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의 노동자협동조합 GSD는 학생들이 서로 소통하고 협력하며 배우는 협동학습을 중요시한다. 학교 복도엔 학생들의 다양한 협동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사립유치원의 공공성을 강화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박용진 3법’을 둘러싼 여야간 입장 차이가 크다. 물론 사립유치원 전체를 비리집단으로 몰아붙여선 안 된다. 하지만 지금까지 교육기관으로서의 공공성에 대한 논의가 부족했던 건 사실이다. 지난달 19일 교육부가 비리신고센터를 개통한 뒤, 공·사립유치원 비리 관련 제보가 200건 가까이 접수됐다. 사립유치원의 경우, ‘사립’이라고는 하지만 사설 학원과 달리 정부 지원금을 받는 공적 교육기관이다. 정부는 2013년부터 누리과정 예산으로 해마다 2조원 가까이 유치원 교육을 지원하고 있다. 지원은 받되 공공성과 투명성은 외면할 수는 없는 일이다.
헌법은 제31조 1항에서 교육받을 권리를, 2항에서 자녀에게 교육을 받게 할 의무를 명시하고 있다. 이처럼 교육은 헌법상 권리로서 시장 논리만으로 접근할 수 없다. 정부 지원금을 비롯해 많은 사회적 자원이 결합된다. 그럼에도 사립이라는 말은, 개인의 사적 재산으로 보이도록 하는 효과를 낸다. 그렇다면 교육기관이 사회적으로 소유되고 운영될 수는 없을까.
■ 1500명의 교사·행정직원 중 1200명이 조합원
정답은 ‘가능하다’다. 협동조합이 발달한 유럽에서는 협동조합 학교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이탈리아 북부지역 레지오 에밀리아 로마냐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종결 후 학부모와 주민들이 협동조합 방식으로 유치원을 짓기 시작했다. 이런 노력은 교육개혁을 목표로 하는 교사들과 결합했고 1968년 유아를 위한 공립유아 학교에 대한 새로운 법이 통과돼 시립체제로 전환됐다. 태생부터 어린이, 학부모, 교사의 상호협력적인 방안으로 시작된 셈이다. 이러한 교육철학은 다른 나라에도 많은 영향을 줘서 1992년 <뉴스위크>는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학교 10곳”의 하나로 유아교육 분야에서 레지오 에밀리아를 선정했다.
스페인 마드리드 인근에 자리잡은 GSD 국제학교 전경.
유치원만이 아니다. 영국에서는 2008년부터 교직원·학생·학부모·지역사회가 함께 운영하는 협동조합 초·중·고가 늘어나고 있다. 지난 2016년 1월 <에스비에스>(SBS)에서 방영된 <협동조합은 학교다>를 통해 우리나라에도 널리 소개됐다. 구성원들이 함께 참여하는 협동조합 방식으로 운영될 뿐만 아니라 교육과정과 학생들의 동아리 활동에도 협동조합 원리가 적용된다.
눈겨여봐야할 사례는 또 있다. 주인공은 스페인의 교사 중심 노동자협동조합인 GSD(Gredos San Diego Cooperative, www.gredossandiego.com)다. GSD가 위치한 마드리드는 스페인의 수도인데, 20세기 전반 내전이 끝난 후 갑작스레 도시가 팽창하는 과정에서 여러 사회서비스가 원할하게 제공되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1985년 교사를 중심으로 18명이 모여 학교 설립을 준비했다. 그럼에도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자금이 부족했기에 정부로부터 인가를 받는 데 필요한 설비를 곧장 갖출 수는 없었다. 결국 1994년 9월에 이르러서야 정식 인가를 받은 학교가 지어졌다. 이후 다른 지역에서도 비슷한 요구가 등장했다. 두번째 학교가 설립된 건 1999년. 8개의 협동조합 학교가 스페인 안에 차례대로 들어섰다.
현재 8개 학교에 다니는 학생은 모두 1만5천 명. 영유아부터 초중교 교육까지 함께 이뤄진다. 1500명의 교사·행정직원 중 1200명이 조합원으로 이 학교의 공동 주인이다. 조합원이 되기 위해서는 일정 기간 근무 후 2만5천 유로(약 3200만원)를 출자금으로 내야 한다. 협동조합 학교이지만 재정의 40%는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는다. 나머지는 학교 자체의 운영과 학부모들이 학교에 다달이 내는 회비로 충당된다. 마드리드의 상위 사립학교가 한달에 700유로(약 90만원)을 내는데 반해, GSD는 5분의1 수준인 140유로(18만원)를 내고도 사립학교와 비슷한 수준의 방과후 프로그램 등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운영방식은 철저히 협동조합 원리를 따른다. 애초부터 지역에 필요한 교육을 제공하겠다는 이념으로 세워졌기에 지속가능한 경영 못지 않게 공공성이 매우 중시된다. 이들이 마련한 해법은 학교 시설을 최대한 활용하는 방안. 직원들은 교대로 아침 6시부터 밤 11시까지 학교를 운영한다. 통상 일반 학교 수업이 8시부터 오후 5시 반까지 이뤄지는 것과는 다르다. 아침 일찍부터 운영되는 건 맞벌이 부부들을 위해 아침밥을 제공하기 위해서다. 오후 5시 반부터 8시까지는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선택해 다양한 방과후 활동에 참가할 수 있다. 8시 이후 시간엔 어른들을 위한 평생학습 프로그램이 제공된다. 부가적인 수익 창출 방안이기도 하지만, 지역사회를 위한 서비스이기도 하다. 이 학교의 국제교류팀장 호르게 씨는 “노동자 조합원으로서 주체적으로 일하기에 가능하다”며 “우리들은 학교를 통해 지역을 바꿔 나가고 싶다”고 말했다.
GSD의 방과후 프로그램 모습을 설명하는 국제팀장 호르게 씨(왼쪽). 뒤로는 덤블링을 연습하는 학생들의 모습이 보인다.
■ 정부, 사회적협동조합도 유치원 설립 길 열어줘
GSD는 나라 밖으로도 눈을 돌리고 있다. 협동조합 학교 운영 노하우를 토대로 학교가 필요한 카메룬 등에 GSD 방식의 학교를 지어가고 있는 것. GSD만의 독특한 협동학습을 받고자 하는 학생들을 위한 국제학교를 열었다. 40개 나라의 학교들과 자매결연을 맺고 학생과 교사를 교환하기도 한다. 일본 초등학교 사회과 교사인 쿄헤이 타나카도 GSD에 와서 체육활동을 가르치며 교육 시스템을 배우고 있는 사람 중 하나다. “일본에 비해 학생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얘기하다가도 동시에 공동체적 규율은 잘 지키는 점이 인상적이여서 일본에서도 이러한 협동학교를 만들고 싶다.”
협동조합 학교가 먼 나라의 일일까?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에서는 2013년 영림중, 복정고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80개가 넘는 학교협동조합이 생겨났다. 대부분 학교 안의 매점을 학생·교사·학부모가 함께 협동조합 방식으로 소유하고 운영하는 소비자협동조합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특성화고를 중심으로 학생들이 생산자로서 활동하는 창업모델로 발전해가고 있다. 교육부도 학교협동조합의 교육적 가치에 주목해 지난 9월 학교협동조합 지원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설령 협동조합 형식을 갖추고 있지는 않더라도, 학생과 교사, 학부모가 주인이 되는 협동조합 운영모델을 택하고 있는 대안학교들도 많다.
이와 관련해 지난달 30일 국무회의에서 ‘고등학교 이하 각급학교 설립?운영규정’을 개정해 사회적협동조합도 국가·지방자치단체·공공기관의 시설을 임차해 유치원을 설립할 수 있도록 한 건 주목할 만하다. 이제 유치원만이 아니라 초중고, 대학까지도 협동조합 운영을 통한 공공성 강화를 논의해볼 수 있는 시점이다. 개인 소유가 아닌, 학교 구성원과 지역사회가 함께 소유하고 운영하는 협동조합 방식의 교육기관이 유럽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글·사진 주수원 전국학교사회적협동조합연합회 정책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