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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경제일반

주문상품, 디지털로 생산 시연뒤 자동화공장서 똑같이 ‘뚝딱’

등록 2017-10-29 19:11수정 2017-11-09 17:25

[제8회 아시아미래포럼 기획] 일의 미래: 독일을 보다
① 일터가 달라진다- 스마트 혁신
최첨단 스마트공장 ‘지멘스’
생산계획·재료·기계 등 서로 연결
실시간 데이터로 작업 전과정 진행
준비시간 60% 줄이고 품질 높여

‘트룸프’·‘베르마’도 스마트 혁신
고객 주문을 QR코드 입력해 생산
다양한 제품 다음날 받을 수 있게
작업자 센서가 재료·부품량 감지
생산시간 낭비 줄여 고효율 생산

독, 제조업 혁신 발판 ‘2.0% 성장’ 기대
지멘스의 바트노이슈타트 모터공장에서 책임자인 페터 체히가 생산 과정의 ‘디지털 쌍둥이’가 작동하는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바트노이슈타트/이봉현 연구위원
지멘스의 바트노이슈타트 모터공장에서 책임자인 페터 체히가 생산 과정의 ‘디지털 쌍둥이’가 작동하는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바트노이슈타트/이봉현 연구위원
일하는 사람을 고려하지 않는 4차 산업혁명은 고통일 수 있어

종결점이 무인자동화일 때 혁명은 곧 ‘재앙’
바람직한 ‘일의 미래’를 독일은 한발 앞서 준비
기술과 노동, 복지가 함께하는 스마트 혁신 필요

지난해 알파고 충격 이후 관심을 끌기 시작한 ‘4차 산업혁명’은 이제 한국 경제 혁신의 대명사가 됐다. 대통령 직속 4차 산업혁명 위원회도 발족했다. ‘사람 중심’의 4차 산업혁명을 표방해 과거 정부와 다른 모습이지만, 기술발전의 종착점을 ‘무인 자동화’로 받아들이는 우리 사회의 인식은 불안한 구석이 적지 않다.

과거는 미래의 거울이다. 한국은 산업 현장에서 로봇을 가장 많이 쓰는 나라이다. 효율을 추구하는 경영자에게 불평도 파업도 퇴근도 하지 않는 로봇은 많아서 나쁠 것이 없었다. 하지만 경제 전체로는 좋은 일자리가 줄어들고, 자동화 뒤의 부수적인 일은 저가에 하청을 주는 노동시장의 이중구조를 낳았다. 여기에 인공지능 같은 더 센 기술이 가세하면 멋진 신세계는커녕, 나빠진 근로조건, 실업, 분배의 불평등이 기다릴 수 있다.

다른 길을 찾아가는 나라도 있다. 제조업의 나라 독일은 산업 현장의 자동화와 디지털화를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리면서도 노동과 분배, 복지제도의 변화를 함께 고민하면서 나아간다. 노사정이 거듭 대화하며 공동결정한다. 우리가 바라는 ‘좋은 일’이 있는 미래를 독일은 먼저 준비하고 있었다. 일하는 사람 중심의 4차 산업혁명을 추구해온 독일을 이달 중순 현지 취재했다. 편집자

공작기계 업체 트룸프의 디칭겐 공장에서 직원들이 생산 현황을 보여주는 데이터를 보고 있다. 트룸프 제공
공작기계 업체 트룸프의 디칭겐 공장에서 직원들이 생산 현황을 보여주는 데이터를 보고 있다. 트룸프 제공
프랑크푸르트에서 아우토반을 한 시간 반 정도 달리면 잘레 강변에 바트노이슈타트라는 시골 마을이 나온다. 중세풍의 이 도시에는 80년 전부터 산업용 모터를 생산해온 세계적인 기업 지멘스의 공장이 있다. 도시도 공장도 오래됐지만 이 공장은 세계에서 가장 앞선 스마트 작업장이다. 제조업 디지털화의 핵심인 ‘사이버물리시스템’(CPS)이 실제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 공장은 보여준다.

안내를 받아 입구에 들어서니 여러 대의 모니터와 제어장치에 색색의 그래픽과 데이터가 움직이고 있었다. 이 공장을 보러 오는 이들을 위해 올해 5월 문을 연 시연장이다. 하지만 모형을 보여주는 과학관 같은 곳은 아니다. 이곳 화면의 데이터나 그래픽은 걸어서 2분 거리인 모터공장에서 돌아가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 <매트릭스>에서는 가상공간과 현실이 연결되고 또 교차한다. 이 시연장의 화면은 바로 옆 모터공장의 디지털 복제본이라 할 수 있었다. 사이버물리시스템은 사물인터넷을 사용해 기계, 도구, 제품이 서로 연결돼 통신하고, 때로 자체 작동하는 시스템이다. 이를 통해 제품의 생산계획과 과정, 재료 조달, 고객 서비스의 디지털 복제판을 만들어 언제든 생산과 서비스의 전 과정을 시뮬레이션할 수 있다. 이는 공장 내 수천곳에 부착된 센서가 생산하는 데이터가 무선망을 통해 실시간으로 수집돼 3차원 설계 및 영상기술로 구현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이 공장의 디지털화 및 기계화 책임자(부문장)인 페터 체히는 ‘디지털 쌍둥이’(디지털 트윈)라는 개념을 사용해 실제 쓰임새를 설명했다. 먼저 고객이 A라는 모터를 주문하면 디자인 및 기능 설계, 작업 공정 및 사용할 기계 등 엔지니어링 계획, 품질 테스트 및 납품 등 서비스 계획이 나와야 한다. 과거에는 여러 부서에서 서류로 연락하면서 일을 했다. 하지만 이제는 기계와 부품, 장비의 상태가 실시간으로 파악이 되고, 단계마다 ‘디지털 쌍둥이’가 만들어져 가상공간에서 작업 준비가 이뤄진다.

모터의 앞 커버를 만들 때 어떤 모양으로 디자인하고, 구멍을 어느 위치에 어느 기계와 드릴로 뚫을지, 그 공작기계의 최근 작업 상태는 어떤지가 실시간으로 ‘디지털 쌍둥이’에 전달돼 생산이 시연된다. 이후 승인이 나면 공장의 자동화된 기계들이 똑같은 과정으로 신속하게 모터를 만들어낸다. 이쯤 되면 디지털이 원본인지 실물이 원본인지 헷갈리는 상황이다. 그 뒤 둘러본 생산공장은 여느 자동화된 공장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곳곳에 방금 시연장에서 본 데이터가 분주히 움직이는 것이 이곳이 스마트공장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페터 체히 부문장은 “아직 계속 개발하는 과정이긴 하지만 이 시스템을 통해 개발 시간과 공정을 단축하고 자원 활용을 효율화하며 품질을 높일 수 있다”고 이점을 설명했다. 마치 차를 몰기 전 목적지를 내비게이션에서 검색하고 가면, 사이버 세계의 도움을 받아 도로에서의 시간 낭비와 기름 낭비를 줄이는 것과 같은 원리다. 지멘스는 별도의 자료에서 이 공장이 생산 준비 시간을 60%나 줄여 결국 수주에서 완제품까지의 제작 시간을 40% 단축했다고 밝혔다.

사이버물리시스템 등을 통한 지능화는 여러 종류의 맞춤형 제품을 빠르게 납품받길 원하는 고객에 대응하는 핵심 경쟁력이다. 공작기계를 제작하는 업체 트룸프(TRUMPF) 역시 이런 스마트 시스템을 활용해 맞춤 생산인 시투엠(Customer to Manufacturer) 생산에 잘 대응하는 곳 중 하나다. 독일 남부 슈투트가르트 외곽 게를링겐에 있는 공장에 들어서자 표준화 책임자인 야쿠프 코스쿤이 노트북 앞으로 손을 끈다. 화면에서 금속에 구멍을 내는 펀칭 툴의 형태를 고른 뒤 원하는 수치를 입력하라고 했다. 이 공장은 트룸프의 공작기계에서 쓰이는 펀칭 툴 같은 가공용 도구를 만들어주는 곳이다. 방금 노트북으로 한 일은 전국의 중소 철제작업체에서 인터넷을 통해서 수시로 하는 일이다. 여기서 만드는 하루 800~1000개의 도구 가운데 표준화된 80%는 이렇게 인터넷을 통해 주문된다.

고객이 입력한 주문은 공장 내 기계와 재료, 인력 등의 데이터와 결합해 생산계획을 담은 정보가 된다. 이 정보는 원재료인 쇠뭉치 위 가로세로 5㎜ 크기 큐아르(QR)코드에 입력된다. 그 뒤에는 이 작은 큐아르코드가 레이저로 자르고, 깎고, 구멍 뚫는 모든 과정을 관리하는 지시자가 된다. 실제 공장은 온라인 주문만 들어오면 하루 24시간, 일주일 내내 알아서 돌아갈 정도로 자동화가 되어 있었다. 공장에 들어올 때 시험 삼아 입력한 10㎝ 안팎의 펀칭 툴은 30여분 만에 방문 기념품이라며 박스에 담겨 나왔다. 코스쿤은 “이제는 고객이 다양한 사양의 제품을 빨리 받고 싶어하는 시대여서 이런 시스템이 꼭 필요하다”며 “오후 2시 이전에 주문하면 다음날 아침에 택배로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트룸프는 자료를 통해 2009년부터 개발되기 시작한 이 시스템으로 나흘 걸리던 배송이 하루로 줄었고 생산성이 71% 향상됐다고 밝혔다.

트룸프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고 있다. 디지털로 기계, 부품, 제품을 실시간으로 연결해 고객의 기계가 어떤 상태이고 무얼 원하는지 파악해 컨설팅하는 서비스로 나가고 있다. 스마트화는 이렇게 시장, 업종, 기업의 경계를 허물며 새로운 사업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헤닝 반틴 ‘플랫폼 산업 4.0’ 사무총장은 “전형적인 제조업체들이 스마트 플랫폼과 결합하면서 실제 굉장히 많은 가치 체인의 변화를 겪고 있다”고 말했다.

지멘스는 세계 35만명의 직원에 전년도 매출이 796억유로(약 104조원)나 되는 큰 기업이다. 트룸프도 국내외 1만여명의 직원에 31억유로(약 4조원)의 매출을 올리는 중견기업이다. 스마트 혁신은 이런 큰 기업만이 아니라 중소기업으로도 확산하고 있다. 독일은 ‘히든챔피언’(세계시장 점유율 1~3위의 강소기업)이 제조업을 튼튼히 뒷받침하는 나라여서 그 의미는 적지 않다.

트룸프의 게를링겐 공장에서 제작될 부품의 재료에 주문과 생산 정보를 담은 데이터가 입력되고 있다. 트룸프 제공
트룸프의 게를링겐 공장에서 제작될 부품의 재료에 주문과 생산 정보를 담은 데이터가 입력되고 있다. 트룸프 제공
독일 남서부 투틀링겐 근교 인구 2700명의 작은 마을에 있는 베르마(WERMA)가 그런 곳이다. 직원 350명인 이 회사는 공장의 작업자 옆에 가져다 놓는 재료나 부품의 양을 센서로 감지해 자동화하는 물류 시스템을 개발했다. 이를 통해 종이로 오갈 때 생기는 오류를 없애고, 재료가 없어 작업자가 그냥 대기하는 시간을 줄이는 저스트인타임(JIT)의 물류가 가능해졌다. 베르마는 비교적 설치가 간단한 이 시스템을 국외에 수출해 도약할 꿈을 꾸고 있다. 전략마케팅 책임자인 미하엘 그롤은 “시그널 기술로는 이미 유럽 선두주자였는데 이 작업장 물류 시스템을 통해 히든챔피언 기업 대열로 올라설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몇년간의 혁신 노력이 세계 경제의 회복 기조와 맞물려 최근 독일 제조업은 세계 제1의 입지를 한층 확고히 했으며 경제의 활력이 뚜렷해졌다. 독일 경제부는 올 성장 전망치를 애초 1.5%에서 2.0%로 올렸다. 4차 산업혁명이 ‘유행어’일 뿐이란 이들도 많지만, 그 모태가 된 제조업의 스마트 혁신은 독일에서 일터를 바꿔가고 있었다.

슈투트가르트/글·사진 이봉현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시민경제센터 연구위원 bh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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