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이 총수 일가의 불법·비리로 기업·주주 가치가 훼손된 한진칼·대한항공에 대해 조양호 회장의 이사 연임 반대 등을 포함한 적극적 주주권을 행사하기로 사실상 방향을 결정했다.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에 따른 경영 참여에 첫발을 내딛게 됨에 따라 재벌 총수 일가의 전횡에 본격적으로 제동이 걸릴 전망이다.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이하 기금위)는 16일 한진그룹 조 회장 일가의 배임횡령·사익편취 등 불법비리와 ‘갑질’에 대한 수사·재판으로 기업·주주 가치가 훼손된 것과 관련해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 여부와 범위를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가 검토·보고하도록 결정했다.
기금위의 결정은 적극적 주주권 행사 방침을 확정하고 세부방안은 전문위에 검토를 지시할 것이라는 애초 예상 수준에는 못 미친다. 하지만 대다수 회의 참석자들이 조 회장 일가의 기업·주주가치 훼손에 대해 국민연금이 적극 대처해야 한다는 데 뜻을 모아, 적극적 주주권 행사라는 방향은 확정적이다.
이찬진 기금위 위원(참여연대 집행위원장)은 “회의에 참석한 절대다수는 국민연금의 적극적 주주권 행사에 찬성했다.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이후 첫 사례인 만큼 최대한 신중히 논의·처리하려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반대한 곳은 한국경영자총협회와 대한상의 등 3곳에 그쳤다.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은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다. 문 대통령은 건전한 시장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기업의 불·편법 지배·상속 방지, 소액주주의 이해관계 침해, 사외이사 임명 등 사안에 국민연금이 주주권을 적극 행사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국민연금은 주주권 행사에 소극적이라는 지적을 받아왔지만, 지난해 상반기 주총 때 총 2561개 안건 중 524건(20.5%)에 반대표를 던졌다. 과거 반대 의결권 비율은 10% 안팎에 머물렀다.
대한항공과 한진칼은 지난해 논란의 중심에 섰다. 조 회장의 딸인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와 부인인 이명희 전 일우재단 이사장의 전횡과 갑질 등이 드러났다. 검찰은 대한항공 기내물품 구입 과정에서 통행세를 챙기고, 고용약사 명의로 약국을 불법운영하며 1천억원대 부당이익을 얻는 등의 혐의(배임·사기·횡령 등)로 조 회장을 기소했다. 이로 인한 대한항공 등의 주가 급락으로 대한항공 11.70%와 한진칼 7.34%, 한진 7.41% 지분을 보유한 국민연금은 큰 손실을 봤다.
한진그룹 안팎에서는 조 회장 쪽의 안일한 대처가 국민연금의 적극적 주주권 행사의 명분을 제공했다는 지적이 많다. 국민연금은 지난해 대한항공에 경영진 일가의 일탈 행위와 해결 방안을 밝혀달라는 공개서한을 보내고, 경영진·사외이사를 비공개 면담했다. 그러나 대한항공은 “경영정상화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답변만 내놨다.
국민연금의 적극적 주주권 행사로 그동안 재벌총수가 불법행위와 일탈로 회사·주주에 큰 피해를 입히고도 책임지지 않아온 관행에 변화가 일 전망이다. 한진과 유사한 사례가 발생하면 같은 잣대를 적용할 수밖에 없다. 적극적 주주권 행사가 이뤄지면 국민연금의 입장 사전공시, 사외이사 후보 추천, 의결권 위임 대결, 주주대표소송 등이 가능하다. 당장 오는 3월 대한항공 주총 등에서 조 회장의 이사 연임을 놓고 표 대결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아졌다.
재계 일각에선 ‘연금사회주의’까지 거론하며 반발하고 있으나, 국민들의 노후자금을 보호하고 장기 기업가치 개선을 위해 국민연금이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김남근 변호사는 “총수 일가가 회사 가치를 크게 훼손했음에도 이사회는 한번도 이 문제를 다루지 않았다. 거수기로 전락한 이사회의 지배구조 개선 같은 적극적인 주주제안, 주주대표소송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곽정수 선임기자, 신민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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