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상반기 미국에서는 신생 행동주의 헤지펀드 ‘아이즈 캐피털’(Ides Capital)이 나스닥 상장사 보잉고(Boingo)를 공격한 일이 화제가 됐다. 아이즈의 여성 펀드매니저가 여성 이사 임명을 비롯해 이사진 교체 요구를 전면에 내세웠기 때문이다. 행동주의 펀드는 특정 기업의 지분을 확보한 뒤 주주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해 기업 가치를 높이고 수익을 내는 전략을 사용한다. 이들은 배당 확대 요구나 재무적 조언을 하는 것은 물론 지배구조 개선에도 개입한다. 아이즈는 보잉고 기존 이사진이 성별 측면에서 지나치게 동질적이라고 보고 재편 요구에 나선 셈이다.
2015년 설립된 아이즈는 지난해 3월 보잉고 경영진에 요구사항을 전달했으나 수용되지 않자, 같은해 5월 다른 주주들에게 공개 서신을 띄웠다. 보잉고는 공항 등에서 와이파이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로, 매출이 1억4000만달러(약 1640억원) 정도다.
아이즈는 공개 서신에서 보잉고 이사진에 대해 “사실상 동일한 배경을 가진 평균 연령 59살의 (백인) 남성들”이라고 비판했다. 또 “다양성이 결여된 이사진은 집단토의에 취약하다. 다양하고 신선한 아이디어가 종종 결여되기 때문이다. 2011년 기업 공개(IPO) 이래 5년간 보잉고는 단 한 명의 여성 또는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지닌 이사를 임명하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아이즈는 여성 한명을 포함한 2명의 새 이사를 추천했다. 이어 보잉고의 의사결정 구조, 재무적 투명성과 주주가치가 제고되면 보잉고의 주가가 두배로 뛸 수 있다고 다른 주주들을 설득해나갔다. 당시 보잉고 주가는 기업 공개 시점보다 54%나 하락한 상태였다.
보잉고는 처음에 지분율이 미미한(0.4% 이하로 추정) 아이즈의 요구를 거절했다. 하지만 글로벌 의결권 자문기관인 아이에스에스(ISS)가 보잉고 주주들에게 아이즈가 추천한 이사진에 투표하도록 권유하자, 지난해 6월 여성 이사를 한명 선임하는 쪽으로 선회했다. 미 언론도 이런 변화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다. 이후 보잉고 주가는 아이즈의 문제제기 시점 대비 65%나 상승했으며, 펀드는 그만큼 수익을 올리게 된다.
그런데 행동주의 헤지펀드가 왜 이사회 성별 다양성을 문제 삼고 나선 것일까? 여성 이사의 존재가 기업 이익을 끌어올리는 효과라도 있는 것일까?
실제 여성 임원이 많은 기업이 성과가 좋다는 연구 결과는 여럿 나와 있다. 지난해 2월 미국 피터슨경제연구소가 전세계 2만1980개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를 보면, 여성 관리자·임원 비율이 30%인 회사는 여성 관리자·임원이 아예 없는 회사보다 6%포인트 수익을 더 올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앞서 글로벌 컨설팅 기업인 매킨지가 유럽 89개 기업을 분석해 2010년 내놓은 결과를 봐도, 여성 고위임원 비율이 높은 회사가 자기자본수익률에서 1.1%포인트, 영업이익에서 5.3%포인트, 주가 상승률에서 17%포인트 더 높은 성과를 냈다. 이는 최고경영진 구성원 중 여성 비율이 높은 기업의 성과를 같은 분야 기업 평균치에 견줘본 결과다. 물론 이런 결과가 남녀 임원 중 여성의 경영 능력이 더 우수하다는 결론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피터슨경제연구소는 “최고경영자의 성별은 회사의 수익성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지적했다. 여성 임원 비율에 주목하는 것은 기업 이사회에 ‘다양성’이란 강점이 있는지를 살피는 맥락이란 얘기다. 이 때문에 이사회 내 성별뿐 아니라 국적, 세대, 인종의 다양성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아이즈 캐피털의 주주권 행사 “동질적 남성으로만 구성된 이사회 아이디어 결여돼 집단토의 취약” 보잉고, 논란끝 첫 여성이사 선임 회사 주가 10개월만에 65%나 뛰어
“여성임원 많은 기업이 성과 높다” 통계상으로도 이미 수차례 입증 개인 경영능력 아닌 다양성 효과 이사들의 국적.세대 등도 중요 동질성 깨 부패방지.독립성 기여
아이즈의 공동 창업자인 여성 펀드매니저 다이앤 매키버는 ‘이사회의 동질성’이 왜 문제가 될 수 있는지 사례를 들어 설명했다. 그는 지난해 10월 <뉴욕타임스>와 한 인터뷰에서 “어떤 회사의 임원들은 주가가 내려가도 평일에 정기적으로 골프를 쳤다. 이사회의 감독 부족 탓이었다. 회사 경영진은 모두 남자였고, 여성 이사가 한 명 있었지만, 임원들은 가까운 친구 사이였다. 이사회의 끈끈함과 배타성은 (골프를 줄이고 경영에 집중하라는) 필요한 결정을 내리는 데 장애물이었다”고 짚었다.
실제 국내 기업 문화에서도 남성 관리자·임원 집단의 지나친 동질성이 부패와 비리, 수직적 의사결정 구조 등 폐해를 낳으며, 여성 임원 확대가 이를 완화하고 해소하는 구실을 할 것이란 주장이 나온다.
서지희 삼정케이피엠지(KPMG) 전무는 “여성 임원 모임에 나가면 ‘멘토’를 해주는 데 적극적이지만, 일 관계로 직접 얽히는 것은 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모임이 사업상 네트워크로 기능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밀어주고 끌어주는 남성들의 네트워크와는 다른 방식이다. 남성은 사회화 과정에서 이미 형성된 남성 인맥과 네트워크를 활용하는 법을 배우지만, 여성은 그럴 수 없기 때문으로 짐작된다”고 말했다. 이어 “(여성 임원) 한두 명으로는 (기업 문화에) 의미 있는 변화를 가져올 수 없고, 여성 임원이 20% 정도는 되어야 다양성 측면에서 이사회와 기업 투명성이 더 개선되리라 본다”고 덧붙였다.
또 임희정 한양사이버대 교수(경영학)는 “최근 입사하는 젊은 세대는 일뿐만 아니라 가정과 개인도 중시하고, 접대나 군대식 문화를 선호하지 않는다. 조직 내 세대 갈등이 커지면서 기업도 문화를 바꿔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기존 문화에 익숙한 남성 임원들이 문제를 해결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글로벌 기업에선 여성 관리자 비율을 끌어올리려 한다”고 짚었다.
앞서 국내에서도 행동주의 헤지펀드가 우리 기업에 이사회의 다양성을 요구한 사례가 있다. 삼성전자 주주인 엘리엇 매니지먼트가 지난해 배당 확대와 회사 분할 등을 요구하고 나섰을 때 크게 주목받진 못했지만 이사회 다양성 문제도 함께 제기했다. 엘리엇은 지난해 10월 공개 서신을 통해 삼성전자 이사회의 다국적 경험과 성별 다양성이 애플 등 경쟁사보다 뒤떨어져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삼성전자도 이사회 다양성을 높일 뜻을 밝혔다. 성별 다양성에 대한 해법을 내놓지는 않았지만 추후 글로벌기업 최고경영자(CEO) 출신 사외이사를 추천하겠다고 지난해 11월 발표한 것이다.
이 사례는 글로벌 행동주의 헤지펀드가 한국 이사회의 내부 동질성을 눈여겨보고 있음을 드러낸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를 보면, 한국의 2014년 기준 여직원 수 대비 여성 임원 비율은 0.4%로 자료가 있는 오이시디 31개 회원국 가운데 꼴찌다.
적극적 주주권 행사를 앞세운 행동주의 펀드가 한국 기업에 개입하는 비중은 아직 낮은 편이다. 하지만 앞으로는 차츰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최순영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지난해 9월 내놓은 보고서에서 “외국인 투자자의 높은 국내 기업 지분율, 대기업의 사내 유보금 증가,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기업의 배당 증대 요구 등 행동주의 헤지펀드가 활동하기에 우호적인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지난해 11월 라임자산운용은 국내에서 처음으로 행동주의 헤지펀드를 내놓기도 했다.
물론 국내외 행동주의 헤지펀드의 기업 개입이 늘어난다고 해서 이사회 다양성이 최우선 이슈로 부각될 것이란 얘기는 아니다. 배당 확대 요구 등 더 쉽게 수익을 올릴 기회가 산적해 있기 때문이다.
현대자동차 그룹 본사가 위치한 서울 서초구 헌릉로 본사 건물.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하지만 이사회 독립성 확보 차원에서 다양성 문제가 제기될 여지는 있다. 앞서 현대자동차가 2014년에 10조5천억원이란 엄청난 비용을 치르며 서울 강남권 한전 부지를 사들이는 결정을 내려 논란거리가 됐다. 국내외 투자자들 사이에선 현대차 이사회의 독립성이 취약하다는 점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란 얘기가 오르내렸다. 박유경 네덜란드연기금(APG) 아시아 태평양 기업지배구조 담당 이사는 “아시아 기업 이사회는 독립성 확보가 최우선이다. 경영진을 지지하는 쪽으로 한목소리를 내는 게 아니라 다양한 목소리가 이사회 내부에 필요하다. 이사진의 다양성은 독립성에 기여한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은 독립적 이사회가 갖춰지지 않은 상태라 성별 다양성 논의가 아직 나오지 않고 있지만, 이것이 반드시 순차적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한국에 자본주의가 서구보다 더 압축적으로 도입됐듯이, 지배구조 측면에서도 ‘독립적이고 전문성 있는 여성 이사’를 뽑는 식으로 더 빠른 발전이 가능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김효진 기자
jul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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