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감 때마다 이야기하는 것 중 하나가 한국은행의 연구조사 기능인데, 한은이 수행한 수백건의 연구과제 목록을 봐도 이 정부 들어와서 가장 중요한 현안인 (소득주도 성장이라든지) 그런 것에 관해 연구한 게 없다.”(유승민 바른미래당 의원)
“한국은행은 국내 최고의 경제학 두뇌 집단이다. 박사만 145명으로 한국개발연구원(KDI) 80명의 두배인데, 경제현안에 제 목소리를 내는 때가 드물고 발간하는 보고서도 두루뭉술하다.”(박명재 자유한국당 의원)
지난달 22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의 한국은행 국정감사 때 나온 국회의원들의 지적이다. 조사·연구와 관련해 한은의 눈치 보기나 침묵이 심하다는 얘기였다. 실제 한은 내부에서도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은 (자기 나라 큰 이슈인) 브렉시트 보고서를 여럿 내놓는데, 한은은 최저임금이나 주 52시간제 등 현안에 대한 연구를 왜 안 하는지 모르겠다”(한 금통위원)는 자조섞인 반응이 나오고 있다. 경제와 관련한 그 나라 최고의 싱크탱크여야 할 중앙은행이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상황 정리·종합은 잘하는데 자기 의견은 없어
지난 9일 한은은 국회에 통화정책 수행 상황을 담은 통화신용정책보고서(2018년 11월)를 제출했다. 보고서는 통화정책 관련 주요 고려사항 가운데 한 꼭지로 ‘최근의 금융불균형 상황 점검 및 시사점’을 다뤘다. 금융불균형(가계부채 과다)에 대한 정책 대응은 정부의 거시건전성 정책으로 충분하다는 의견과 거시건전성 정책과 더불어 통화정책도 함께 활용해야 한다는 두가지 이론(주장)이 국제적으로 통용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국제통화기금(IMF)과 미국 연방준비제도(Fed)는 전자 쪽 견해를, 국제결제은행(BIS)은 후자 쪽에 가깝다고 소개했다. 하지만 정작 한은 자신의 견해는 없었다. 단순 소개·정리에 머무른 만큼 “향후 통화정책 운영시 금융안정에 대해 계속 유의할 필요가 있다”는 뻔한 결론이었다.
이와 관련해서 한 금통위원은 “그 보고서뿐만이 아니다.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하는 식으로 논리가 한참 전개되다가 갑자기 허무한 결론으로 이어지는 보고서들이 너무 많다”며 “어느 한쪽으로부터 비판 받을까 봐, 훗날 잘못된 견해로 판정될까 봐 두려워 현안에 대해 말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보고서 결론이 그렇게 나온다”고 말했다. 또 다른 금통위원은 “외국 중앙은행 등에서 새로운 시각으로 어떤 경제현상을 분석한 보고서를 내놓으면, 이걸 굉장히 잘 정리하고 요약해 보고서를 만든다. 그런데 정작 그런 시각으로 한국경제를 분석한 보고서는 만들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외에도 ‘맹탕 결론’ 보고서 사례들은 많다. 지난 5월 한은 조사국은 ‘주요국 재정정책 동향 및 평가’ 보고서(해외경제포커스)를 내놨다. 미국·중국·일본은 물론, 유럽 국가들과 신흥국들까지 포괄한 주요국들의 재정정책 동향을 두루 살핀 내용이었다. 하지만 한국의 재정정책에 대한 평가는 물론 외국 사례들이 주는 시사점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당시 이환석 한은 조사국장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국내 재정정책은 재정정책을 전문으로 다루는 (총리실 산하) 조세재정연구원이 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재정정책 전문기관인 조세재정연구원에서 해외사례 연구도 할 텐데, 한은은 왜 외국의 재정정책을 조사했을까? 이 국장은 아무런 답도 하지 못했다.
국감장의 단골 메뉴
“박사만 145명, KDI 두배인데…”
최저임금 등은 연구 안해
가상화폐도 뒷북 금통위원들의 탄식
“한참 전개되다 갑자기 허무 결론
그런 보고서 너무 많아” 2016년 가계부채 급등 때도
비상 호루라기 불기는커녕
‘많이 늘었지만 괜찮은 면도’
장단점 절반씩 기계적 소개 “이주열 총재의 30년 스타일”
욕먹고 싶어 하지 않고
정부와 다투기 싫어하는…
이 총재 “한은은 원래 나서는 곳이 아냐…” 내부 ‘부글’대지만
“인사 전권 총재의 방침 명확한데
누가 다른 목소리 내겠나…” 한은이 원래 그랬던 것은 아니다. 전철환 총재 시절이던 2001년 8월 한은 조사국은 1980년대 이후부터 외환위기 직후인 2000년까지 국내 재정정책 흐름을 진단한 ‘최근 재정운영이 경기에 미친 영향과 정책과제’ 보고서(조사통계월보)를 발표했다. 보고서 말미에 △재정운영 중간평가제도 도입 △세출·세입 예측능력 강화 △세율의 하향조정 검토 △일반회계 및 특별회계에 공공기금까지 더한 통합재정 기준 예산 편성 등 향후 과제가 제시됐다. 재정정책의 투명성과 전문성을 강화하라며 정부에 쓴소리하고, 국회 권한인 세율 조정에 대해서 까지 한은이 자기 목소리를 낸 것이다. 지난달 국감 때 현안에 대한 연구가 없다는 지적에 이주열 한은 총재는 “나름대로 견해를 가지고 정부하고는 정보를 공유한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어떤 수준의 공유가 이뤄질까? 가계부채가 7분기째 10%대 증가율을 이어가고 있던 2017년 3월16일, 한은은 기획재정부·금융위원회·금융감독원 등과 함께 연 거시경제금융회의에 ‘2016년 가계신용 현황 및 향후 전망’ 보고서를 제출했다. 추경호 자유한국당 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당시 보고서를 보면, 한은은 “2016년 말 현재 가계부채는 1344조3천억원으로 전년 말 대비 11.7% 증가해 이례적으로 급증했던 2015년 수준을 상회한다”고 지적했지만 “부채보유 차주 및 가구의 소득·신용·자산 측면에서 상위계층의 부채점유 비중이 높은 수준을 유지한 가운데 부채구조도 개선됐다”고 밝혔다. 채무상환 능력과 관련해 “소득흐름(flow) 측면에서는 점차 약화되고 있으나 자산(stock) 측면을 고려하면 양호한 수준”이란 평가도 뒤따랐다. 한국경제의 가장 큰 근심거리가 된 가계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어가고 있던 때에 ‘비상 호루라기’를 불기는커녕 ‘많이 늘었지만 괜찮은 면도 있다’며 장단점을 기계적으로 절반씩 정리·소개한 것이다. 지난해 말 가상화폐가 큰 이슈로 떠올랐을 때도 이를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여야 할 곳은 독점적 발권력을 가진 한은이었지만, 한은은 사실상 정부(법무부·금융위) 뒤에 숨었다. 논란이 잠잠해진 뒤인 올해 초에야 가상통화연구반을 발족시킨 게 전부다. “돌다리가 깨질 때까지 두들기고 안 건너는 사람” 한은이 수많은 연구인력을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현안에 침묵하는 이유는 뭘까? 한은 안팎에서는 여·야, 진보와 보수 어느 한쪽으로부터도 욕먹고 싶어하지 않고 정부와 다른 목소리를 내거나 다투는 것으로 비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이주열 총재 스타일을 지목한다. 인사에 관한 한 전권을 행사하는 총재의 방침이 명확한데, 어느 누가 다른 목소리를 내겠냐는 것이다. 지난 10월 초 한은 기자단 체육행사에서 이 총재는 족구 등 여러 종목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에 질의·응답 시간에 한 기자가 “운동할 때처럼 업무에서도 적극적인 모습을 기대한다”고 말하자, 이 총재는 당황한 표정으로 “한은은 원래 나서는 곳이 아니라, 신중하게 일을…” 이라며 속내를 드러냈다. 한은 한 고위 관계자는 이 총재를 두고 “돌다리가 깨질 때까지 두들겨보기만 하고 절대 건너지 않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이 총재의 그런 신중한 처신이 누적되면서, 과거 재무부 남대문출장소로 불렸던 한은은 이제 속세(현안)에서 떨어져 있는 절간(‘한은사’, ‘척척사’)에 비유되고 있다. 하지만 내부에서 변화의 조짐을 바라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한은 한 직원은 “누구와도 척지지 않으려는 그런 스타일로 30여년을 살아오면서 총재까지 되고, 심지어 정부가 바뀌었는데도 연임까지 됐다. 그런 사람에게 다른 소리가 들리겠느냐”고 말했다. 또 다른 직원은 “수뇌부가 이주열 스타일에 딱 맞는 이들로 꾸려져 있는데, 무슨 변화를 기대하느냐”고 말했다. 한 금통위원은 “무조건 비판하란 게 아니라, 자신의 시각에서 때론 긍정적으로, 때론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게 쌓여가면 정부로서도 한은을 더 인정해줄 텐데…. 생각이 다른 걸 어떻게 하겠느냐”고 말했다. 이순혁 기자 hyuk@hani.co.kr
“박사만 145명, KDI 두배인데…”
최저임금 등은 연구 안해
가상화폐도 뒷북 금통위원들의 탄식
“한참 전개되다 갑자기 허무 결론
그런 보고서 너무 많아” 2016년 가계부채 급등 때도
비상 호루라기 불기는커녕
‘많이 늘었지만 괜찮은 면도’
장단점 절반씩 기계적 소개 “이주열 총재의 30년 스타일”
욕먹고 싶어 하지 않고
정부와 다투기 싫어하는…
이 총재 “한은은 원래 나서는 곳이 아냐…” 내부 ‘부글’대지만
“인사 전권 총재의 방침 명확한데
누가 다른 목소리 내겠나…” 한은이 원래 그랬던 것은 아니다. 전철환 총재 시절이던 2001년 8월 한은 조사국은 1980년대 이후부터 외환위기 직후인 2000년까지 국내 재정정책 흐름을 진단한 ‘최근 재정운영이 경기에 미친 영향과 정책과제’ 보고서(조사통계월보)를 발표했다. 보고서 말미에 △재정운영 중간평가제도 도입 △세출·세입 예측능력 강화 △세율의 하향조정 검토 △일반회계 및 특별회계에 공공기금까지 더한 통합재정 기준 예산 편성 등 향후 과제가 제시됐다. 재정정책의 투명성과 전문성을 강화하라며 정부에 쓴소리하고, 국회 권한인 세율 조정에 대해서 까지 한은이 자기 목소리를 낸 것이다. 지난달 국감 때 현안에 대한 연구가 없다는 지적에 이주열 한은 총재는 “나름대로 견해를 가지고 정부하고는 정보를 공유한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어떤 수준의 공유가 이뤄질까? 가계부채가 7분기째 10%대 증가율을 이어가고 있던 2017년 3월16일, 한은은 기획재정부·금융위원회·금융감독원 등과 함께 연 거시경제금융회의에 ‘2016년 가계신용 현황 및 향후 전망’ 보고서를 제출했다. 추경호 자유한국당 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당시 보고서를 보면, 한은은 “2016년 말 현재 가계부채는 1344조3천억원으로 전년 말 대비 11.7% 증가해 이례적으로 급증했던 2015년 수준을 상회한다”고 지적했지만 “부채보유 차주 및 가구의 소득·신용·자산 측면에서 상위계층의 부채점유 비중이 높은 수준을 유지한 가운데 부채구조도 개선됐다”고 밝혔다. 채무상환 능력과 관련해 “소득흐름(flow) 측면에서는 점차 약화되고 있으나 자산(stock) 측면을 고려하면 양호한 수준”이란 평가도 뒤따랐다. 한국경제의 가장 큰 근심거리가 된 가계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어가고 있던 때에 ‘비상 호루라기’를 불기는커녕 ‘많이 늘었지만 괜찮은 면도 있다’며 장단점을 기계적으로 절반씩 정리·소개한 것이다. 지난해 말 가상화폐가 큰 이슈로 떠올랐을 때도 이를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여야 할 곳은 독점적 발권력을 가진 한은이었지만, 한은은 사실상 정부(법무부·금융위) 뒤에 숨었다. 논란이 잠잠해진 뒤인 올해 초에야 가상통화연구반을 발족시킨 게 전부다. “돌다리가 깨질 때까지 두들기고 안 건너는 사람” 한은이 수많은 연구인력을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현안에 침묵하는 이유는 뭘까? 한은 안팎에서는 여·야, 진보와 보수 어느 한쪽으로부터도 욕먹고 싶어하지 않고 정부와 다른 목소리를 내거나 다투는 것으로 비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이주열 총재 스타일을 지목한다. 인사에 관한 한 전권을 행사하는 총재의 방침이 명확한데, 어느 누가 다른 목소리를 내겠냐는 것이다. 지난 10월 초 한은 기자단 체육행사에서 이 총재는 족구 등 여러 종목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에 질의·응답 시간에 한 기자가 “운동할 때처럼 업무에서도 적극적인 모습을 기대한다”고 말하자, 이 총재는 당황한 표정으로 “한은은 원래 나서는 곳이 아니라, 신중하게 일을…” 이라며 속내를 드러냈다. 한은 한 고위 관계자는 이 총재를 두고 “돌다리가 깨질 때까지 두들겨보기만 하고 절대 건너지 않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이 총재의 그런 신중한 처신이 누적되면서, 과거 재무부 남대문출장소로 불렸던 한은은 이제 속세(현안)에서 떨어져 있는 절간(‘한은사’, ‘척척사’)에 비유되고 있다. 하지만 내부에서 변화의 조짐을 바라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한은 한 직원은 “누구와도 척지지 않으려는 그런 스타일로 30여년을 살아오면서 총재까지 되고, 심지어 정부가 바뀌었는데도 연임까지 됐다. 그런 사람에게 다른 소리가 들리겠느냐”고 말했다. 또 다른 직원은 “수뇌부가 이주열 스타일에 딱 맞는 이들로 꾸려져 있는데, 무슨 변화를 기대하느냐”고 말했다. 한 금통위원은 “무조건 비판하란 게 아니라, 자신의 시각에서 때론 긍정적으로, 때론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게 쌓여가면 정부로서도 한은을 더 인정해줄 텐데…. 생각이 다른 걸 어떻게 하겠느냐”고 말했다. 이순혁 기자 h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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