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공작기계 및 레이저가공기 업체 트룸프의 두 노동자가 레이저로 반도체를 제작하는 청정실에서 일하고 있다. 트룸프 제공
제8회 아시아미래포럼 첫날인 15일 오전, 3명의 기조연사가 서로 다른 관점에서 ‘일의 미래’를 보여준다. 노동경제학의 대가인 리처드 프리먼 미국 하버드대 석좌교수는 첫 기조 연사로 무대에 올라 최근의 지능정보기술 발달이 노동과 경제 전반에 미치는 변화와 구조적 대안을 제시한다. 스마트 제조 역량에서 세계 최선두인 독일 지멘스그룹의 세드리크 나이케 부회장은 인간과 로봇의 협업을 잘 조직하는 곳이 진정한 스마트공장임을 사례를 들어 보여준다. 열악한 노동 현장을 직접 체험하고 이를 책으로 알려온 폴리 토인비 영국 <가디언> 칼럼니스트는 노동, 여가, 가정이 균형을 이루는 ‘좋은 일’이 어떤 것인지 제시한다.
이어지는 원탁토론에서는 이정우 경북대 명예교수가 좌장을 맡아 세 명의 기조연사, 노동시간 및 유연화 문제 전문가인 하르트무트 자이페르트 독일 한스뵈클러재단 선임연구위원, 김영호 단국대 석좌교수와 함께 다양한 각도에서 발제 내용을 조명한다.
리처드 프리먼 미국 하버드대 경제학과 석좌교수
■ 소수가 기술 통제하면 로봇 봉건제로 갈 위험 리처드 프리먼 교수는 “미래에는 로봇을 소유한 자가 세상을 지배할 것”이라며 “우리는 인공지능과 로봇 기술이 모두를 행복하게 하도록 이를 나누어 소유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프리먼 교수는 기술이 없앤 일자리보다 더 많은 일자리가 만들어져 실업이 급격히 늘지는 않겠지만, 노동의 형태와 노동을 둘러싼 사회적 관계가 적지 않게 변할 것으로 내다봤다. “노동자는 갈수록 기계를 보조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란 전망이다.
프리먼 교수는 이런 큰 변화에도 노동은 여전히 보람되며 일하는 사람이 적정한 소득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하지만, 지금처럼 기술발전의 성과가 로봇이나 인공지능 같은 고도화된 자본을 소유한 이들에게 집중되는 시스템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실제 지난 수십년간 자동화 등 기술변화는 지속됐는데 이에 따른 생산성 향상의 과실을 자본 소유자가 더 많이 가져가다 보니 소득 격차가 크게 발생했다. “소수의 사람과 공장이 새로운 기술을 통제한다면 우리는 ‘로봇 시대 봉건제’(robot-age feudalism)로 돌아갈 위험이 있다. 로봇 소유자는 번창하는 반면 대다수는 힘겹게 살아가야 한다”고 그는 우려한다.
이를 피하려면 기술발달의 과실을 자본과 노동이 나누는 체제를 만들어야 하는데, 노동자에게 기업의 지분과 이익을 나누어 주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안이라는 게 그의 의견이다. 프리먼 교수는 “소수에서 다수로 자본주의 소유구조를 바꿔, 디지털화의 이익이 로봇 소유자에게 온전히 흘러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업 소유권의 광범위한 분산을 디지털 자본주의의 미래상으로 보는 것이다.
프리먼 교수는 하버드대 경제학과 허버트 애셔먼 석좌교수로 있으며, 하버드 법대 노동과 직장생활 프로그램의 공동책임자를 맡고 있다. 중국과 한국 노동시장, 과학자와 기술자 취업시장, 이민과 무역이 불평등에 미친 효과 등을 연구해왔다.
■ 기술변화에 따른 유연성, 고용주-노동자 모두에 동등해야 폴리 토인비 칼럼니스트는 “처음에는 인터넷과 디지털이 노동을 해방시킬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현실에서 노동자는 밤낮없이, 쉬는 날조차도 고용주가 요구하면 언제든 일해야 하는 ‘노예’로 전락할 위험에 처해 있다”고 말한다. 토인비가 이렇게 걱정하는 오늘날 노동의 변화를 설명하는 중요한 열쇳말 중 하나는 ‘플랫폼 노동’이다.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노동력이 거래되는 플랫폼 노동이 장시간 노동, 불안정한 소득으로 인해 노동자들의 삶을 위협하고 있다는 진단이다. 플랫폼 노동은 ‘호출형 근로’와 유사한 형태인데 한국의 배달앱 노동자부터 차량 공유업체 우버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그 형태는 매우 다양하다.
토인비는 “노동시간 통제권을 상실할 때 노동자의 삶은 심각하게 영향을 받는다. 유연성은 고용주와 노동자 모두에게 동등하게 쌍방향으로 작용해야 하며, 시간의 지배권이 고용주에게 집중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불안정한 소득을 메우려면 더 오래 일해야 하고, 그럴수록 자녀나 노인을 돌보기가 어려워” 일과 삶의 균형이 깨지기 쉽다는 것이다.
토인비가 생각하는 ‘좋은 일’의 기준은 “사회적 상호작용, 승진 가능성, 훈련, 노동 방식에 대한 자기통제와 변형 가능성” 등이다. 하지만 “많은 플랫폼 노동은 이들 중 어떤 기준도 충족하지 않는다”고 그는 비판한다. 토인비는 대안으로 “권력의 균형을 위한 노조 조직의 부활”과 “더 많은 세금을 통한 복지의 확충”을 제안한다. “국가는 고용주의 힘을 제어하고, 노동자의 자유를 보장하는 역할”을 해야 하며 “가족에게 필요한 돌봄 서비스를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토인비는 역사학자 아널드 토인비의 손녀이자 노동 현장 탐사보도로 알려진 언론인이다. 열악한 노동 현장을 직접 체험한 뒤 불안정 노동의 비참한 현실을 생생하게 고발한 저서 <하드 워크>는 한국에 <거세된 희망>(개마고원, 2004)으로 번역 출판됐다.
■ 고용도 생산성 향상도 만족시키는 스마트공장 세드리크 나이케 부회장은 “모든 산업혁명이 그러했듯이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노동 유형도 변화할 것이다. 로봇 발달과 산업 자동화로 인해 반복 작업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비숙련 노동직은 세계적으로 감소하고 새로운 일자리가 창출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제조업 강국 독일은 일찍부터 기술의 디지털화를 예견하면서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산업 경쟁력과 노동자 일자리의 공존을 고민해왔다. 디지털화와 자동화를 통한 경쟁력 강화를 위해 ‘산업 4.0’ 개념을 설정하는 한편, 기술이 노동에 끼치는 영향을 다루려고 산학연, 정부가 함께 ‘노동 4.0’이란 사회적 대화를 진행하고 있다.
산업용 정보기술 설비 부문의 세계적 기업인 지멘스도 독일의 산업 4.0, 노동 4.0 전략을 적용해 경쟁력과 일자리 문제를 함께 해결해왔다. 독일 바트노이슈타트의 모터공장이나 암베르크에 있는 자동화제어설비 공장이 그 본보기다. 1989년 설립된 암베르크 공장에서는 스마트 공정 도입으로 불량률을 50분의 1로 낮추는 성과를 거뒀으면서도 기존 인력인 1100명을 그대로 고용하고 있다. 감원 대신 생산량을 8배 늘리고 불량률을 줄이는 방식으로 일자리와 생산성 향상을 동시에 만족시켰다. 노동자들은 주로 제품 개발, 디자인, 생산설계, 예상 밖 상황 대응을 맡는다. 지멘스는 자동화 기계가 효율적이지만 아이디어를 통해 시스템을 개선하는 일은 여전히 사람의 몫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연간 생산성 향상의 40%는 직원 제안으로, 60%는 설비투자를 통해 이뤄진다는 것이다. 나이케 부회장은 “과거의 기술 전환 사례가 알려주듯 직업의 변화 시기에는 일자리도 계속 생겨날 것”이라며 그 대책으로 “노동자들이 꾸준히 새로운 기술을 익히고 부가가치를 높여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나이케 부회장은 지멘스 경영이사회 구성원으로 지멘스의 에너지 사업 부문과 아시아·오스트레일리아 지역을 대표한다.
이봉현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bh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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