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개편을 두고 논란이 확산하자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이 14일 오후 정부세종청사 복지부 기자실을 방문해 기자들과 대화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과천 중앙부처 과장의 책상머리에서 국가 정책이 만들어지던 때가 있었다. 김영삼 정부 때만 해도 그랬던 것 같다. 어느 기자는 출근하면 부처 주요 과장 옆 탁자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무슨 귀띔이라도 한마디 듣거나, 어깨너머로 기안문을 훑어본 다음날, 그 신문 1면에 ‘ㅇㅇ부는 △△△할 방침’ 이란 기사가 시커멓게 떴다. 신기한 일은 그런 기사가 그리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장관과 청와대가 뜻이 통하면 정부가 국회의 입법 과정을 어렵지 않게 다룰 수 있었고, 노동권이나 시민권은 억눌려 있었던 때였다.
시대는 달라졌다. 지금은 어떤 정책이 첫발을 떼려면 국회, 행정 각 부처, 노동계, 시민단체, 이해관계자, 언론이 각자 목소리로 총을 난사하는 ‘죽음의 계곡’을 통과해야 한다. 많은 아이디어가 이 계곡에서
사라졌고, 정책으로 입안되더라도 취지와 달리 ‘고양이를 그리는’ 일로 끝나는 때도 잦다. 노무현 정부 때도 그랬고 보수정권
9년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정책은 ‘무엇을 할 것인가’ 못지않게 ‘어떻게 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목표는 뚜렷해야겠지만 펼쳐가는 순서, 속도, 소통전략 같은 ‘어떻게’가 뒷받침돼야 비로소 성과가 난다. 특히, 소통은 그래서 뭐가 좋아지는지를 국민에게 알리고 비판에 대응하는 것이다. 이때 어떤 ‘틀’(프레이밍)에 넣어서 제시하느냐에 따라 국민의 지지도가 달라진다. 같은 말이라도 ‘물이 반 컵이나 남아 있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최근 국민연금을 둘러싼 논란이 커지자 13일 “(연금 개편은) 노후소득 보장 확대란 원칙 속에서 논의될 것”라며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직접 진화에 나서야 했다. 문 대통령은 지난달 최저임금을 2020년까지 1만원으로 올린다는 공약을 현실적으로 지킬 수 없게 됐다며 사과했다. 그 밖에 노동시간 단축, 대입제도 개편 등 현 정부가 지난 1년간 추진한 정책들이 난항을 겪는 중이다. “인수위 없이 출범했다”는 말도 유효기간이 지났다. ‘명분(목표)이 좋으니 안될 까닭이 없다’는 낙관과 ‘정권이 힘 있는 초반에 개혁해야 한다’는 조급성이 혼선의 뒤에 어른거린다. 부작용을 줄이고 효과를 최대화하기 위해 정책 실행의 순서와 속도를 면밀하게 준비하는 전략은 부족해 보인다.
국민연금 개편, 인화성 큰데도 면밀한 전략 없어
국민연금은 매우 인화성이 높은 사안이다. 잘못 다루면 정권이 흔들거릴 수도 있다. 문 대통령은 현재 45%(40년 가입기준)인 국민연금의 소득대체율을 50%까지 올리겠다고 지난 대선에서 공약했다. 마침 보건복지부가 5년마다 하게 돼 있는 국민연금 재정계산을 해 보니, 기금 고갈 시기가 저출산, 고령화 등으로 3년 앞당겨질 것으로 예상됐다. 대통령 공약도 이행하고 기금의 안정성도 높이는 것은 상충하는 과제이지만 어쨌든 보건복지부는 숙제를 받은 것이다. “더 받고 더 내자”는 합의를 어떻게 만들지 고민이 필요했다.
그런데 복지부의 대응을 보면 소통과 사회적 합의라는 두 가지 핵심전략이 보이지 않는다. 17일의 공청회에서 “더 많이 받게 된다”와 “대신 더 내야 한다”는 것이 패키지로 발표돼야 하는데, 일부 내용이 사전에 유출돼 “더 많이 내고, 더 오래 내며, 더 늦게 타는” 방안으로 보도됐다. “죽을 때까지 국민연금만 내란 말이냐”라는 국민의 짜증이 무더위에 겹쳐 끓어올랐다. 청와대가 질책할 때까지 복지부는 이런 보도에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했다. 당장의 소통도 문제지만 그간 국민연금에 대한 국민의 믿음과 지지를 키우지 못한 것도 소통 실패다. 인물난 핑계를 대고 13개월 동안이나 기금운용본부장 등 주요보직을 공석으로 방치했다. 올해 들어선 오비이락처럼 운용수익률도 뚝 떨어졌다. 복지부나 국민연금관리공단에서 뭐라 말해도 국민은 실눈을 뜨고 쳐다보게 돼 있다.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 갈 로드맵도 부실했다. 국민연금 개편은 여러 이해관계자와 전문가가 폭넓게 참여하고 숙의를 해 사회적 합의를 해야 하는 사안이다. 그런데 누가 참여해서, 언제까지 어떻게 논의해 결론을 내겠다는 것인지 어떤 계획도 나온 게 없다. 이러다 보니 공청회 발제안이 마치 정부의 의중인 것처럼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순서 뒤집어서 어려움 키운 최저임금 인상
최저임금 인상은 소득주도 성장의 대표적 정책이었다. 국제노동기구(ILO) 등에서 연구된 ‘임금주도 성장’이 한국에서 소득주도 성장으로 버전이 달라진 것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두 번째로 높고, 적정 규모의 3.5배나 되는 자영업 비중 때문이었다. 최저임금 대상 노동자가 대거 일하고 있는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의 지급 능력이 함께 올라가지 않으면 최저임금 인상은 고용 감소로 이어지거나 거센 저항을 만나 정책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
지난해부터 여러 차례 지적이 됐지만,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이 올라간 최저임금을 지불할 능력을 기르는 정책을 병행하거나, 성과를 본 다음에 점진적으로 최저임금을 조정하는 것이 순서였다. ‘2020년 최저임금 1만원’ 공약에 너무 얽매일 필요는 없었다. 정부가 마련한 ‘일자리 안정자금 지원’, ‘카드 수수료 인하’, ‘임대료 조정 국회입법’ 등의 진척을 봐 가며 ‘대통령 임기 내 1만원’ 정도로 속도를 조절한다 해도 결코 작은 성과가 아니었다.
소통도 부실했다. 소득주도 성장을 혁신 성장이나 공정경쟁과의 선순환 속에서 풀어나가지 못하다 보니 최저임금 인상이 정부 경제정책의 전부인 것처럼 인식됐다. 영세 자영업자와 높은 임대료, 프렌차이즈 갑질과 비싼 카드 수수료 등 구조적으로 자영업자들을 옥죄는 세력과 맞서는 쪽으로 담론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그 결과는 아르바이트 수준의 수익을 올리는 편의점 업주와 아르바이트생이 대결하는 ‘을들의 싸움’으로 흘렀다.
지난 7월23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한국중소상인자영업자총연합회 사무실에서 열린 최저임금 인상 입장 발표 기자회견에서 한 참석자가 손팻말을 들고 있다. 한국중소상인자영업자총연합회 등은 대기업·본사, 카드사, 임대인들이 물품대금에 최저임금 인상분 반영, 가맹비 및 필수물품 축소, 카드수수료 인하, 상가임대료 인하 등의 조치를 통한 고통 분담에 나설 것과 국회가 상가임대차보호법, 카드수수료인하법, 가맹거래공정화 법안을 처리할 것, 정부가 중소상인들을 위한 추가적인 지원대책과 갑을 구조 개혁을 위한 과제를 이행해줄 것을 촉구했다. 연합뉴스
주 52시간, 소득-시간 동시 빈곤노동자 대책 세웠나
주 52시간으로의 노동시간 단축은 올 7월1일부터 노동자 300인 이상 사업장에서 시행됐지만 처벌 유예로 사실상 6개월 뒤로 미뤄졌다. 300인 미만, 50인 이상 사업장은 2020년 1월에 시행되고, 2021년 7월에는 5인 이상으로 확대된다. 소규모 사업장은 아직 준비할 시간이 있지만, 막상 1년6개월 뒤 아무 문제없이 시행되려면 준비가 필요해 보인다. 먼저, 우리 사회에 노동시간을 줄이고 싶어도 줄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데 이들에 대한 연구와 배려가 부족해 보인다. 소득과 시간이 동시에 빈곤인 국민은 남성은 2.5%, 여성은 9.1%라는 통계가 있다(한국노동패널 2017년도차 부가조사를 활용한 오혜은의 연구). 소득이든 시간이든 한쪽이 빈곤인 경우가 국민 4명중 1명이란 연구도 있다. 이들 중 적지 않은 경우가 노동시간을 줄이면 연장근로로 보충했던 수입이 사라지고, 겨우 빈곤선을 넘었던 소득이 그 아래로 떨어질 수가 있다. 특히 300인 미만 소규모 사업장으로 갈수록 이런 시간-소득 동시 빈곤층이 많다. 이들도 저녁이 있는 삶이 가능해져야 하지만, 노동시간 단축이 소득을 높이는 정책과 함께 추진되지 않으면 효과를 보기 어렵다. 소득-시간을 함께 보는 빈곤과 불평등에 대한 연구와 통계가 절대 부족하기에, 노동시간 단축 결정시 이런 문제가 어떻게 불거질지 시뮬레이션이 제대로 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연장근로 없이도 생활이 되는 임금체제를 위해 한 번쯤 넘어야 할 ‘진통’ 이라고 봤다면 고통은 비정규직, 여성 등 힘없는 계층이 거의 전적으로 지게 된다. 이번 300인 이상 사업장의 경우에도 주 52시간이 실시된 사업장에서 소득이 수십만원씩 줄어들어 ‘아이 학원비를 끊어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노동자들의 사연들이 인터넷 게시판과 청와대 청원 사이트에 올라오고 있다.
‘정책 거버넌스’ 위기 징후 오래돼
정책마다 암초를 만나는 것은 국민들에게도 불행한 일이다. 그렇다고 대통령의 걱정이나 진정성만으로 해결될 일도 아니다. 먼저 할 일은 정책 결정이 이뤄지는 방식, 즉 정책의 거버넌스를 재정비하는 일이다. 정책은 정치인와 청와대 정책실같이 정무적 판단을 하는 사람, 현장을 알아서 정책이 실핏줄을 타고 어떻게 내려갈지를 아는 관료, 정책지식을 만들어내는 교수와 연구원, 보도와 논평을 해서 여론을 만들고 정책에 피드백을 주는 언론 등이 얽힌 생태계에서 움직인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정책 거버넌스는 위기의 징후를 보인 지 오래다. 우선 정책의 발제자인 청와대와 관료의 호흡이 잘 맞지 않는다. 청와대는 방향을 잘 잡지만 현실감각이 떨어지고, 관료는 정책이 현장에서 ‘어떻게 튈 지’ 알지만 굳이 나서서 소신을 펼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지난 정권에서 앞서 나가던 공무원이 정권 교체 뒤 과장급까지 조사받고 감옥에 가는 것을 본 학습효과도 있다고 한다. 특히 부족한 것은 통합적인 대응이다.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이 분리되기 어려운데 부처 칸막이에 갇혀 번번이 따로 노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치인들은 사회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것이 주 업무인데 그런 일을 가장 못 한다고 욕먹는 곳이 우리나라 국회이기도 하다. 연구자나 위원회 등에서 자문하는 전문가는 주문자(정치인이나 관료)가 원하는 답을 제공하는 ‘납품업자’가 됐다는 자조를 하고 있다. 한국 언론은 정파성의 잣대로 정책 들여다보며, 이데올로기적으로 공격하기 일쑤다. 이러니 되는 정책도 안되는 정책도 없는 현상이 반복된다.
그렇다 해도 ‘난맥’을 뚫고 성공해야 하는 것이 정권을 담당한 이들의 숙명이다. 문재인 정부는 촛불의 탄력으로, 또 남북관계에서 뚫어낸 돌파구로 1년을 달려왔다. 이제는 실력을 보여줄 때이다. 품질을 높여서 하나라도 깔끔하게 성공하는 정책이 나와야 떨어지는 지지율의 칼날을 멈출 수 있다.
이봉현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bh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