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4월24일 더불어민주당, 바른정당, 정의당의 선거대책위원회 정책본부장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사회적 경제 정책제안 협약식’에서 참석자들이 사회적 경제 기본법제정 등의 구호가 적힌 종이를 들고 있다. 조현경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시민경제센터장
프리즘은 알게 해준다, 빛은 하나가 아니고 일곱 가지 색을 품고 있다고. 찬란한 빛, 그것은 눈부시기만 한 것이 아니고 다양한 존재를 인지할 수 있게 해주는 자연적 조건이며, 다양한 색과 형태로 존재하는 만물이 있으므로 ‘본다’는 행위가 의미를 갖는다. 사회적 경제 기본법도 그런 맥락에서 프리즘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먹고사는 문제에서 국가 경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경제활동과 주체들이 있음을 드러내어 인식하게 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사회적 경제란 예전부터 있었던 경제 행위이며, 오늘날에는 발전된 시장경제와 새로운 사회문제 때문에 시민사회 안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웃에게 고사 음식을 나누거나, 이웃끼리 빌려주고 빌려 쓰는 행위부터, 동네의 길을 넓히는 데에 품앗이하는 아버지와 생활물자를 공동구매해왔던 어머니들의 활동에 이르기까지. 근린생활권에서 나누고 공유하고 협력하여 물자를 조달하는 일까지. 자연스럽고 현명한 협력으로 생활을 개선하고, 마을의 자원을 공동소유하며 이용했던 평범한 삶의 지혜가 있었다. 그러고 보면 마을공동체가 관리했던 공유지를 연구하여 엘리너 오스트롬은 노벨경제학상을 받기까지 했으니, 지구촌은 최근 100년 동안 무엇인가 대단한 변화를 한 것임이 틀림없다.
이제는 삶의 필요를 해결해 가기 위한 마을 단위의 자립적인 경제활동은 사라지고, 시장에 팔기 위해 물건을 만들고, 시장에서 물건을 살 수 있는 돈을 벌기 위해 혈혈단신 고용시장으로 가는 수밖에 없다. 헌법상에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지만, 이때 개인이 가지는 경제적 자유는 고용되는 자유 이외에 허락되는 것은 많지 않다.
현실은 기업의 매출은 늘어도 고용은 늘지 않는다. 기업의 영업이익률과 가계의 실질소득 증가율은 비례하지 않는다. 정년퇴직은 빨라지고 인생을 이 모작해야 하는 고령사회가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참으로 오랫동안, 많이 일한다. 평균 노동시간과 실질적 은퇴연령이 길고 길다. 젊어서는 과로사, 늙어서는 고독사를 당한다. 일이 많아서 죽고, 일이 없어서 죽는다. 이 죽음 뒤에는 관계의 단절이 있다. 노동시장에서의 혹사와 소외를 어쩌지 못하는 사회, 가족ㆍ이웃ㆍ마을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과로사와 고독사는 동일한 원인을 지닌 처참한 두 가지 현상이다.
경쟁에 지치고 낙오되는 일은 자유시장경제의 필연적인 결과물이며, 이를 완화하고 해결하는 것은 오로지 사회의 몫이다. 정부 정책으로만 해결할 수 없고, 시장에서 살 수 있는 솔루션 상품도 없다. 답은 ‘사회’에 있다. 이런 의미에서의 ‘사회’를 국가주도의 계획경제의 ‘사회주의’와 혼동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놀랍다. 프리즘 대신 색안경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이리라. 경제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한 시기이다.
사회적 경제는 산업을 부흥시키는 기업 활동을 부인하지 않는다. 시민들이 자율적이고 자발적으로 만들어온 경제활동이 시민 경제로서 당당히 인정되고, 상호부조하고 협동하는 근린의 경제활동을 활성화해야 할 때이다. 사회적 경제는 이미 역사가 있고, 명백한 실체가 존재한다. 농협, 신협, 생협 등의 전통적 협동조합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활기업, 사회적기업, 마을기업 등이 다양한 법인격을 가지고 실질적인 사회적 성과를 만들어 가고 있다.
지난 11월 22일 사회적 경제 기본법 제정을 위한 시민 행동이 출범하였다. 범사회적 경제 조직뿐만 아니라, 마을공동체, 지역재단을 비롯한 시민사회가 함께 참여하여 조속한 사회적 경제 기본법 제정을 촉구하는 행동을 개시하였다. 기본법을 제정함으로써 경제활동의 사회적 성격을 명확히 하고, 장기적으로 경제의 패러다임을 전환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한다. 얼마 남지 않은 이번 국회에 기대를 걸어본다. 사회적 경제 기본법은 지난 2014년부터 꾸준히 발의됐던 바, 의원들의 인식과 공감이 커졌을 것으로 기대한다.
이번 정부는 국민의 시대가 열렸다고 말한다. 국민의 시대는, 나 스스로 나를 대표하는 정치의 시대라고 표현된다. ‘국민이 자신을 대표하지 못했던 기존의 정치 한계를 넘어 개개인이 권력의 생성과 과정에 직접 참여·결정하는 실질적 주권자인 시대’라고 한다. 그동안 국민의 의사를 대리해 왔던 다양한 정치적 수단이 있다. 국회도 그중의 하나이다.
북한 귀순병사를 치료한 이국종 교수 덕분에 중증외상센터의 예산을 증액하라는 국민 청원이 20만명을 금세 넘었고, 예산을 증액한다는 신문기사를 본다. 국회의원에 의한 대리의 기능이 언제까지 계속될까 생각하게 된다. 4차산업 혁명을 예견하며 일자리가 사라질까 봐 걱정하는 평범한 시민의 두려움이 국회의원에게도 공히 적용될 것이다. 4차 혁명은 시민참여의 형태도 획기적으로 바꿔나갈 것이다. 그 사이 국회는 국민의 의지와 전 세계적인 전환 요구를 적극적으로 대리하는 것이 소임 아니겠는가.
사회적 경제 기본법은 국가와 기업만이 유일한 경제 행위의 주체가 아님을 선포하고, 시민이 만드는 포용적이고 협력적인 경제로 두툼한 사회적 근간이 있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출발이 될 것이다. 프리즘이 빛 안에서 존재하는 다양한 색을 보여주듯, 사회적 경제 기본법은 사회와 경제가 따스하게 어우러져 있는 우리네 삶의 모습을 밝혀 주고, 삶과 삶이 협동으로 연대하여 온전한 삶을 영위하도록 우리 사회를 재촉하게 될 것이다.
안인숙 한국사회적경제연대회의 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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