세상을 만들자는 시대적 사명이었다.
반성과 성찰의 기운은 참사 이후 들어선 새 정부의 정책 기조에서 뚜렷하게 드러났다. 문재인 정부는 공공기관의 사회적 가치 실현을 100대 국정과제의 하나로 못박았다. 지난해 행정안전부가 사회적 가치 중심의 정부 운영 계획을 담은 ‘정부혁신 종합추진계획’을 발표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후속 작업도 이어졌다. 기획재정부는 지난해부터 공공기관 경영 평가 때 사회적 가치 항목의 비중을 늘렸다. 경영효율 지표와 사회적 가치 지표를 구분하고 사회적 가치 항목의 배점을 확대한 것(22점). 삶의 질 제고, 협력과 참여 같은 사회적 가치 구현 관련 지표도 신설됐다. 지난달엔 청와대에 사회적 가치 태스크포스(TF)가 구성되기도 했다. 19대와 20대 국회에서 연이어 발의된 ‘공공기관의 사회적 가치 실현에 관한 기본법(안)’(이하 기본법) 처리에도 힘이 실릴 전망이다.
현재 339곳이 공공기관으로 지정돼
이런 가운데, 사회적 가치 구현이라는 관점에서 공공기관 운영의 현주소를 점검해보는 자리가 마련돼 눈길을 끌었다. 15일 서울 중구 명동 커뮤니티 하우스 ‘마실’에서 열린 ‘2019 공공기관 사회적 가치 포럼’이 그 주인공이다.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과 랩(LAB)2050, 사회혁신기업 더함이 공동으로 연 이날 행사는 공공기관의 사회적 가치란 과연 무엇이며, 어떻게 실현할 것이냐는 주제를 놓고 머리를 맞대는 자리였다. 지난해부터 공동 연구 작업을 진행해온 이들 세 기관이 그간의 연구 성과를 중간발표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이날 행사엔 공공기관 20여곳과 사회적 경제 중간지원조직 관계자 등 전국 각 지역의 현장에서 온 200여명이 참석해 세 시간 넘게 열띤 분위기를 이어갔다.
종합토론 순서에서 발제자와 토론자들이 토론을 벌이는 모습.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공공기관을 법적으로 엄밀하게 정의하기란 어렵다. 넓은 의미로는 공적인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기관으로,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 공기업, 준정부기관까지 포함하는 행정의 주체로 본다. 좁은 의미로는 ‘공공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률’에 근거해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정하는 기관을 일컫는 게 일반적이다. 이 기준에 따를 경우 그 수는 2019년 기준 339곳에 이른다. 지방 공기업 400여곳 역시 공공기관 범주에 포함될 만하다.
‘수자원 개발’ 대신 ‘지속가능한 물 순환’
공공기관에 기대하는 사회적 가치란 무엇일까. 해답의 실마리는 현재 국회에 발의된 ‘기본법’이 제공한다. 기본법은 사회적 가치를 ‘사회·경제·환경·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공공의 이익과 공동체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가치’로 규정하고 있다. 사회적 가치와 관련한 공공기관의 구체적 책무로는 △관계 법령 및 조례 제정·개정·폐지 △조직 정비 △정책의 수립 및 시행·평가에 있어 사회적 가치 고려 등이 꼽힌다. 개인과 조직을 넘어 사회와 공동체, 나아가 미래세대까지 한데 아우르는 가치 영역의 확장도 공공기관의 역할로 새롭게 자리매김해볼 만하다.
양동수 사회혁신기업 더함 대표는 “이번 정부가 특별하다거나 특별한 이념에 발 딛고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매우 중요한 전환점에 서 있다는 관점에서 출발해야 한다”며 “공공기관의 본질적 사명을 재정립하자는 뜻으로 바라보자”고 주문했다.
양동수 사회혁신기업 더함 대표.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그럼, 공공기관의 사회적 가치는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까. 현재로선 채워야 할 ‘빈틈’이 적지 않다. 당장 공공기관 일선 현장에서 적용할 구체적 실행 기준이 모호한데다, 경영 합리화 및 운영의 투명성을 기반으로 결과에 대한 책임만 강조되고 있어서다. 개별 공공기관에 따라 기준이 천차만별인 설립 근거법을 다듬는 일 역시 시급하다.
예컨대, 한국철도공사법을 보자. 제1조(목적)는 ‘철도 운영의 전문성과 효율성을 높임으로써 철도 산업과 국민경제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못박고 있다. 만일 ‘철도 산업과 국민경제 발전뿐 아니라 편리하고 안전하고 보편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며, 저탄소 교통체계를 확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수정해본다면 어떨까. 경제에서 사회로, 다시 미래세대로 가치를 넓혀가자는 뜻을 설립 목적에 명시하자는 얘기다. 실제로 한국수자원공사의 경우, 설립 목적과 사업 범위 등을 담은 한국수자원공사법을 현행 ‘수자원 이용개발’에서 ‘지속가능한 물 순환’으로 개정하는 작업을 추진 중이다.
김진경 랩2050 기획위원은 “일선 현장에 실질적 도움을 주는 솔루션(해법)이 필요한 단계”라면서도, “단기적으로 성과를 내려 하기보다는 조직 전반에 걸쳐 이해와 소통에 힘써 실질적 참여와 공감대를 넓히는 게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당장의 성과보다는 ‘과정’에 방점을 찍자는 얘기다.
공공성 평가는 종합적 잣대 필요
이처럼 공공기관이 사회적 가치 실현과 확산에 앞장서자는 분위기는 무르익었지만, 앞으로 풀어야 할 과제도 한둘이 아니다. 현장의 분위기도 기대보다는 걱정에 무게가 실리는 편이다. 또 하나의 평가 잣대만 덧붙여지는 게 아니겠느냐는 혼돈과 우려도 적지 않다. 오영오 한국토지주택공사 미래혁신실장은 “자칫 양적 성과에만 매달려 기부나 봉사 등 단기적이고 시혜적인 프로그램만 늘릴 수도 있다”며 “급진적 변화가 아니라 점진적 방식으로 다가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진경 LAB2050 기획위원.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무엇보다 단 하나의 잣대로 공공성이 있다 없다를 가려내기 힘든 현실을 어떻게 넘어설지도 쉽지 않은 과제다. 개별 공공기관마다 설립 배경과 목적, 주요 사업 등 국가 경제에 이바지하는 방식이 제각각이어서다. 대표적으로 사행사업을 벌이는 마사회를 꼽을 수 있다. 국가 재정 기여라는 틀에서 이해해야 할까, 아니면 공동체 윤리에 어긋난다고 평가해야 할까. 라영재 한국조세재정연구원 공공기관연구센터장은 “공공기관 운영 및 설립 목적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점에 동의한다”고 전제한 뒤 “공공성, 정책 효과, 새로운 시대적 가치를 추구하고 있는지 종합적으로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공기관의 기본 속성인 ‘대리인’ 문제도 빼놓을 수 없다. 정부의 투자·출자 또는 재정 지원으로 설립·운영되다 보니, 공공성뿐 아니라 효율성도 무시하기 힘든 탓이다. 제도의 변화만큼이나 공공기관의 자율적 혁신 노력도 존중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뿐 아니다. 공공기관의 행동 변화를 끌어낼 정교한 인센티브 구조를 짜내는 일은 많은 고민이 필요한 과제다. 평가엔 으레 보상이 뒤따라야 하지만, 사회적 가치의 성과를 금전적 수단으로 보상하는 게 과연 적절하냐는 근본적 의문을 떨쳐버리기 힘들어서다.
“참여와 설득, 숙의의 과정이 핵심”
과연 참사를 겪은 우리는 사회적 가치의 재발견을 통해 ‘외상 후 상처’를 꿰맬 수 있을까. 한국 사회는 성장의 시대에서 성숙의 시대로 옮겨갈 수 있을까. 이날 행사장에 모인 참석자들은 공공기관의 사회적 가치를 우리 사회 모순의 구조적 혁신과 연결짓자는 쪽으로 목소리를 모았다. 조현경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시민경제센터장이 “단지 정답을 보여주자는 것, ‘베스트 프랙티스’(모범 사례)를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다”라며 “개인과 조직을 아우르는 참여와 설득, 숙의의 과정이 핵심”이라고 강조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정부의 선도적 역할이 중요하긴 하나, 시민사회와 민간기업 모두의 공통 과제라는 공감대와도 연결될 만하다.
‘세월호 참사는 사람의 생명과 안전보다 이윤을 앞세웠던 우리 사회의 민낯을 직시하게 만들었다. 이제는 이윤과 효율이 아니라 사람의 가치, 공동체의 가치를 지향하도록 국가 시스템을 바꾸어야 할 때다.’ 기본법 제안 이유를 설명하는 문구다. 배제와 집중의 세상에서 포용과 다양성의 세상으로, 경제적 가치를 넘어 공동체와 미래세대까지 끌어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지 않을까. 정교한 설계도를 그리는 일만 남았을 뿐.
최우성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morge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