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혁신가들의 만남의 장인 ‘사회혁신가 테이블’ 다섯번째 행사가 청년 자립을 주제로 지난 12일 서울시 용산구 동빙고동 에스케이행복나눔재단 사옥에서 열렸다. 이날 행사에서는 청년 자립 관련 사회혁신가, 학자, 활동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서로 경험을 나눴다. 왼쪽부터 박진숙 연금술사 대표, 유지황 팜프라 대표, 명성진 ‘세상을 품은 아이들’ 대표.
경상남도 진주시 대곡면 산기슭에 자리잡은 대여섯평 남짓 되는 작은 텃밭. 울퉁불퉁한 보랏빛 가지, 삐죽삐죽 제멋대로 자라난 루콜라와 바질 등 다양한 채소들이 한가득 텃밭을 덮고 있다. “마트에서 파는 농산물에 비해 볼품없어 보이지만 모두 유기농 채소라 맛도 영양도 최고”라며, 밭을 경작하는 유지황(31) 팜프라 대표가 자랑부터 늘어놓았다. 팜프라는 ‘기반 없는 청년 농부에게 주거와 토지, 수익모델 등 농촌 인프라를 제공하자’는 취지로, 올해 2월 청년 셋이 의기투합해 만든 회사다. 평소 농사에 관심이 많았던 유 대표는 대학 재학 중 1년간 세계 농업 탐방을 다녀왔다. 여러 나라의 농장을 떠돈 그는 청년 농부들과 함께 일하며 농사의 미래를 찾았다.
하지만 국외에서 쌓은 경험과 지식을 믿고 의욕적으로 뛰어든 농사일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가장 먼저 부닥친 문제는 농사지을 땅을 구하는 일. 비닐하우스처럼 초기에 많은 자본금이 필요한 농사 모델은 청년들로선 엄두를 내기 힘들었다. 이렇다 보니 대부분 유기농 재배를 택하는 편인데, 논농사를 주로 짓는 농촌에서 이 또한 쉽지 않았다. 어렵사리 조건에 맞는 땅을 찾았다 해도 땅 주인들은 낯선 이방인 청년에게 쉽사리 땅을 내주지 않으려 했다. 농사짓는 땅 구하기가 이 정도니, 주거할 집을 구하는 일은 훨씬 더 어려웠다. 지방자치단체의 문을 두드리기도 여러번. 지원 대상이 안 된다, 관련 사업이 없다 따위의 대답만 돌아왔다.
“농촌에선 청년들이 없어 난리라던데…”
땅과 집을 구하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닌 6년 동안 유 대표는 자신처럼 현지의 높은 진입장벽에 막혀 어려움을 겪는 수많은 청년들을 만났다. 그러고는 결심했다. ‘마냥 정부 지원만 기다리지 말자.’ 팜프라는 이렇게 해서 세상에 태어났다. 현재 팜프라는 농촌 커뮤니티 기반의 다품종 소량생산에 힘쓰고 농막 형태의 이동식 주택인 ‘코부기’를 선보이고 있다.
그러나 팜프라와 같은 도전이 맞닥뜨리는 현실의 장벽은 매우 높은 편이다. 정부와 지자체, 기업까지 나서 다양한 청년 자립 혹은 창업 지원 사업을 펼치고는 있지만, 실효성에 대해선 회의적인 반응이 많다. 가장 큰 문제점으로 꼽히는 건 지원 산업과 대상의 범위다. 종잣돈과 신용이 없는 청년들이 창업 아이디어를 실현하려면 초기 자본금 혹은 창업 인프라 지원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청년 창업 지원사업이 유통이나 정보통신 부문 등 몇몇 산업에 집중돼 있거나, 정규 학교 과정을 밟은 대졸 청년들만을 대상으로 삼고 있다. 팜프라처럼 농업 창업은 당연히 지원 대상에서 제외된다. 대학을 졸업하지 않았거나 탈학교 청년들에겐 지원 사업의 문턱이 너무 높다.
이와 관련해 청년 지원 사업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있는 청년들의 자립을 도우려는 협동조합과 사회적기업들이 차츰 늘고 있는 건 눈여겨볼 만하다. 외식 케이터링 사업을 펼치는 사회적기업 ‘연금술사’가 대표적이다. 박진숙(49) 대표는 학교 밖 실업상태에 놓인 청소년들의 경제적·사회적 자립을 돕기 위해 외식 케이터링 가게인 ‘소풍가는 고양이’를 2011년 5월 열었다. 청년 직원들은 그때그때 달라지지만, 지금도 18살에서 24살 사이의 ‘비대졸’ 청년 서넛과 어른 5명이 힘을 합쳐 사업을 꾸려가고 있다. 다양한 세대가 함께 어울려 일하고 배우는 협력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박 대표의 철학 때문이다. 무엇보다 위계적이고 성과 중심의 교육을 기피하는 청년들을 위해 대안적 노동을 통한 생활형 교육을 지향하고 있는 게 특징이다. 청년 주식소유 제도를 도입해 이곳에서 근무한 지 1년이 넘은 청년 직원들에게 회사 운영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도 신선하다.
교육과 매출 사이 아슬아슬한 줄다리기
‘세상을 품은 아이들’(세품아)은 대안적 가정 공동체를 기반으로 삼아 사회로부터 소외된 청소년들의 자립을 지원하는 비영리기관이다. 세품아는 경기도 부천 지역을 중심으로 오갈 곳이 없는 청소년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면서 시작됐다. 현재는 법원의 보호처분을 받고 위탁된 청소년들의 교육 역할도 맡고 있다. 세품아를 설립한 명성진(50) 목사는 “세품아에 오는 아이들은 모두 깨어진 가정에서부터 문제가 시작됐다”며 “관계가 깨어진 삶을 살아온 청소년들이 제대로 자립하려면 무엇보다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고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교육을 맡은 선생님들이 청소년들과 함께 숙식을 해결하며 생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최근에는 문화예술 분야에서 소셜벤처를 설립한 세품아 졸업생들과 함께 위기 청소년들의 취업과 창업을 돕는 교육 프로그램도 개발 중이다.
이처럼 청년 자립을 돕는 사회적기업이나 협동조합이 꾸준히 늘어나고는 있다 해도, 해결해야 할 과제도 적지 않다. 박진숙 대표는 “가게가 문을 연 지 8년이 됐지만, 아직까지도 교육과 매출을 함께 추구하는 데 따른 부담이 크다”고 고민을 털어놨다. 교육과 비즈니스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게 쉽지 않다는 얘기다. 중간 관리자에 대한 열악한 대우도 시급히 풀어야 할 과제 중 하나다. 정부나 기업의 지원금 또는 투자금이 대부분 신규 일자리 창출에 쓰이다 보니 중간 관리자 교육 및 처우 개선은 으레 뒷전으로 밀리기 마련이다.
이런 가운데 지난 12일 서울 용산구 동빙고동 에스케이(SK)행복나눔재단 사옥에서는 청년 자립을 지원하는 여러 사회혁신가들이 한곳에 모여 고민을 나누고 협력의 실마리를 찾으려는 뜻깊은 자리가 마련됐다. 에스케이행복나눔재단이 후원해 올해 다섯번째 열린 ‘사회혁신가 테이블’(SIT: Social Innovators Table)에 모인 참가자들은 청년 실업을 비롯해 최근의 다양한 ‘청년 문제’의 원인은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사회 구조에서부터 찾아야 한다는 데 공감했다. 참가자들은 또 청년 자립 지원정책이 제대로 운영되려면 우선 청년 자립의 개념이 무엇인지부터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았다. 단지 안정적 일자리를 얻는 것에 한정해서는 안 되고,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고 일을 통해 이를 실현해나가는 경제·사회·심리적 자립까지 두루 아울러야 한다는 뜻이다. 성과 중심의 사회구조에 내던져진 청년들한테서 실패에 따른 부담을 덜어줄 사회안전망이 꼭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이날 행사 진행을 맡은 명성진 세품아 대표는 “줄세우기 방식의 공모형 청년 지원 사업은 결국 성과 중심의 교육 체계 문제점을 답습할 뿐”이라며 “청년들이 도전과 실패의 경험에서 자신의 일과 정체성을 찾을 수 있도록 커뮤니티 중심의 청년 자립 정책과 사업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청년 농부들의 주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팜프라가 직접 설계해 만든 이동식 농막 ‘코부기’ 앞에서 팜프라 멤버들이 환하게 웃고 있다. 왼쪽부터 민재희(28), 유지황(31), 양애진(25)씨.
진주/글·사진 박은경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시민경제센터 연구원 ekpar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