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봉주 북한 내각총리가 지난해 8월 농업연구원을 방문해 시설을 둘러보고 있다. 연합뉴스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됐다. 하지만 평화 프로세스를 위한 노력이 지속하는 한, 북한 경제의 개방을 상정하는 우리의 비전과 전략 설정은 필요하다. 철도, 자원개발, 경제특구 등 경제협력의 각론적 논의가 무성한 것과는 달리, 북한 경제의 발전 방향에 대한 전략적 논의는 많이 부족하다. 우리 경제에 즉각 도움이 되는 구체적 성과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경협 과정을 통해 달성하고자 하는 북한 전환경제체제(Transformative Economy)에 대한 우리의 그랜드플랜을 차분히 숙의해야 하는 매우 중대한 시점으로 보인다.
북한의 전환경제에 대해 우리가 갖는 비전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우리는 어떤 식의 북한 경제발전을 원하는가? 이를 달성하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경협을 단계별로 추진해 나가야 하는가? 북한이 그리는 경제 대안 스펙트럼에서 한쪽 끝은 기존 전체주의 경제체제를 지속하는 것이고, 반대 끝은 실질적인 자본주의 경제로의 이행이다. 스펙트럼의 중간에는 여러 경제형태가 존재할 수 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북한이 이미 많은 나라가 겪었던 자본주의의 폐해를 답습하며 앞으로 수십 년간 이를 반복하고 나서야 후회한다면 이것은 우리 모두의 역사적 낭비라는 점이다.
그랜드플랜의 중요한 방점은 사회적 경제에 찍힌다고 생각된다. 경협이 시작되면, 북한 전환경제에 사회적 경제의 공간을 만들 필요가 있다. 경제철학 측면에서 사회적 경제는 완충이다. 사회주의 원리를 고수하려는 북한의 정치적 필요와 경협 재개 후 봇물 터지듯 진입할 준비를 하는 자본주의적 개발이라는 두 힘의 중간에서 사회적 경제는 균형자이다.
사회적 경제는 자본주의적 제도
사회적 경제는 북한의 자존심을 세워주는 동시에 북한 전환경제에 대한 우리의 비전을 담는 남북한 공통의 화두로서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북한 입장에서 보면 사회주의와 시장경제를 모두 담을 수 있는 사고의 틀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사회적 경제는 북한의 사회주의와 아무 상관이 없다. 사회적 경제는 자본주의 현상이자 제도이다. 사회적 경제의 출생지는 영국,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 이미 자본주의가 고도로 진행된 국가들이었다. 사회적 경제는 자본주의의 여러 문제를 겪고 나서, 이를 개선·보완해야 한다는 문제 인식에서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이미 우리 정부도 제도로서 사회적 경제를 도입하고 있다. 청와대에 사회적경제비서관이 존재하고, 기획재정부와 금융위원회, 고용노동부, 중기벤처부 등 여러 부처에서 이미 사회적 경제 활성화를 위한 정책들이 수립돼 집행되고 있다. 이른바 주류권 제도이다. 중요한 것은 북한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이러한 사회적 경제의 프레임은 철학적 유연성을 통해 시장주의와 사회주의를 결합하는 개념으로 새롭게 의미가 부여되고 활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조직형태로서의 사회적 경제는 북한 경제에 이미 역사적으로 친숙하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북한 경제를 구성하는 생산·유통·소비의 조직체들은 공동체적 의사결정, 지배구조 및 성과 분배 등에 있어 지금 우리의 사회적 경제와 어느 정도 유사성을 보인다. 물론 지향하는 목적과 실천방식은 근본적으로 판이하지만 말이다. 조직형태와 지배구조에 대한 북한의 높은 친숙도는 사회적 경제라는 대안에 대한 그들의 거부감을 불식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북한 신의주화장품공장에서 생산하는 화장품 ‘봄향기’. 지난 1월 재일본 조선인총연합회 기관지 조선신보는 봄향기가 북한 주민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고 보도했다. 사진은 평양제1백화점에서 판매 중인 봄향기 제품. 연합뉴스
우선, 북한을 향한 무제한 자본주의적 개발이익의 추구를 방관해선 안 된다. 균형적으로 조정·개입하는 게 필요하다. 이를 위해 사회적 경제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지금껏 자본주의적 개발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엄청난 경제성장을 가능케 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환경문제와 사회 양극화 등 마이너스 외부효과가 발생한 것이 사실이다. 많은 개선 노력이 있었음에도, 정부도 기업도 국제사회도 이를 충분히 걸러 낼 수 없었다. 개발이익을 추구하는 게임에 있어 승자와 패자는 선점과 배타의 룰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버스에 앉으려면 빨리 타야 하고 늦게 줄을 서면 자리가 없어 타지 못한다. 이 게임에서 사회적 불균형과 환경의 오염을 고민하는, 이른바 균형적 개발의 논리를 주장하는 사업자가 들어갈 틈은 실종된다. 반대편 게임 플레이어인 북한의 입장에서 보면 버스 논리의 작동으로 마구 진입하려는 많은 자본주의적 개발사업자들에 대해 이들을 뒷짐 지고 줄만 세우면 된다. 경제적 이익뿐만 아니라 더 많은 정치·외교적 레버리지를 확보하는 수단이 될 것이다. 즉, 균형개발의 논리는 북한의 입장에서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상황일 것이다.
만약 이러한 우려스런 시나리오가 현실로 나타나 북한과 개발자본주의자 간의 이해가 맞아떨어진다면, 이는 너무나 암울하다. 세계 곳곳의 자본주의 과정에서 나타났던 난개발과 사회·환경문제가 북한에서 도돌이표처럼 걷잡을 수 없이 반복될 것이다. 역사는 후퇴하고 교훈 없는 성장이 된다. 이를 피하기 위한 균형자로서 사회적 경제는 필요하다. 자본주의적 개발을 통한 경제성장을 포기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전에 겪은 자본주의 시행착오를 반복하는 우를 북한에서 범하지 말자는 것이다.
북한 지역사회 공동체 유지에도 도움
개발의 경제적 이익과 사회적 긍정적 가치의 창출이라는 두 가지 목표의 균형이 사회적 경제의 개입 때문에 조정될 수 있다는 사실도 잊지 말자. 순수 민간기업들은 지배구조와 운영체제상의 특성 때문에 사회적 가치를 담보하는 데에 한계가 있다. 반대로, 공공주도 개발은 효율성의 문제와 위험 감수를 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사회적 경제가 가진 고유한 기능으로, 경제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의 동시적 추구가 가능하다는 사실이 이미 아프리카, 남미 등 여러 저개발국의 개발 사례에서 증명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지난해 12월 남북 공동조사단이 북한 신의주와 중국 단둥을 연결하는 ‘조중 친선다리’를 점검하는 모습. 연합뉴스
이뿐 아니다. 우리가 갖는 통합경제의 또 하나의 비전은 북한 지역사회 공동체의 유지여야 한다. 사회적 경제는 북한 사회 저변의 지역공동체와 산업 생태계 인프라들을 개방 후 급작스러운 붕괴로부터 지탱하는 버팀목이 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과거 동독이 겪었던 통합경제 과정의 시행착오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개방 후 동독의 도시들로부터 젊은 층을 중심으로 인구이탈이 발생했다. 일할 직원이 사라지고 고객이 줄자 기존의 산업기반은 쇠락했다. 오랜 기간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통해 전수되어 온 산업 노하우들도 사라지고 말았다. 사람이 빠져나간 황폐한 동독 도시들의 모습에 그나마 있었던 관광객의 발길도 줄고 있다. 이렇게 공동화된 동독의 도시들을 다시 살리기 위해 현재 독일 정부는 엄청난 재정을 투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지역 붕괴를 막기 위해서는 지역 기반의 사회적 경제의 역할이 매우 중요할 수 있었다. 늦었지만 독일 학자들이 자주 지적하는 이야기다.
통독과정에서 나타난 시행착오는 과도한 북한 인력의 이탈과 산업기반의 공동화 문제가 충분히 가능하고, 통합경제과정에서 남북한의 시너지를 훼손시키는 잠재적 암초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사회적 경제는 무엇보다도 지역공동체를 유지하며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원칙을 지향한다. 따라서 동독에서와 같은 인력 이탈과 산업기반 붕괴가 북한에서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하는 중요한 방파제가 될 수 있다.
북한의 산업지형, 혁신경제에 자산 될 수도
북한 전환경제에 대한 우리의 세 번째 비전은 혁신경제이어야 한다. 혁신경제의 비전은 우리나라의 기술력과, 북한의 산업지형이 제대로 발달하지 못한 점을 결합하는 역설적 발상을 필요로한다. <사피엔스>의 저자인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북한은 우리나라를 포함한 전 세계 어느 국가보다 무인 자율주행 자동차가 훨씬 빨리 보급될 수 있는 국가라고 보았다. 기존 자동차 제조산업과 도로 등 관련 산업 인프라가 제대로 발전하지 않은 점이 오히려 무인 자율 차 도입에 도움이 된다는 뜻이다. 혁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없음이 외려 중요한 자산일 수 있다. 불모지와 같은 북한의 산업지형은 우리 기업들과 협력해 새로운 혁신사업모델들을 과감히 시험할 수 있는 커다란 장이 될 수 있다. 북한이 이미 가진 정보통신 기술은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단, 여기서 우리가 놓쳐서 안 되는 사실은 혁신경제의 수혜자는 기성세대가 아닌 젊은 청년들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래야 한다. 짧게는 20년, 길게는 40~50년 후로 예상할 수 있는 북한과의 통합경제의 주체와 수혜자는 연령상으로 지금의 밀레니얼 세대이지 기성세대가 아니다. 따라서 남북한 통합경제의 비전은 밀레니얼 세대의 가치와 그들이 이끄는 시대적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어야 한다.
전 세계적으로 밀레니얼 세대들에서 나타나는 반 기득권 움직임에 주목해야 한다. 이들에게서 진보 내지 사회주의 지향성이 높아지고 있다. 2016년 미국 대선에서 진보 후보인 버니 샌더스에 대해 밀레니얼 세대가 보낸 지지는 도널드 트럼프와 힐러리 클린턴을 합친 표를 넘어섰다. 이러한 변화는 소련, 중국, 동구 등 과거 사회주의에 대한 향수(노스탤지어)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국가의 자원을 획득하고 분배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정부, 정치인, 기업들로 이루어진 기득권 세력의 그간 성과, 앞으로의 의지와 역량에 대해 불신과 분노이다. 반 기득권 주의인 것이다.
청년세대의 혁신성, 통합경제의 주춧돌
이제 우리의 의무는 통합경제의 주체가 될 밀레니얼 세대가 기득권적 제도를 넘어서 새로운 정치, 경제, 사회의 혁신을 실험하는 테스트장으로서 북한을 상정할 수 있도록 밑그림을 그려주는 일이다. 구태의연한 과거 방식의 정치경제 논리구조를 연장해 향후 남북한 통합경제의 포석을 전략으로 삼는다면 이는 시대의 역행이고 자식 세대에 대한 패악이다. 우리 후배와 자식들이 사회의 질적인 변화와 혁신을 시험할 수 있는 새로운 공간으로서 향후 북한과의 통합적 경제는 큰 의의를 갖는다.
북한 전환경제에서 우리의 밀레니얼 세대들이 자유롭게 새로운 사회혁신을 시도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도 사회적 경제 방식의 접근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사회적 경제가 혁신과 무슨 상관인지는 서울 성수동을 가보면 알 수 있다. 취업, 주거, 병간호, 소액금융, 위안부 문제 등 매우 다양한 사회문제에 대해 이전에 추구하지 않았던 혁신적 해결방안을 도입해 사업을 하는 스타트업들이 젊은이들에 의해 창업되고 있다. 이들 소셜 벤처에 민간투자가 유입되고 있다. 영리 기업들은 수익성이 낮아 뛰어들지 않고, 정부와 공공기관에서는 법적 근거가 없거나 예산의 부족 등으로 접근할 수 없는 사회문제들을 이들은 찾아내고 있다.
혁신적이고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사회문제를 들춰내어 해결하려는 사회적 경제의 방법론을 받아들일 때, 북한은 우리의 젊은 청년들에게 더 큰 기회의 장이 될 수 있다. 이들의 혁신성에 힘입어 통합경제는 사회적 가치와 경제적 가치를 융합하는 새로운 기회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한 시작을 우리가 사회적 경제의 문법으로 제시하고 북한이 이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문철우 성균관대 경영학부 교수· 임팩트금융 국가자문위원회(NAB) 대표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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