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경북 안동 성곡동에 위치한 전통리조트 ‘구름에’ 북카페 앞에서 전미경 안동관광두레 피디(왼쪽부터)와 김혜경 안동식선 대표, 남경훈 구름에 매니저가 함께 웃고 있다. 안동/박은경 연구원
1980년대 말 유럽을 비롯한 영미권 나라들을 중심으로 ‘공정여행’ 운동이 일어났다. 단지 즐기기만 하는 여행이 초래하는 환경오염과 지역 문화 파괴 등의 폐해뿐 아니라 무절제한 소비 행태에 대한 반성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부터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대등한 관계에서 거래하는 공정무역에서 이름을 따온 공정여행은 2000년대 초 우리나라에도 본격 소개됐다.
그간 일부 시민활동가와 사회적기업을 중심으로 펼쳐졌던 국내 공정여행에도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단지 운동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지역 경제를 되살리고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해법으로 당당히 주목받기 시작한 것이다.
버려진 한옥 고택을 최신 리조트로
지역의 문화유산을 활용해 관광 생태계 조성에 앞장서는 경북 안동의 전통리조트 ‘구름에’는 공정여행의 무한한 잠재력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 사례 중 하나다. 댐 건설로 수몰 위기에 놓인 안동의 한옥 고택들은 문화재로 지정되지 못했다. 안동시가 값비싼 한옥 수리 비용을 감당하기 버겁다 보니, 한옥 고택들은 수십년간 방치된 채로 남아 있었다. 2012년 6월 문화체육관광부와 경상북도, 안동시, 에스케이(SK)는 버려진 안동 고택을 활용할 방안을 찾기 위해 머리를 맞댔다. 이들은 4자간 양해각서를 맺고, 고택 관리와 운영을 맡을 사회적기업 ‘행복전통마을’을 탄생시켰다. 이런 과정을 거쳐 2014년 7월 세상에 선을 보인 것이 한옥 고택 7채를 최신 호텔 리조트로 탈바꿈시킨 ‘구름에’다.
안동 성곡동 산자락에 보금자리를 튼 구름에는 지역 문화 콘텐츠를 갖춘 지역 업체와 지역 활동가들의 협력을 핵심 운영 원칙으로 삼는다. “구름에는 다양한 기관들이 힘을 합쳐 만든 지역 관광유산이에요. 지역의 관광업체와 주민들의 협력 없이는 성장할 수 없습니다. 지역 관광 생태계가 바로 서고 지역 경제가 활성화되어야 구름에도 지속될 수 있죠.” 권경은 행복전통마을 사무국장은 지역 관광 생태계의 일원으로서 구름에가 담당하는 역할을 강조했다.
실제로 구름에는 장기적인 지역 관광 네트워크를 만드는 데 힘을 쏟고 있다. 리조트 내 북카페를 운영하는 안동식선을 비롯해 고추장과 가양주 만들기 등 문화 체험 활동을 제공하는 안동반가, 한옥 라운지를 운영하는 안동풍류 등 현재 협력관계를 맺고 있는 지역 사업체만 세 곳이다.
지난 15일 제주 탐라문화광장에서 열린 제주 사회적경제 한마당 박람회에 참가한 하례감귤점빵협동조합 부스 앞에서 윤순희 제주생태관광 대표가 감귤빵 바구니를 들고 있다. 제주/박선하 연구원
지역 주민들과 함께하는 ‘효돈천 트레킹’
이른바 ‘오버투어리즘’(과잉관광)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글로벌 도시들은 이제 도시 주민들의 살 권리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추세다. 도시 문화와 역사를 만들어온 주체인 주민들이 도시를 떠나버린다면 결국 관광객들도 도시를 외면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주민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건 물론이다. 제주의 공정여행 사회적기업인 ‘제주생태관광’의 활동이 눈길을 끄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2005년 제주지역 참여연대 활동가들이 힘을 모아 만든 제주생태관광은 지역 환경을 훼손하는 근본 원인이 외부 대자본이 주도하는 개발 위주의 관광 정책에 있다고 봤다. 몇년간의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이들은 기존의 정책 틀을 뜯어고치기 위해서는 주민들의 협력이 절실하다는 걸 깨달았다. 윤순희 제주생태관광 대표는 “일부 공정여행 활동가들의 힘만으론 소비와 개발 위주의 관광 구조를 쉽게 바꿀 수 없었다”며 “주민 공동체가 움직이니 얘기가 달라지더라”고 말했다.
제주생태관광은 농한기 주민들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놀거리를 관광 체험 상품으로 제안했다. 서귀포시 남원읍 하례마을의 ‘효돈천 트레킹’도 주민들이 함께 마을 하천과 계곡을 따라 트레킹하다 만든 프로그램이다. 효돈천을 따라 자리잡은 기괴한 바위들도 장관이지만, 관광객들은 반나절 동안 트레킹을 즐기며 마을 문화와 역사를 소개하는 주민 가이드의 열정에 감동받는다. 환경 보호를 위해 하루 트레킹 인원도 엄격히 제한하고, 마을 활동가와 동행하는 원칙도 고수한다. 몇몇 시민단체만 알음알음 찾던 이 프로그램은 이제 일반 가족여행객들이 즐겨 찾을 정도로 유명해졌다.
효돈촌 트레킹과 자연스레 연계한 주민 사업도 활발하다. 술빵에 감귤 과피를 넣은 감귤빵 사업이 대표적이다. 하례리 주부들은 감귤점빵협동조합을 설립해 판매에 나서는 등 다양한 지역 관광상품 개발에 너나없이 앞장서고 있다.
경기도 시흥에서 공정여행 협동조합 동네봄을 운영하는 여섯명의 주부 여행 디자이너들. 2016년 2월 문을 연 주민 여행사 동네봄은 시흥의 지역 자산을 발굴해 엄마들의 감성을 입힌 관광 프로그램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 시흥/박은경 연구원
도자기 터 연계한 ‘헌접시줄게 새접시다오’
주민들이 처음부터 직접 여행사를 설립해 공정여행에 뛰어든 사례도 있다. 경기도 시흥의 공정여행 협동조합 ‘동네봄’은 지역 토박이인 주부 여섯명이 모여 만든 주민 여행사다. 지역색을 십분 살리면서도 엄마들의 섬세한 감성이 잘 녹아든 관광 프로그램들을 마련해 커다란 호응을 얻고 있다. 명절 기간 쌓인 주부들의 스트레스를 접시를 깨며 유쾌한 방식으로 풀도록 한 ‘헌접시줄게 새접시다오’는 지역 주부들 사이에서 인기 상품이다. 주민들에게 외면받던 국가사적 도자기 터와 아트 뮤지엄을 연계해 지역 예술문화지를 소개하고 도자기를 빚는 활동으로 이어지게끔 한 게 특징이다. 버려진 옛 어촌 공판장도 동네봄에는 새로운 관광 아이템이 된다. 그물, 함지박, 부표 등 어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도구들로 한바탕 어촌 운동회를 여는 운동장으로 거듭났다.
“지역에 나만 알기엔 아까운 장소, 가게, 사람들이 다들 하나씩 있잖아요. 같이 재밌게 묶어 소개하면 좋겠다 해서 가볍게 시작했는데, 함께하는 지역 업체들이 늘어나고 참여하고 응원해주시는 주민들이 많아져 여기까지 왔네요.” 김순영 동네봄 대표는 지금까지 여행사를 끌고 온 원동력을 주민들의 참여에서 찾았다.
동네봄은 더 많은 지역 주민들이 공정여행의 참뜻을 깨달을 수 있도록 공정여행 교육에도 힘을 쏟고 있다. 최근에는 다문화가정이 주축이 된 정왕본동의 주민 여행 단체 설립을 돕기도 했다.
“대기업 위주 관광산업 구조 바뀌어야”
공정여행이 국내에 들어온 지 어언 10여년. 현재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공정여행사만 20여곳에 이른다. 하지만 아직은 갈 길이 멀다. 공정여행을 둘러싼 현실이 녹록지 않은 탓이다. 무엇보다 저가 덤핑 관광에 익숙한 국내 소비자들은 공정여행사들이 제시하는 가격 수준에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 공정여행사들의 사업기반이 튼튼하지 못한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소규모 여행객들 위주로 상대하고 관련 업체들과 공정한 거래관계를 맺다 보면 으레 적자를 보는 건 불 보듯 뻔한 상황이다. 오랜 기간 공정여행 운동에 몸담아온 임영신 이매진피스 대표는 “공정여행 상품 홍보와 보조금 지원만으론 대기업 중심의 관광 구조를 바꿀 수 없다”며 “정부의 관광 정책이 도시민의 정주권과 삶의 질 향상을 목표로 할 때 공정여행도 주민들의 삶도 나아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대기업 위주의 관광산업 구조, 수익성만을 목표로 삼는 관광 정책이 변해야만 공정여행이 튼튼하게 뿌리내릴 수 있다는 얘기다.
안동 시흥/글·사진 박은경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시민경제센터 연구원 ekpark@hani.co.kr
<공정여행 십계명>
1. 지구 돌보기(비행기 이용 줄이기, 물 낭비하지 않기)
2. 다른 이의 인권 존중(직원에게 적정 근로조건을 지키는 숙소·여행사 선택)
3. 성매매하지 않기
4. 지역에 도움 되기(현지인이 운영하는 숙소·음식점 이용하기)
5. 윤리적 소비(과도한 쇼핑 하지 않기, 공정무역 제품 이용)
6. 친구가 되는 여행(현지 인사말 배우고 노래와 춤 배우기)
7. 다른 문화 존중
8. 상대 존중, 약속 지키기
9. 기부하기(여행경비의 1%는 현지 단체에 기부)
10. 행동하는 여행(세상을 변화시키는 여행)
* <희망을 여행하라>(임영신 지음)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