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워런 미국 매사추세츠주 상원의원(민주당)이 지난 21일 워싱턴의 내셔널 프레스클럽에서 연설하고 있다. 민주당의 차기 대선주자 중 한 명인 워런 의원은 미국 사회의 불평등을 해결할 새로운 해법으로 지난 15일 ‘책임 있는 자본주의법’을 발의했다. 게티이미지/AFP 연합뉴스
지금부터 꼭 10년 전인 2008년 9월 초. 세계 경제의 심장부인 미국 뉴욕 월스트리트에서 ‘대지진’이 일어났다. 160년 전통의 세계 4위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가 결국 파산 신청을 내고 무대 뒤로 사라졌다. 전세계를 집어삼킨 금융위기의 신호탄이었다. 위기의 불씨는 실물 부문으로 빠르게 옮겨붙었다. 얼마 뒤 미국 정부는 8천억달러(당시 환율로 약 1200조원) 규모의 구제금융 계획을 서둘러 내놓아야 했다.
10년 뒤.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갤럽이 최근 미국에서 실시한 조사 결과는 흥미롭다. 18살에서 29살 사이의 이른바 밀레니얼 세대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절반을 밑돌았다(45%). 금융위기의 여진이 남아 있던 2010년(68%)보다도 낮은 수치다. 사회주의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51%였다. 과연 자본주의는 매력을 잃어버리고 만 것일까.
정관에 ‘공공의 이익’ 조항 명시해야
미국 민주당의 유력 정치인인 엘리자베스 워런 매사추세츠주 상원의원(68)이 지난 15일(현지시각) 발의한 ‘책임 있는 자본주의법’(Accountable Capitalism Act)은 대수술을 통해 상처 난 자본주의를 되살려내자는 근본처방이라 할 만하다.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 출신으로 파산법 분야 전문가인 워런은 소비자금융 보호 분야에서 열성적으로 활동했고,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소비자금융 보호관리국 특별고문으로 일한 바 있다. 1949년생인 워런은 현재 각종 여론조사에서 버니 샌더스(1941년생) 버몬트주 상원의원, 조 바이든(1942년생) 전 부통령과 더불어 민주당 대권주자 ‘빅3’ 구도를 이루는 인물이다. 두 사람에 비해 상대적으로 젊고 참신할뿐더러 전문성을 갖춘 여성 정치인이라는 점도 장점으로 꼽힌다. 사실상 워런의 차기 대선 프로젝트의 얼개를 이루는 이번 법안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
법안의 주된 내용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연방법인’ 인가제 도입. 전년도 연간 총수입이 10억달러(약 1조원) 이상인 모든 미국 기업은 연방법인(US Corporation) 인가를 별도로 받아야 하며, 이를 위해 상무부 안에 연방법인국을 신설해 대통령이 의회의 동의를 받아 연방법인국장을 임명한다. 특히 연방법인은 정관의 목적조항에 주주의 재무적 이해뿐 아니라, 해당 기업과 계열사 및 협력업체 노동자, 소비자, 지역공동체 등 ‘전반적인 공공의 이익’(이해관계자)을 위해 활동한다는 내용을 명시해야 한다.
전세계에 몰아친 금융위기 이후 등장한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의 한 장면. 시민들이 미국 뉴욕 리버티광장을 점거한 채 시위를 벌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둘째, 노동자 경영 참여 보장. 연방법인 이사회 구성원의 40% 이상은 노동자에 의해 선출돼야 하며, 선출 방법은 증권거래위원회(SEC)와 노동위원회(NLRB)가 협의해 정한다. 이를 어길 경우 노동부 장관은 해당 기간 1일당 5만~10만달러의 과징금을 부과하고, 연방법인국장은 연방법인 인가를 취소할 수 있다. 또 연방법인이 연방 및 주 선거를 포함한 모든 정치활동에 자금을 지출하려면 주주 75% 및 이사회 75%의 동의를 모두 얻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경영자 보수 제한 규정. 연방법인의 경영진은 해당 법인의 주식을 취득한 뒤 5년 안에 처분할 수 없다. 이를 어길 경우 증권거래위원회가 처분 시점의 공정가치 이상의 금액을 과징금으로 부과한다.
경영자-직원 급여 격차 312 대 1
책임 있는 자본주의법(안)을 관통하는 문제의식은 기업(자본)에 일방적으로 유리하게끔 기울어진 힘의 균형추를 1980년대 이전 시기, 즉 ‘자본주의 황금시대’의 모습에 최대한 가깝게 되돌리자는 것이다. 주정부의 권한인 현행 미국 회사법의 뼈대는 건드리지 않는 대신 연방 차원의 감시·감독 기능을 강화하려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동부 대서양 연안에 위치한 델라웨어주의 현실이 상징적이다. 미국에서 둘째로 작은 주인 델라웨어엔 미국 상장법인의 50% 이상이 등기부상 본사 소재지를 두고 있다. 윌밍턴의 ‘노스오렌지가 1209번지’는 무려 31만5천여개의 회사가 등록돼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기업을 상대로 각종 혜택을 제공하며 열악한 주 재정을 쥐꼬리만한 법인세 수입으로 만회하려는 ‘바닥을 향한 경주’가 계속되는 한 기업활동에 대한 정당한 감시·감독 기능조차 맥없이 무장해제 당하기 일쑤다. 워런이 발의한 법안대로라면 미국 내 상장기업 약 3500곳에 대한 감시·감독 기회가 확대된다.
워런은 오로지 주주가치만을 극대화하려는 행동원리가 대기업 최고경영자의 머릿속에 뿌리 깊게 똬리를 틀고 있다는 사실에 특히 주목한다. 경영진 입장에선 기업의 순자산가치 대비 시장가치 비율(‘Q 비율’)을 높여 해당 기업의 주가를 끌어올리고자 끝없이 비용절감(구조조정)과 과소투자에 나설 유인이 충분한 셈이다. 실제로 2007년에서 2016년 사이 미국 대기업 이윤의 93%가 주주배당으로 돌아갔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이 과정에서 해당 기업의 주식을 보유한(스톡옵션) 최고경영진과 일반 직원의 보수 격차가 갈수록 확대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경제정책연구소(EPI)가 최근 발표한 자료를 보면, 2017년 기준으로 미국 상위 350대 기업의 최고경영자와 종업원의 평균 급여 격차는 무려 312 대 1로 나타났다.
엘리자베스 워런 미국 상원의원이 지난해 11월 공화당의 감세 정책에 반대하기 위해 워싱턴의 의사당 앞에서 열린 집회에서 연설하고 있는 모습.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 누리집
주가 20% 떨어진다는 ‘공포 마케팅’ 등장
냉정하게 따져봤을 때, 책임 있는 자본주의법(안)에 담긴 내용이 당장 현실화되리라 보긴 힘들다. 오는 11월 치러질 중간선거 결과에 따라 내년 회계연도부터 입법화에 탄력이 붙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순 없겠으나, 넘어서야 할 장벽이 만만찮다. 기업활동을 옥죄는 새로운 규제일뿐더러, 이윤을 극대화하고 주주가치를 높이려는 유인이야말로 자본주의의 생명력이라는 고전적 형태의 반론이 재계를 중심으로 무성하다. 심지어 주가가 20% 이상 떨어져 경제 전반에 악영향을 끼치리라는 ‘공포 마케팅’도 한창이다. 정작 공동결정제를 시행하는 독일에서 노동자의 실질임금이 10여년째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엄연한 현실도 이 법안의 기대효과에 의문부호가 뒤따르는 요인이다. 법안 자체의 한계도 빼놓을 수 없다. 워런이 모델로 삼고 있는 독일 공동결정제의 경우 이사회가 집행이사회와 감독이사회로 나뉘어 있으나, 공개된 법안에선 상당 부분 모호한 상태로 남아 있다.
그럼에도 한번쯤 되새겨볼 만한 시사점 또한 적지 않다. 무엇보다 워런의 실험은 미국 사회의 불평등 문제에 접근하는 ‘새로운 상상력’의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정부지출 확대를 특징으로 하는 전통적인 의미의 사회복지 강화(재분배) 전략과는 결이 조금 다른 길을 걷고 있어서다. 예컨대 전국민 의료보험 확대, 국공립대학 무상등록금과 같은 낯익은(!) 의제는 이른바 ‘더 큰 정부’의 상징이다. 이에 반해 워런은 기업의 지배구조 자체에 칼날을 들이대고 경영진의 행동 인센티브 구조 변화를 꾀하는 미시적 전략에 방점을 찍는다. 불평등 해소를 이야기하면서도 증세와 재정부담 논란에서 한걸음 비켜나 있는 건 이 때문이다.
엘리자베스 워런 미국 상원의원은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 출신의 파산법 분야 전문가로, 현재 각종 여론조사에서 민주당 내 차기 대권주자 ‘빅3’ 구도를 이루고 있다. 위키미디어
주주가치를 절대시해선 안 된다는 워런의 주장도 경제민주화 논의 지평을 한단계 넓히는 디딤돌로 삼을 수 있다. 정승일 사무금융노조 정책연구소장은 “한국 사회에선 재벌 총수(가문) 등 소수 지배주주의 전횡을 막는 게 급선무임은 분명하다”고 전제한 뒤 “소유권이 아니라 통제(컨트롤)의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기업의 주인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도 다른 사고를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
“새로운 딜(거래)을 주장해야 한다”
무엇보다 연방법인 ‘면허장’(charter) 아이디어에 담긴 메시지는 곱씹어볼 만하다. 기업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절대존재가 아니라, 엄연히 사회로부터 ‘권리를 부여받은’ 피조물(약속의 산물)임을 분명하게 일깨워주고 있어서다. 전성인 홍익대 경제학과 교수는 “과거 주식회사 제도가 국왕의 면허장에 의해 탄생한 일종의 특혜기관이라는 역사적 전통을 살리는 의미도 있다”며 “참고해볼 만한 독특한 시도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법인’. 법에 근거해 권리와 능력을 인정받는 존재를 일컫는 말로, 기업이 자유로이 영리활동에 나서며 각종 혜택을 누리는 근거다. 스스로를 “뼛속 깊이 자본주의자”라 말하는 워런의 자본주의 구하기 해법의 첫걸음은 우리 삶에서 기업의 의미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되묻는 일이 아닐까 싶다. ‘기업이 법적 인격체로서 자신의 존재를 당당하게 주장하려면, 응당 그에 걸맞은 도덕적 책무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그래서일까. 워런은 지난 14일 <월스트리트 저널>에 실린 기고문(‘기업은 주주한테만 책임을 져서는 안 된다’)을 이런 문장으로 끝맺음한다. “지난 30년 동안 우리는 대기업이 한줌뿐인 사람들의 이해에 사로잡혀 전체의 이익을 외면했음에도 미국의 인증 도장을 찍어줬다. 우리는 새로운 딜(거래)을 주장해야 한다.” 과연 워런의 담대한 ‘실험’은 성공할 수 있을까.
최우성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시민경제센터 연구위원 morge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