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 서울시 종로구 참여연대에서 열린 대선후보 캠프 초청 '재벌개혁 경제민주화와 청년 중소상인 민생정책 토론회'에서 네 후보 캠프 관계자들이 나와 토론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2일 열린 ‘19대 대선 후보 캠프 초청 경제민주화와 청년·중소상인·자영업자·민생 정책 토론회’에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 캠프의 김상조 새로운대한민국위원회 부위원장(한성대 교수)이 한 말이다. 대통령령 등 하위 법령의 중요성을 언급하면서다. 이날 토론회는 ‘재벌개혁과 경제민주화 실현을 위한 전국네트워크’ 등의 주최로 참여연대 2층 아름드리홀에서 열렸다.
“일반적으로 모법에는 추상적인 내용만 담고, 구체적인 내용은 시행령에 위임하곤 한다. 그런데 모법인 상위법에서 위임하지 않은 내용이나 상위법 취지와 다른 내용이 시행령 등 하위 법령에 들어가 있는 경우가 많다. 디테일에 숨어 있는 악마를 찾아서 바로잡아야 한다.”
김 교수는 “이명박·박근혜 정부 10년 동안 하위 법령이 상위법 취지를 왜곡하고 개악한 사례가 너무 많다. 집권을 하게 된다면 디테일한 부분까지 일제 점검을 벌여 정비하겠다”고 말했다.
김 교수의 이 발언은 “(경제민주화 정책과 관련해)법률 개정의 어려움을 자꾸 말씀하시는데, 법을 바꾸지 않고도 정부 의지만으로 할 수 있는 것도 있지 않느냐”는 청중의 질의에 대한 답변 과정에서 나왔다. 한 자영업자는 “법에는 가맹점 계약을 함부로 해지할 수 없도록 돼 있는데, 대통령령에서는 계약을 해지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놨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앞서 김 교수는 민주당의 공약을 설명하면서, “여러 개혁 과제는 결국 법 개정이 필요한 사안이다. 그러나 현재 의회 구도나 정치 일정상 법 개정은 쉽지 않은 일이다. 법 개정에 대해선 너무 기대하지 않는 게 좋다”고 말했다. 법 개정은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하므로 일단 행정 수단을 통해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는 취지였지만, 자영업자 등 토론회에 참석한 이들한테서 “개혁 의지가 없는 것 아니냐”는 질타가 쏟아졌다. “절망적이다. 정권 바꿔서 뭐 하나 싶다”는 험한 말도 나왔다.
김 교수는 답변에서 “대통령이 바뀐다 하더라도 결국 법은 국회가 만드는 것이다. 법 개정을 위한 노력도 해야겠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개혁 입법의 국회 통과 노력과 함께, 하위 법령에 숨어 있는 ‘악마’를 찾아내는 일도 중요하다는 얘기다.
김 교수의 지적처럼 그동안 시행령이나 규칙 등 하위 법령에 의해 상위법이 무력화되는 일이 적지 않았다.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이 대표적인 사례다. 2015년 5월 해양수산부가 공포한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은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에서 진상 규명의 핵심 업무를 담당하는 조사1과장에 검찰 서기관을 임명하도록 규정했다. 야당과 특조위, 유가족 등은 “검찰 서기관이 임명될 경우 특조위의 독립성이 침해될 수 있고, 이는 공정한 조사를 보장하기로 한 상위법에 위배된다”며 반발했다. 논란 끝에 시행령이 법률의 입법 취지에 어긋나는 경우 국회가 행정부에 수정을 요구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국회법 개정안이 여야 합의로 국회를 통과했다. 이에 박근혜 대통령은 거부권 행사라는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국회에 맞섰다. 청와대 쪽의 이런 초강수는 그동안 정부가 시행령을 ‘전가의 보도’처럼 써 왔음을 단적으로 반증해준다.
이 밖에도 ‘법 위의 시행령’,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행정입법’의 사례는 많다. 이명박 정부는 2009년 국가재정법 시행령을 고쳐 4대강 사업의 예비타당성 조사를 건너뛸 수 있었고, 2014년에는 의료법 시행규칙을 고쳐 ‘의료 영리화’ 논란을 부른 병원의 부대사업 범위를 확대했다. 2014년 당시 정의화 국회의장은 “정부의 행정입법이 상위 법령인 법률을 훼손하는 이른바 ‘법령의 하극상’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너무 입법에 기대지 말고 행정부가 할 수 있는 것부터 하자는 김 교수의 말이 그리 틀린 주장은 아니다. 정권 초기에 언제 될지 모를 개혁 입법에 매달리다 보면, 한발도 내딛지 못한 채 시간만 허비할 수 있다. 그만큼 우리 정치 지형에서 개혁 입법을 통과시키기가 어려운 탓이다. 실제 올해 초 여야 원내지도부가 큰 틀에서 합의했던 경제민주화를 위한 상법 개정안(다중대표소송제 등)은 여전히 상임위의 문턱조차 넘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차기 정부는 누가 대통령이 되든 ‘소수 여당’ 체제다. 설득하고 토론해야 할 야당도 여럿이다. 한두 당과 손을 잡는 데 성공한다 해도 국회선진화법이란 장애물을 넘어야 한다.
이렇게 국회에서 개혁 입법을 두고 줄다리기를 하며 시간을 속절없이 흘려 보내는 동안, 국민들의 개혁에 대한 피로감은 커질 가능성이 크다. 영세 자영업자 등 서민들의 눈물도 계속될 것이다. 대통령과 여당의 의지로 할 수 있는 것부터 바꿔 가면서 ‘개혁 체감도’를 높이고, 개혁의 불씨를 살려갈 필요가 있다. 지난 10년 동안 보수 정권이 행정 수단을 통해 저질러 놓은 ‘적폐’가 적지 않으므로, 이것만 정상화해도 서민들의 눈물을 일정 부분 닦아줄 수 있으리라 예상된다.
그렇다고 개혁 입법 노력을 게을리해선 안 된다. 법으로 뒷받침돼야 안정적인 개혁을 할 수 있다. 행정입법은 여전히 ‘꼬리’일 뿐, ‘몸통’은 법제도이다. 여당과 대통령은 국정 과제 실현을 위해 꼭 필요한 법률이라면, 응당 정치력을 발휘해 다른 정당을 설득해야 한다.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최적의 결과를 내놓는 것이 정치인의 덕목이다.
김 교수는 최근 토론회 등의 자리에서 ‘현실적 어려움’이나 ‘실현 가능성’을 자주 언급했다. “시민단체들의 요구들을 다 들어줄 수는 없다” “‘할 거냐 말 거냐’는 식으로 묻지 마라”와 같은 말이 대표적이다. 집권 가능성이 높은 정당의 정책 브레인으로서 책임감과 부담감이 큰 탓일 게다. 그러나 “할 수 있는 걸 하는 게 무슨 개혁이냐. 해야 할 건 해야 한다”는 한 토론회 참석자의 말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종규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jk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