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살 넘은 노년 배우들의 해외여행 체험담으로 인기를 모으고 있는 예능프로그램 <꽃보다 할배>(tvN). tvN 홈페이지
‘100살 시대’는 보통명사가 된 지 오래입니다. 나이 드는 것을 고통과 재앙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습니다. 노후를 잘 보내는 방법론이 넘쳐나지만 걱정의 무게는 좀체 줄어들지 않습니다. 자유롭고 편안한 노후는 모든 중장년의 꿈입니다. 그러나 당위성으로 가득한 모범 답안은 그리 도움되지 않습니다. ‘노후경제학’이라는 이름으로 ‘슬기로운 노후 생활’ 이야기를 함께 나눕니다.
2018년 대한민국 중장년은 나이가 주는 불안과 공포에 짓눌려 있다. 노후 뒤에는 ‘불안’이라는 단어가 딱 달라붙어 있다. 국민연금 수령 시기를 68살로 늦추는 등의 일부 개편 검토안이 알려지자 격렬한 분노가 터져나온 것도 이런 ‘불안 저장고’에 불을 붙였기 때문이다. 폐지 줍는 쪽방 독거노인과 치매로 사지가 묶인 채 학대받는 노인은 불안 심리를 극대화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노인 빈곤율과 자살률이 1위라는 변치 않는 통계는 나이 든 사람이 한국에서 살아가기 얼마나 힘든지 잘 보여준다. TV 예능프로그램 <꽃보다 할배>의 여유로운 노후도 있을 테지만, 이는 눈에 잘 띄지 않고 다른 세상 얘기로 다가온다.
젊은이들의 ‘헬조선’ 비명에서 알 수 있듯이 젊다고 하여 불안이 적은 것은 결코 아니다. 사는 게 팍팍하기 그지없고 미래가 없다며 곳곳에서 난리다. 아이 키우기는 얼마나 힘들며, ‘입시 지옥’은 또 어떤가. 사실 인간의 삶, 아니 생명체의 존재 자체가 불안의 연속이다. 살아남기 위해 쉼 없는 투쟁을 한 생명체의 DNA에는 불안의 흔적이 또렷하게 각인돼 있다. 인류의 조상이 상대적으로 안전한 나무에서 땅으로 내려와 직립보행으로 확보한 넓은 시야는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중년의 적인 뱃살은 굶주림이 일상이던 시절 ‘비상식량’을 보관하던 진화 과정의 산물이다. 모두가 삶의 불안을 줄이려는 몸부림이었다.
소멸로 가는 ‘완행열차’
그럼에도 노후 불안이 특별히 무겁게 다가오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삶의 종착역인 죽음과 소멸을 향해 간다는 자연의 섭리 자체가 불안과 우울의 근원이다. 육체적·정신적 쇠퇴와 사회에서 밀려남은 인생이 내리막길에 있음을 수시로 깨닫게 한다. 부양의 의무는 지지만 노후를 맡길 수는 없는 자녀와 낮은 복지 수준은 나이의 ‘짐’을 오로지 홀로 질 수밖에 없다는 절박함을 더한다.
하지만 현재 인생 후반기에 접어드는 한국의 베이비붐세대(1955~63년생)에게 불안이 절대적·물리적으로 크다고 하기는 어렵다. ‘보릿고개’로 대표되는 배고픔이 늘 곁에 있고, 아버지가 내뿜는 담배 연기가 가득한 단칸방에서 예닐곱이 부대껴 자고, ‘푸세식’ 변소에서 신문지조차 없이 뒤를 마무리하던 유년 시절을 이들은 몸으로 겪었다. 더 나이 들어 생활수준이 떨어지고 삶이 고달파지더라도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는 얘기다.
더욱이 좋기만 하거나 나쁘기만 한 일은 별로 없다.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기 마련이다. ‘나이 듦’은 ‘절대악’이 아니며, 예전처럼 일찍 죽는 것보다 낫다. 세상을 넓게 보는 지혜, 느긋한 느림의 미학, 갖가지 의무로부터의 해방 등 적잖은 이점이 있다. 너무나 커 보이는 불안에 압도돼 이런 혜택을 누릴 마음의 여유조차 갖지 못하는 게 노후를 힘들게 하는 가장 큰 원인이다. 여기에 ‘돈이 얼마는 있어야 한다’는 식의 ‘공포 마케팅’이 불안을 조장하고 과장한다. 이들이 금융 사기에 걸려들거나 과포화 상태인 자영업에 뛰어드는 등 무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불안 요소와 위험 지수
슬기로운 노후의 출발점은 자신의 불안을 좀더 객관화해 따져보는 것이다. 그 과정을 거쳐야 자신에게 맞는 노후 준비와 인생 후반전이 가능하다. 불안이란 게 심리여서 의지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지나친 불안에는 백약이 무효다.
노후 불안에 영향을 주는 요소는 무수히 많다. 주관적 요소와 객관적 요소, 사회적 요소로 범주를 나눌 수 있다. 먼저 비슷한 처지인데도 사람에 따라 받아들이는 정도가 판이하다. 매 순간 심하게 고통받는 사람이 있는 반면, 별로 개의치 않는 사람도 있다. 비관과 낙관의 개인 성향 차이가 불안에 크게 작용한다. 불안의 반대쪽에 있는 안락함과 행복감도 비슷하다. 일란성쌍둥이 연구 등에서 인간은 행복이나 불안을 느끼는 능력의 절반 정도를 타고난다고 한다. 나머지 절반은 노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뜻이다.
객관적 요소는 안정적 노후를 위협하는 실질적 위험(리스크)을 말한다. 여러 분류가 가능한데, 여기서는 네 범주로 나눈다. 모든 노후 관련 조사에서 걱정거리 1·2위에 오르는 건강과 재무(돈) 리스크가 있다. 이 둘이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지만, 충분히 대비했다고 안심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건강을 잃으면 막대한 치료비로 재무 리스크까지 키우게 되고, 적정 수준의 돈이 없으면 중대 질병에 시달리기 쉽다.
다음은 관계에 따른 리스크다. 다른 사회보다 관계 긴밀도가 높고, 타인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는 한국 사회에서는 특히 큰 위험 요소다. 가족이나 친구, 주변의 관계 때문에 노후를 힘들어하는 사례는 흔하다. 외로움은 피하고 싶은데 얽힌 게 많으면 그만큼 삶이 피곤해진다. 중장년 부모가 다 큰 자녀를 돌보는 것은 물론이고, 결혼·주택 자금과 남겨줄 것까지 고민해야 하는 한국은 어느 나라보다 자녀 리스크가 크다.
네 번째는 권태 리스크다. 인간은 별일 없는 시간도 견디기 힘들어 한다. 물리적 고통이 없고, 걱정이 사라진다고 해서 편안해지는 것이 아니다. 재미나 보람과 가치가 없어지면 사는 게 지겹고, 그 자체가 고역이다. 돈은 적고 시간은 남아도는 노후는 ‘권태 관리’가 삶의 질을 크게 좌우한다.
미래에셋은퇴연구소는 은퇴 이후 닥칠 수 있는 구체적인 위협 요소로 △성인자녀 △창업실패 △중대질병 △금융사기 △황혼이혼, 다섯 가지를 들어 각 리스크의 발생 빈도와 그에 따른 재무 손실을 계산했다. 빈도로는 성인자녀 리스크가 가장 잦았고, 재무 손실은 황혼이혼 때 가장 크게 나타났다. 노후의 가족관계가 생각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점을 보여주는 연구 결과다.
마지막으로 사회적 요소가 있다. 평범한 사람에게 노후 준비는 개인과 가족의 힘만으로 전혀 가능하지 않다. 뜨거운 현안으로 떠오른 국민연금 개편이나 정년 연령 등 노후에 절대적 영향을 끼치는 사안이 법률, 제도, 정책, 사회적 합의로 정해진다. 사회안전망과 연금제도가 부실할수록 노후 생활은 팍팍해질 수밖에 없다. 한국은 전세계에서 고령화 속도가 가장 빠른 나라임에도 사회적·제도적 대비가 더디다.
노후 준비의 출발점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위태롭지 않다’는 <손자병법>의 구절은 노후 준비에도 유효하다. 노후 불안은 없애는 게 아니라 스트레스처럼 관리하는 것이다. ’행복’에 너무 조바심을 내면 역설적으로 노후가 더 힘들어진다. 비관적 성향에 가까운 사람이라면 불안을 좀더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마음 공부’에 시간과 에너지를 들일 필요가 있다.
네 범주의 리스크에 자신이 얼마나 노출됐는지 꼼꼼하게 따지면 막연하던 노후 준비가 구체성을 띠게 된다. 위험을 줄이는 것이 더 나은 노후의 지름길인 만큼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가늠할 수 있다.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커녕 ‘고령친화 사회’도 기대하기 힘들다. 슬기로운 노후 생활은 자신과 리스크, 그리고 우리 사회를 제대로 아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박중언 기자
parkj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